소설리스트

27화 (27/58)

“양 여사 연말까지 일하고 그만두겠대.”

“예?”

이번엔 구 비서의 음성이 커졌다. 운전을 하던 차예진 씨까지도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들은 단 한 번도 양 여사가 주인의 곁을 떠나는 사실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양 여사가 없으면 복장 터지는 억지쟁이 우주인을 누가 말린단 말인가. 그녀라고 딱히 내세울 만한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주인은 그녀가 말하는 것에 관해 듣는 척은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기운 빠져 일 못하겠다고 실버타운 들어간대.”

“어떻게…….”

“아무 데나 들어가게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실버타운을 세웁니까?”

일단 양 여사가 그만두고 아니고를 떠나 돈 문제는 구 비서에게 매우 심각한 화제였다. 그렇다고 양 여사가 은퇴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구 비서에게 더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뭐든 최고급으로 만들어. 요즘 돈 많은 노인네들 많아서 돈 좀 될 거야.”

물론, 양 여사를 아무 실버타운에나 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주인의 말에는 찬성하는 입장의 구 비서였다. 하지만 실버타운 이란 것이 뚝딱뚝딱 집 하나 지어 올리는 문제도 아닌데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 얄밉지 않은가. 그리고 당장 양 여사가 그만둔다는데 저 태연한 태도 또한 그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사장님!”

“왜.”

하지만 구 비서 역시 약한 남자였다. 대뜸 정색을 하고 되묻는 주인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는 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지금은 다른 때도 아니라 시즌 아니던가.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슬러 죽지야 않겠지만 맞아 봤자 하소연할 곳도 없다.

“실버타운 세우는데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지금 벌러 가잖아.”

“그런 겁니까?”

“아니면 그 시끄러운 데를 내가 왜 가.”

“아…….”

다른 사람이 말하면 다짜고짜 ‘이 미친놈!’ 소리를 하겠지만 우주인의 입에서 나오니 그럴듯한 주장이 되어 버렸다. 구 비서는 이렇게 쉽게 납득하는 스스로를 황당해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 저 개초딩이 저지른 일이 어디 한두 개여야 미친놈에 ‘미’자라도 꺼내 보지 말이다.

“양 여사님 그만둬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을 리가 있어? 그런데 어떡해. 관둔다잖아. 목에 밧줄 감아 묶어 놔? 그런다고 밥 해주겠어?”

“대안이 없으면…….”

“쳇! 먹을 거 앞에 두고 굶어 죽는 짐승은 없대.”

“양 여사님 말씀이십니까?”

“…….”

차가 시내로 접어들면서 창문 밖으로 구경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번잡한 곳을 싫어하는 주인이 제 발로 여의도에 가자했으니 모르긴 해도 그의 전설을 아는 증권 맨이라면 오늘 죽어라 주인의 뒤를 따라다닐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의 행운일 것이다.

“코딱지가 곧잘 흉내 정도는 내.”

“예?”

“…….”

“사장님?”

구 비서는 뜬금없이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리는 주인에게 대답을 재촉하였다. 어째 이번 시즌의 그는 종잡을 수가 없다. 기분이 좋은 거 같게도 보이고 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밥 굶어서 성질부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안심해도 돼.”

“하지만 삼봉 씨 내년 봄이면 머슴살이가 끝나는 거 아닙니까?”

우주인은 희한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그럴듯하게 멋진 미소였지만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선명했다. 오랜 경험은 그것을 적절한 질량의 위협이라 판단했고 구 비서는 얌전히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내가 밥까지 굶고 미쳐 날뛰면 막을 재주 있어?”

“……없는데요?”

비굴한 구 비서의 대답에 주인은 낄낄대며 웃었다. 소리 없이 미소 짓는 것보다 더 확연한 위협에 구 비서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없으면 지금부터 뭘 해야 할 거 같아? 아주 씹어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 줘야 해?”

“아……. 알아들었습니다.”

“좋아.”

입안에 혀처럼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비서. 눈치가 좋을 뿐 아니라 업무 처리 능력까지 혼자서 수십의 몫을 해낼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셈이다. 우주인은 그런 의미에서 꽤 훌륭한 비서를 두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구 비서에게 불만이 없었다. 구 비서는 어찌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우주인이 돈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것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엔 돈 냄새를 잘 맡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도 있다. 증권가로 들어서자 구 비서는 오늘 로또에 당첨되는 그 하이에나를 금세 만날 수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정 차장이 버선발-실제로는 발가락 양말이었지만-로 뛰어나와 주인을 반긴 것이다. 과장된 환영의 인사에 답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정 차장이 원하는 것은 주인이 투자하고자 하는 항목과 투자 기간을 엿듣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주인의 신발도 핥을 인간이다.

구 비서는 정 차장의 동행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주인을 위해 무엇이든 내줄 수 있는 직위에 있는 사람이 오늘의 로또 당첨자라는 것은 시즌 중인 주인을 모셔야 하는 구 비서에게도 적절한 행운이었으니 서로의 요구가 부합하는 셈이다.

그들은 비교적 조용히 움직였고, 정차장은 아귀처럼 만족을 모르는 그의 뱃속으로 꽤나 많은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너무도 일상적인 평화가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언제나 사람은 후회를 하게 된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이미 사건이 벌어졌다는 뜻이고, 사건이 벌어진 후에 밀려오는 후회는 대부분 그저 지독한 속쓰림만 낳을 뿐이었다.

주인은 자신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칼을 보며 낄낄대고 웃는 중이었다.

그는 분명 집을 나서기 전 배 변호사의 엄포대로 각서를 썼다. 칼침을 맞기 전에는 사람 패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그것을 떠올리며 구 비서는 울고 싶어졌다.

우주인은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전설을 아는 이들에게 친절하게 로또 당첨의 행운을 안겨 주는가 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쪽박 찰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어떤 원한이나 미움도 없는 변덕일 뿐이다.

주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그의 변덕을 경계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그의 전설을 맹신하는 자들의 마음에 욕심이란 놈이 입김을 불어 넣으면 단순한 변덕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도 하는 법이다.

순식간에 엄청나게 벌어들인 돈으로 주인은 많은 친구를 얻었지만 그놈에 변덕 때문에 또 많은 적을 만들었다. 본인은 아무런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수행하는 입장에서의 구 비서는 그런 원한 관계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런다고 저 망할 개초딩이 사악한 취미 생활을 그만둘 리는 없었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심술을 부리다가는 언젠가 대로변에서 칼침 맞을 거라는 경고도 사실상 주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일 뿐이다. 우주인을 상대하려면 손바닥만 한 칼이 아니라 2000와트 전기톱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말이다.

“아프잖아…….”

VIP 라운지 경비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는 동안 옆구리에 박힌 칼자루를 내려다보던 주인이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피는 철철 흐르지만 구 비서는 단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먼저 찔린 건 우주인이다.

고로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완벽하게 정당방위다.

그런데 정당방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인정해야 하는지는 법조인이 아닌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초췌한 얼굴의 살인 미수범을 작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목격자들은 옆구리에 칼을 박고 있는 피해자의 발광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구 비서 역시 그리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구 비서의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피해자 즉, 우주인이 죽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지만 구 비서가 염려하는 것은 아무리 정당방위라고 해도 공공장소에서 주인이 사람을 죽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워낙에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위인이신지라 구 비서는 자신의 고용주가 칼 맞은 상황 따위는 걱정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과는 달리 주인의 발작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달려든 괴한의 칼에 찔린 직후 낄낄대던 주인은 ‘아프잖아.’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가볍게 괴한의 멱살을 낚아챈 그는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사람답지 않게 부드러운 몸짓으로 괴한을 밀어붙였고, 주인의 옆구리에 칼을 박아 넣은 직후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공격 의지를 상실한 괴한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VIP 라운지의 유리벽으로 내동댕이쳐진 괴한의 몸무게는 그것을 박살내기 충분했기 때문에 누가 말리거나 할 사이도 없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라운지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뛰쳐나간 괴한은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들 사이를 뒹굴며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었다.

유리벽이 없어진 창틀을 타고 넘어가는 주인의 자취로 선명한 붉은빛의 흔적이 생겼다.

누군가는 경찰을 부르고 또 누군가는 구급차를 외친다. 있는 자들의 사치스러움으로 한껏 가식적인 교양을 휘두르고 있던 VIP 라운지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계까지 내몰린다면 사람이라고 해도 짐승과 그리 다를 것은 없다. 적어도 구 비서가 우주인을 통해 알게 된 인간의 세상은 그러했다.

증오면 증오. 집착이면 집착.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그것이 선명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하면 ‘사회적인 인간’이라든지 ‘사고의 인간’이라는 수식어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지금 구 비서가 보고 있는 가해자-어떤 관점에서는 피해자라 볼 수도 있는- 역시 그런 종류의 내몰림에서 극한의 결정을 한 것이리라.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그럴싸했지만 남자의 몰골은 이미 망가진 인형을 보는 것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발걸음을 옮긴 대가는 저런 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망가트리는 것뿐이다. 그가 잃은 것. 그리고 앞으로 그가 잃을 것을 생각한다면 구 비서는 지금 자신의 고용주인 우주인보다는 이미 모든 것을 망쳐 버린 저 괴한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에게 인간적인 어떤 동정심이 아직 한 가닥이나마 남아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인간 구라’가 아니라 우주인의 구 비서였다.

실버타운 건설에 필요한 돈은 벌게 될 테지만 아주 오랫동안 우주인은 그를 아끼는 어르신들의 걱정을 들어야 할 것이다. 병문안도 받아야 할 것이고, 질색하는 모임에도 꾸준히 나가 잔소리를 들을 테니 그만큼 신경질도 많아질 것이다. 그건 차후의 문제이고 일단 공공장소에서 칼을 맞은 사건이니 경찰이 조사를 할 거다. 명백하게 피해자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가해자가 우주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미리 조사를 해 놓을 필요가 있고, 배 변호사는 방울 소리 울리며 뛰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구린 게 많은 집구석에 경찰이 드나들어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구 비서는 불현듯 행복해 졌다.

경비원과 출동한 경찰이 합세를 하여 괴한을 타고 앉아 두들겨 패고 있는 우주인을 끌어내자 의외로 주인은 얌전히 그들의 손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하는 구 비서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괴한의 얼굴로 제 얼굴을 바짝 붙여 뭔가를 말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구 비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무도 주인이 괴한에게 m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어지지도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구급대는 이 아수라장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한 채 처음 한동안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인의 옆구리에 박힌 칼은 제거되지 않았지만 주인은 필요한 모든 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피곤죽이 되어 꿈틀거리는 괴한이 먼저 경찰과 함께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주인은 매우 조심스러운 보살핌을 받으며 들것에 실렸다.

구 비서는 구급대와 함께 앰뷸런스에 타는 것을 거절했고 그 뒤를 따라가겠노라고 말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삼봉은 정신 줄을 놓은 상태로 방에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와서도 한참 동안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방안의 전경이었다.

개판도 애진작에 지나 멍멍이 판이 된 지 반나절은 지난 것 같은 방안 꼬라지에 가출한 정신머리가 냉큼 귀가해 주셨다.

지난밤의 일이라든지 각서라든지 우주인의 얼굴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그는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컵을 씻고 이불을 개서 이불장에 넣어 두는 익숙한 일상의 일들 속에 복잡한 고민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마침내 방안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 해 놓고 나자 불현듯 다리 사이 묘한 부분의 쓰라린 감각이 끼어들어 왔다. 여전히 그는 아무런 고민도 해결하지 못했고, 충격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난장판이 되어 있던 방안만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아…….”

가만히 한숨을 쉰 삼봉은 생각 없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돌침대에 뛰어든 우주인이 왜 돌 맞은 개새끼처럼 짖어 댔는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돌침대도 침대인데 왜 이처럼 딱딱한 것일까.

“음마……. 숭보면서 닮는다더만 내가 딱 그짝이구먼……. 쯧쯧쯧.”

대놓고 스스로를 비아냥거려도 급체한 것처럼 갑갑한 명치께가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충격요법으로 인해 완전히 술이 깨고 난 뒤부터 지난밤의 기억이 단편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까물거리는 지난밤의 장면들이 퍼뜩 지나가고 후딱 스칠 때마다 삼봉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딱히 그것이 불쾌하다거나 싫은 기분이라서가 아니었다.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는 거친 숨소리가 있었다. 가릴 것도 꺼릴 것도 없이 제멋대로 표현하는 욕망이 있었다. 순진한 호기심도 장난기 어린 친근함도 있었다. 으레 이렇게 해야 한다는 틀을 벗어버린 후련함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정삼봉이라는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낯설고 선명해서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스스로가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 어쩌면 대견했다.

“아그그그그……. 갑갑시러워라. 또 그 요상한 냥반이 뭐라고 억지를 쓸 껴. 내가 미쳤지. 뭐 한다고 그런 각서를 쓰고 그랬을까. 암만해도 내 술버릇이 개차반을 벗어난 겨. 술을 주둥이로 마신 게 아니라 콧구녕으로 들이킨 겨. 그러지 않고서야 내둥 잘 있다 대체 그 물건이 왜 보고 싶어진 겨? 안 그려? 내가 미친 겨. 틀림이 없어. 홱 돌아 버린 겨. 음마? 근데 실성하는 것도 전염되는 거 아녀?”

욱하는 성질 머리의 정삼봉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려. 책임지는 겨. 술도 내가 처묵었고, 덮친 것도 내가 한 겨. 막말로 아자씨는 자다 날벼락 맞은 거 아녀. 그 성질 머리에 그만하고 넘어가는 것도 용한 겨.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사내답게 책임을 지는 겨. 암! 그래야 하는 겨.”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삼봉은 결연한 의지를 세우며 단단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좀 성질 머리가 요상하고 억지를 써 대서 그렇지 본성은 착한 겨. 나만 같았어도 자다 넘의 다리 긁는 것도 아니고 술에 쩔여서 기어들어 오는 인간을 그냥 두겄어? 안 그려? 아줌니랑 선상님이랑 비서 행님이 살살 앵기고 따돌려도 모른 척하는 것만 봐도 그려. 말만 툭툭 거리면서 툭박시러워 그렇치 맘까지 그런 건 아니자녀. 금자한테 하는 것만 봐두 알자녀.”

누가 들으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상황이지만 삼봉은 주인의 역성을 들고 있었다. 도무지 납득이 불가능한 지난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주인이 꽤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주인이 남자이고, 억지 쓰고 떼 부리는데 있어서는 초등학생도 감당 못할 만큼 유치하고 황당하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은 삼봉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그려. 내가 죽일 놈인 겨. 내가……. 우씨!”

하지만 갖은 애를 쓰며 노력하는 것도 결국엔 한계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었다.

“난 지 취향 아니라고 소리 박박 질렀자녀. 그럼 내가 설사 덮치더라도 싫다 그래야지 냉큼……. 그게 뭐 하는 짓이랴. 참말로 요상한 사람 아녀. 악악! 대가리 깨지겄네. 아이고 아부지. 삼봉이 머리 깨지겄시유.”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은 삼봉에게 지나치게 복잡하고 또 난감할 따름이었다.

“아직도 고민 중?”

넋 나간 사람처럼 제 방으로 돌아간 삼봉을 기다리다 못해 배 변호사는 삼봉의 방을 찾았다. 다행히 그는 아침나절의 충격에서 얼마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

작게 입을 벌린 채 배 변호사를 돌아보는 삼봉의 얼굴은 딱 그 나이 또래였다. 고민이 많고 갈등하고 번민하지만 폭풍과 같은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강한 젊음. 배 변호사는 그런 삼봉의 젊음이 부러워 속이 쓰렸다.

“혹시 변호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왔는데? 너라면 내가 수임료 싸게 받고 해주마.”

“야?”

“일종의 직장 내 성희롱 내지는 성추행이지. 고소할 수도 있고, 네 고용 계약서를 기반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어. 사실……. 사장님 손버릇 나쁜 건 정평이 나 있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래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한 방안에 앉아서 삼봉은 고개만 갸웃거린다. 배 변호사는 미소 띤 얼굴로 삼봉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사실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사장님이 워낙에 강경하게 넌 아니라고 하셔서 잠시 방심했었다. 몸은 괜찮니? 원한다면 병원에 데려가 줄게.”

“병원에 왜유?”

생뚱맞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삼봉의 표정이 꼭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 변호사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몸 괜찮니? 그러니까……. 사장님이랑 그…….”

“아……. 뭔 그깟 걸 갖고 병원에 간대유. 괜찮어유.”

“괜찮아?”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배 변호사가 아는 한 삼봉은 지독히도 순진한 보통 사내아이였다. 주인이 침대에서만큼은 그 더러운 성질 머리를 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그런 사내와 밤을 함께 보낸 후에는 결단코 괜찮을 수가 없었다.

잠시 배 변호사가 머뭇거리는 동안 삼봉은 새로운 의문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장님이 지를 고소하신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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