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58)

“훗……. 일이 재미있어지네?”

“언제 오셨습니까?”

“딱 재미있어지는 부분부터 들었지롱.”

“저게 재미있으십니까?”

“응. 구 비서는 재미없어?”

뭐든 진지한 법이 없는 배 변호사가 싱글싱글 웃으며 커피를 권했다. 양손에 주렁주렁 보따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침 배달인 모양이었다. 착하게도 커피까지 가져왔으니 구 비서는 불만이 없다.

“어쩌면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지도 모르겠어.”

“예?”

“새벽에 경찰에서 연락이 왔거든. 가해자 측에서 의도적으로 사장님이 자신에게 사기를 쳐 쫄딱 망했다고 주장한대. 한미순인가 하는 여자의 사주를 받았다고 아주 상세하게 진술을 했다나 봐.”

사기가 아니란 말인가? 구 비서는 삼봉에게 해 준 주인의 말을 단 1%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미순이라는 여자는 알지도 못하고, 사장님이 누구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그런 분도 아니라고 강경하게 말했지. 사장님이 칼에 찔린 건 명백한 사실이고 얼마든지 증인도 증거도 확보할 수 있지만 저쪽은 그저 그렇게 주장하는 것뿐이잖아? 문제가 되지는 않아.”

“아…….”

“정말 문제는 저 녀석일껄?”

“예?”

배 변호사는 몹시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디가 재미에 목숨 거는 스타일이라서 도박 중독자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옆에서 보기에는 증상이 심각해 병원 치료가 필요한데 본인은 그게 절대로 병적일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제가 번 돈을 노름에 탕진하는 것이니 그 이상 입에 올리기도 껄끄러웠기 때문에 구 비서는 그저 상관하지 않기로 결정 내린 지 오래였다.

“사장님은 야단난 거라고. 저게 저래 보여도 보통이 아니야. 나한테도 단단히 못을 박더라구. 지가 덮쳤으니 지가 책임진다고. 사장님 졸지에 발목 잡히게 생긴 판이잖아? 재미있을 거야. 구 비서. 기대해. 무식하고 유치하고 뒤끝 있는 개초딩이랑 질기고 독한데다 반듯하고 시끄러운 코딱지의 빅매치라고. 돈 걸래?”

“하아…….”

정말로 한심했다. 구 비서의 눈에는 고장 난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 재미있다며 낄낄대는 배 변호사가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 순간까지도 저놈에 노름 본능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검사 결과가 나오면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요. 오진일 확률이 우세하겠지만……. 사실이라면 삼봉 씨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사람이 살아야지요.”

“아! 오다가 주치의 만났어. 검사 결과 나왔냐고 물으니까 나왔다던데?”

“그래요? 뭐랍니까.”

“뭐라기는……. 당연한 걸 갖고.”

배 변호사는 배시시 웃으며 구 비서의 어깨를 툭 쳤다.

“역시……. 오진입니까?”

“응. 뭐가 잘못되었던가 봐. 정상이래. 암만 봐도 연약하고 섬세한 불치병 환자 스타일은 아니잖아 정삼봉이?”

분명히 오진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런 확신을 확인받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구 비서의 마음에 아직 양심이나 동정심 같은 것이 남아서 그는 배 변호사가 한 어떤 말보다 지금의 이 말이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인정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잠시나마 알고 지내던 사람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면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 아니던가. 후련한 기분이 되어 웃고 있던 구 비서의 귀에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우주인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기 지지 않을 정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대는 삼봉의 음성도 들려왔다.

“어때. 재미있을 거 같지?”

“글쎄요. 아직 시즌 중이고…….”

“사장님이 시즌 중에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거 봤어? 난 이 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는데.”

“아?”

“시즌은 끝났어. 이 친구야.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들의 친절한 금자 씨가 저 망할 개초딩의 허벅다리를 덥석 깨물어 주실껄?”

적어도 오늘 이 순간만큼은 구 비서의 눈에도 배 변호사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반가운 소식을 두 개씩이나 물어준 예쁜 사람이 아닌가.

“돈 걸래?”

“…….”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양 여사는 삼봉이한테 삼천 걸었어. 차예진 씨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고.”

“배 변호사님은 어디 거셨습니까?”

“난 사장님. 저 인간이 쉽게 변할 인간은 아니지. 더군다나 삼봉이는 아직 어려서 전력이 약해.”

구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장님한테 한 장 걸겠습니다.”

“오케이. 한 장. 크게 쓰는데?”

병실 안에서 어제 개복 수술을 두 차례 한 남자와 백혈병에 걸렸다는 말에 쓰러져 하루 온종일 잠만 처 자던 남자가 왁왁대고 싸우는 동안 그 둘의 승부를 두고 거대한 내기 판이 벌어졌다.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배 변호사가 삼봉에게 너 백혈병 아니래 라는 말을 했을 때 삼봉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래서 병 있다는 말을 들으면 없는 병도 생기는 것이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삼봉은 딱 그 나이 또래의 사내아이로 보였다. 얼마나 혼이 빠져나갔는지 배 변호사가 가져온 도시락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주인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 씨! 밥맛 떨어지게. 구 비서. 이거 데리고 나가. 나가서 너도 밥 먹어. 오늘 퇴원할 거니까. 그거 집에 데려다 두고 넌 니 일이나 해. 시끄러워 밥을 못 먹겠네.”

“……음마? 아자씨 식사하시면 안 되는디유?”

“시끄럽거든? 의사 말 듣다가 굶어 죽을 일 있어? 어제부터 쫄쫄 굶었잖아. 어제 아침에 먹은 녹두죽이 다라고.”

“그려도 배 쨌는데 방귀도 뀌기 전에 밥을 드시면 워째유!”

“흥!”

가열 차게 콧방귀를 껴 댄 주인이 여봐란 듯 입이 미어터지게 밥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우적우적 맛있게도 먹어 대는 모습을 보니 시즌이 끝났다는 배변의 짐작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짐승의 시기가 도래하였을 때 주인은 저 체격을 어떻게 유지하나 싶을 정도로 소식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나면 그간 모자랐던 영양분을 보충하기라도 할 듯 무식하게 먹어 재끼는 것이다.

“너나 잘하시지. 너 어제 하루 종일 퍼져 잔 거 월급에서 다 깔 꺼야!”

“건 맘대로 하시구유. 그만 자시라니께유!”

“울다가. 웃다가. 성내다가 아주 가지가지 한다? 그러면 똥구멍에 털 나는 거 아냐?”

“이 아자씨가 참말!”

용감하게도 밥 먹은 우주인의 숟가락을 뺏으려 드는 삼봉은 구 비서가 말렸다. 저 초딩은 딱 훈련되지 않은 개 수준이라서 밥 먹을 때 건드리면 문다. 그가 아무리 정삼봉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삼봉의 편을 들어줘야 할 거 같았던 것이다.

“삼봉 씨. 나가시죠.”

“비서 성님. 시방 아자씨 밥 드시면 안 되유. 큰---일 나유!”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탈이 나면 또 수술하게 되겠고, 고생은 사장님 몫이죠. 저 몹시 시장합니다. 집에 데려다 드리면 아침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거야 뭐 어렵겠시유. 헌디 저 참말로 안 되는디…….”

구 비서의 손에 삼봉은 거의 질질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환자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젊은 레지던트는 운이 좋지 않았다. 담당 환자를 바꾸고 싶어 했던 여자 동기는 아무리 잘났어도 못 먹는 떡에는 관심 없다며 깔끔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문이란 것은 그렇게 빨라 병원 내부 사람들은 이미 특실의 문제 환자가 젊은 레지던트를 찍어서 요란하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소문이란 것이 으레 그러하듯 뼈를 더하고 살을 붙여 아예 살림 차렸다는 말까지 나오기 직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담당 환자였기 때문에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마음속으로 백만 번쯤 외치며 어렵게 들어온 병실 안에서는 어지간한 잔칫집 부럽지 않게 아침상이 차려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당연스럽게도 특실의 문제아는 아구아구 그걸 쳐드시고 계셨다.

“밥 먹었냐? 생각 있으면 너도 와서 거들어.”

“사장님?”

신문을 보고 있던 배 변호사가 아연실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저 우주인이 자기 먹는 밥을 누구와 나눠 먹겠다 말하는 것은 처음 본 광경이었던 것이다. 칠 년을 하루같이 수족처럼 부린 구 비서도 양 여사의 밥을 먹어보지 못했다는데 이 무슨 괴변일까.

자신이 받은 제안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젊은 의사가 꽥꽥 소리를 질러도 배 변호사는 너무 놀라 그저 망연자실 ‘사장님.’만 외칠 뿐이었다.

“지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한글 못 읽으십니까? 여기 금식이라고 쓰여 있는 거 병실 인테리어 하려고 붙여 놓은 거 아니거든요?”

“거참!”

챙캉 소리를 내면서 숟가락이 날아갔다.

그나마 환자라고 양심이란 게 있으니 숟가락 던지는 것으로 끝났지 컨디션이 평소만 같았어도 밥상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우주인은 자신이 밥 먹는데 옆에서 잔소리하는 사람을 봐 주는 일이 없었다. 양 여사쯤 되면 모를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저 젊은 의사가 꽤나 우주인의 취향인지도 모른다.

“나 요새 일진이 왜 이래. 왜 밥 먹는데 쨍알대는 인간이 이렇게 많은 거야.”

“삼봉이는 인간이 아니라 코딱지라면서.”

“그래! 코딱지는 빼고.”

“의사 선생이야 자기 맡은 바 의무와 책임이 있으니 잔소리 하는 건 당연하잖아. 보통은 어제 배 째고 오늘 밥 먹는 인간이 없거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다지 우주인 수발을 들어주고픈 마음은 없었지만 배 변호사는 여벌로 챙겨 온 수저를 꺼내 주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 모습이 의사의 눈에는 결정적인 크리티컬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것 봐요!”

“너 이름이 뭐야?”

“이……! 이……!”

배 변호사는 젊은 의사가 잘하면 울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젊은 의사는 소리 지르며 우는 대신 가운의 이름표를 주인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보이십니까? 외과 이병진. 환자분 눈에는 제가 뭘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전 의삽니다. 의사요!”

“병진? 음……. 병진? 병신?”

“으아아아아아악!”

“배변. 배변. 이거 이름이 병신이래. 혹시 우리 집에 의사는 필요 없어? 어쩐지 얘도 수집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

“주치의가 있으면 폼은 나겠죠.”

“그렇지? 배변도 그렇게 생각하지?”

기가 막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의사를 가운데 두고서도 주인과 배 변호사는 한가하기 짝이 없는 농담들만 주고받는 중이었다. 물론 둘 다 지금 하고 있는 말을 농담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사의 귀에는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들기 위해 깐죽거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너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

“하아……. 하아…….”

가쁜 숨만 몰아쉬는 의사의 눈에 살기가 어린다. 주인의 말대로 키도 크고 스타일도 괜찮은 남자지만 그 정도의 남자가 살기를 보인다고 해서 우주인이란 놈이 외눈이나 끔뻑할 위인이던가. 배변은 대단히 평온한 상태로 우주인과 의사의 신경전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죽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말해. 내가 죽여줄게.”

“있습니다.”

“누군데?”

“저 지금 진심으로 환자분을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어……. 그건 좀 곤란한데? 내가 날 죽일 수는 없잖아. 생각해봤다가 떠오르면 말해. 그리고 우리 집에 들어와 내 주치의 하는 거다. 오케이?”

“오케이는 뭔 놈에 오케입니까. 환자분은 제가 단란주점 종업원으로 보이시는 겁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 의삽니다. 의사! 제가 왜 환자분 주치의로 간단 말입니까. 대체! 대체……. 대체 그 안하무인은 뭐에서 비롯된 자만심이냐구요!”

원래 의사가 환자와 개인적인 말다툼을 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좀 잘났거든. 그리고 내 주치의로 들어오는 게 뭐가 어때서? 당장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밥만 만드는 여사님이 우리 집에 한 분 있거든? 다른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내 밥만 차려 주시는 분이야. 그 분 월급이 얼마일 거 같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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