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58)

주인은 발칵 언성을 높였다. 마음에서 절반 정도는 그녀의 은퇴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놓고 이리 나오면 성질이 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아. 진짜! 좀 더 해주고 가도 되잖아!”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자는 동안 짐 싸서 도망가는 수가 있어.”

“쳇!”

“농약 안 친 밭이면 콩잎도 좀 따오게.”

“콩잎?”

“콩잎 김치 좋아하지? 그거 해줄게.”

양 여사는 우주인 다루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들이 우주인이라는 사람을 상대하지 못해 쩔쩔매지만 그녀만큼은 어떻게 해야 성질난 우주인을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알고 또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노란 거.”

“파란 건 싫어?”

“것도 좋아. 그런데 노란 게 더 좋아.”

“그건 시간이 좀 걸려. 잘 삭혀야 되는데 암만 사장님이 성화를 부려도 삭는 건 시간이 해주는 일이니까. 찬바람 불어야 먹을 수 있을걸?”

“노란 거 만드는 방법도 가르쳐.”

“그러려고 콩잎까지 따오겠다는 거잖아.”

양 여사의 여유 앞에서 주인은 방긋 웃었다. 풋풋한 초록의 콩잎 물김치나 노랗게 습자지처럼 얇은 콩잎 절임을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많이 늦어?”

“많이 늦어.”

“그럼 저녁은 비빔밥 해먹자 그래야겠다.”

“코딱지랑 비빔밥 해먹을 거야?”

양 여사는 대뜸 날을 세우는 우주인을 모른 척했다.

“사장님도 없고 날도 더운데 이것저것 만들기 귀찮잖아. 반찬들 몽땅 넣고 비빔밥이나 해서 먹고 말지.”

“…….”

일그러진 얼굴에 잔뜩 심술이 붙어 있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양 여사는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며 주인을 무시했다. 심술 났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자 주인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양 여사 혼자 먹어. 코딱지랑 같이 먹지 말고.”

“둘이 있으면서 둘이 각자 딴 상 차려 먹어?”

“코딱지는 바빠.”

“집안일 하는 애가 다 저녁에 바쁠 일 뭐가 있어서.

“차예진 씨하고 안 가.”

“택시 타고 가려고?”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주인이 양 여사를 한번 보고는 정원에서 열심히 잔디를 깎고 있는 삼봉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양 여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삼봉이 데려가려고?”

“여자는 못 데려가. 더군다나 차예진 씨 성질에 그런데 가서 발작 안 일으키면 그게 이상하지.”

“뭐 하러 가는데.”

“음…….”

“응?”

주인은 뭔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찡그리더니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떼씹?”

“……떼씹?”

“응. 떼씹.”

자신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양 여사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욕같이 들리기도 하고 또 굉장히 진지한 주인의 표정으로는 아닌 거 같기도 했다.

“그게 뭔데.”

“떼씹을 떼씹이라고 하지 뭐라 그래.”

“보다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해 주면 안 될까? 난 지금 사장님이 사용한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

“영어 쓰는 거 싫어하잖아.”

“간단한 영어는 알아들어. 차라리 영어로 말해 봐.”

“그룹 섹스.”

“…….”

이런 상황이 되면 으레 당황하는 것은 여자 쪽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양 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단지 의문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은 없었다.

“그게 왜 떼씹이야?”

“전에 배변이 그러더라고 ‘이런 씹!’이라고 그래서 씹이 뭐냐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섹스라고 하던데? 개떼 양떼 할 때 떼. 섹스하다의 씹. 떼씹. 이런 말 없어?”

“……없어.”

“양 여사가 순진해서 모르는 거 아니고?”

양 여사는 가만히 책을 덮고 웃었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 없는 미소일 뿐이었는데 그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말이기도 했다. 그룹 섹스라면 그런가 보다 하는데 떼씹이라니까 훨씬 더 적나라하고 저질스럽게 들리는 게 아닌가. 우주인과 딱 어울리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삼봉이를 데려가?”

“성인이고, 남자고. 뭐가 문제야.”

“비빔밥 먹는 게 배 아파서 그런 건 아니고?”

“그것도 있고.”

참 솔직한 우주인이다.

“그럼 이제 그만 문 열어 줘. 저녁 늦게까지 일 시킬 애 더위 먹게 할 참이야?”

“목욕시켜 주면 열어 준다고 했는데 고집 부리잖아.”

“내 눈에는 사장님이 지금 고집 부리고 있어. 배도 다 나았으면서 뭣 하러 목욕을 시켜 달라는 거야.”

“그래도 머슴이니까 내가 하라고 하는 건 해야 할 거 아냐.”

양 여사는 작게 혀를 찼다. 어찌 보면 속에 구렁이가 열두 마리 들어앉은 노인네인데 또 이럴 때 보면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다섯 살배기 어린애다.

“그렇게 삼봉이 다루는 방법을 모르겠어?”

“……?”

“날도 더운데 같이 목욕하고 외출하자고 해. 외출할 일 있는데 예진 씨 데리고 갈 수 없으니까 네가 좀 같이 가 줘야겠다고 하면서.”

“그런다고 목욕시켜 줄까?”

“훗…….”

물론 바지런하고 눈치 빠른데다 착하기까지 한 정삼봉에 대해 나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는 우주인이 자신의 사장이고, 그가 역성을 들어 이득이 있는 쪽이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일 보고 멍하니 있는 애 아니야. 좀 미적거리다 얼추 씻은 거 같으면 등을 밀어줘. 그러고 사장님 씻기 시작하면 사장님 등 밀어준다고 일 벌려 결국 그 일 다 뒤집어쓸 성격인 거 아직도 몰라?”

“…….”

주인은 인상을 썼다. 그녀가 자신보다 정삼봉에 대해 더 잘 알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귀찮은데…….”

“투자하지 않으면 이득을 볼 수 없다고 한 게 사장님이잖아. 투자라고 생각해.”

“……귀찮은데.”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혼자 힘으로 씻어야지.”

더는 양 여사가 관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었다.

구 비서나 배 변호사와 달리 그녀는 언제나 그 어떤 경우에도 우주인의 편이었다. 그런 결정으로 인해 순진한 어린양 정삼봉이 우주인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애초부터 밝힌 바 있다. 또한 정삼봉의 동의도 없이 자신의 후임으로 그를 지목하고 또 그것을 위한 업무 인계로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을 봐서 삼봉은 전적으로 그녀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순진한 어린양께서는 양 여사의 무서움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양 여사는 자신의 검은 속내를 어린양에게 보여 줄 생각이 없으니 삼봉의 불행은 그녀의 인도로 순탄한 길을 통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양 여사에게 조언을 들었다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음흉한 짐승이 정원을 내다보고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무식하고 유치하다고 평가받는 것과는 달리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응용력뿐만 아니라 창의성까지 있는 주인은 삼봉을 향해 옷 한 벌 사줄 테니 씻고 같이 나가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주인이 타고 다니는 차는 검은색의 국산 중형 세단이었다. 양 여사도 지방에 식재료를 사러 간다든가 하는 경우 그 차를 탔기 때문에 그것은 삼봉에게 익숙한 차량이었다.

하지만 삼봉은 이 집에 이런 대형 차고가 있는 줄 알지 못했고, 그곳에 눈이 부신 원색의 외제차가 줄줄이 대져 있는 것은 더 몰랐다.

지붕이 없는 날씬한 녀석은 무려 새빨간 색이기까지 했다. 그것을 운전하라고 했을 때 삼봉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면허를 땄지만 아직 차를 몰아 본 적은 없었다. 경운기나 트랙터라면 몰라도 차는 더군다나 스포츠카는 구경도 못해 본 삼봉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모두 차에 관한 로망이 있다. 새끈하게 잘 빠진 스포츠카를 몰아 보는 경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덤빌 무모한 열정도 아직은 남아 있는 나이가 아닌가. 삼봉이 현실에 찌들어 돈 무서운 것을 잘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지만 마음속의 열정을 온전히 가릴 만큼 노련하지는 않았다.

애매한 얼굴로 이걸 나더러 운전하라는 거냐 물으니 주인의 대답은 단순하고 간결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오토 미션이란다.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날씬한 녀석도, 짝짓기 철의 풍뎅이처럼 반짝거리는 금녹색의 녀석도 몰아보고 싶은 정삼봉이었다. 그렇다고 빨간 녀석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토 미션이라는 말에 조금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뭐 어쨌든 삼봉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운전석에 올랐고, 조수석에 탄 주인은 의자에 앉자마자 팔짱을 끼더니 잠을 청하는 기색이었다.

“워디로 가유?”

“내비게이션에 ‘노는데 3’이라고 있을 거다.”

눈도 뜨지 않고 대답한다. 그냥 봐서도 만만한 가격은 아닌 차인 듯한데 불안함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원래 이 인간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삼봉이었으니 이 상황에서 따지고 덤비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삼봉은 주인의 지시대로 내비게이션에서 ‘노는데 3’이란 곳을 목적지로 지정하여 경로를 설정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떼씹을 하기 위해 가는 여정은 꽤 성가셨다. 주인은 정확히 세 번 차에서 내려 명함을 건네줘야 했고, 삼봉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리는 코딱지의 얼굴을 걱정하는 것은 처음 한 번이었다. 두 번째부터 주인은 대체 얘가 왜 이러나 싶었고, 세 번째가 되었을 때 그는 단정적으로 삼봉이 자신의 돈을 잡아먹기 위해 일부러 이런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스크린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았던 새빨간 스포츠카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던 것이다.

구 비서는 황홀해 할 것이다. 삼봉이 갖다 박은 차는 무려 네 대였고-세 번의 추돌에 왜 네 대의 차가 망가졌는지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도 모두 꽤 가격이 나가는 외제차였으니까 얼마나 좋겠는가. 배 변호사는 불을 뿜으며 화를 낼지 모르지만 지금 국내에 없으니 통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역주행만은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있는 삼봉이 가열 차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목적지의 입구에 차를 세웠을 때 발레 파킹을 위해 주차 요원이 달려 나왔다. 원래 발레 파킹 같은 것은 하는 방문객은 흔하지 않지만 차 꼬라지를 봐서는 운전자가 다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기다려.”

“…….”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을 하고서 삼봉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야! 대답.”

“야?”

“여기서 기다리라고.”

“야.”

“흠…….”

주차 요원에게 키를 건네 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삼봉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주인이 성질 사납게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삼봉은 마냥 주저앉아 울고 싶어졌다.

“저……. 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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