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58)

“…….”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왜 이렇게 고민하는 걸까?”

“있어?”

양 여사는 자애로운 성모님처럼 웃었다. 그 미소가 적어도 주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배 변호사는 양 여사가 말 할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 미소가 자애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성모의 탈을 쓴 루시퍼 엄마다.

“사장님이 삼봉이를 사랑해 주면 되잖아.”

“……?”

“영원히 깨지지 않을 사랑을 해주는 거야. 슬픈 짝사랑이 아니라면 삼봉이 병을 자극하지 않을 거고, 긍정적인 사랑의 힘은 있는 병도 낫게 해준다는데 고작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는 병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거 아니야?”

“내가?”

“삼봉이가 바라는 가장 완벽한 연인이 되어 주는 거야. 삼봉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면 그 절실함만큼 사장님도 투자를 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혹시……. 삼봉이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그 애가 사장님 취향에서 벗어나 있는 거야? 절대로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언제나 정삼봉. 아니, 코딱지는 백만 광년은 자신의 취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외치는 우주인이 아니던가. 배변은 마지막 가냘픈 기대를 안고 우주인을 보았다. 하지만 우주인은 유레카를 외치며 벌떡 일어나 양 여사의 얼굴에 셀 수 없이 많은 입맞춤을 하는 게 아닌가.

“취향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거지! 양 여사. 역시 당신은 내 빛이고 희망이야.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어?”

“그 말은 이제 삼봉이에게나 해.”

저들은 미쳤다.

적어도 배 변호사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들의 악랄한 계획은 보다 디테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배 변호사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고, 그들은 충분히 강했다. 때로 삶은 유약한 진리나 명분보다는 강자의 논리에 서는 일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배 변호사는 영리하게 본능이 시키는 바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호칭을 고치는 게 좋을 거 같아.”

“호칭?”

“사장님은 삼봉이를 부를 때 이름보다는 야! 라든지 코딱지. 하는 말을 더 많이 하잖아. 그거 은근히 듣기 거북하거든?”

“코딱지를 코딱지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

“대체 왜 코딱지라고 부르는 건데. 그 이유나 알자.”

주인은 대놓고 따지는 배변이 더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찮지. 성가시지. 시끄럽지. 꼭 콧속에 마른 코딱지 같은 기분이잖아. 배변은 안 그래?”

“……?”

이 남자…….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정삼봉을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꼭 코딱지처럼 생기기도 했잖아.”

“이유가 뭐든 로맨틱하게 들리지는 않아.”

“로맨틱하게?”

“사랑스럽다는 듯 감미롭게. 호칭이란 건 꽤 중요한 문제라고……. 이 김에 나도 배변이라고 부르지 좀 말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금자도 배변 훈련은 안 하는데 왜 내가 그 많은 이름 두고 배변이라고 불려야 하는 거냐고!”

“배 변호사는 길어.”

“성의가 없는 게 아니고?”

“그것도 없고. 흠……. 로맨틱하게라.”

남자 꼬실 때는 속 뒤집어지게 느끼한 말도 잘만 싸질러 대더니 멍석 깔아 준 마당에서는 꼭 저렇게 빼면서 사람 속을 태운다. 하지만 정삼봉 꼬시기의 일환인 그 호칭 문제에 있어서 배변이나 양 여사가 보탤 아이디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주인이 슬쩍 고개를 쳐들고는 애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옹?”

“……?”

“풋!”

정삼봉의 이름이 삼봉이기는 하다. 친근한 연인들끼리는 이름의 한자만 부르는 일이 많으니 그렇게 불러 ‘봉’이 맞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덜 익은 땡감 씹은 표정을 한 채 목소리만 한껏 기름기를 넣어 ‘보옹?’ 하는 것은 배 변호사의 귀에도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주인은 마구 머리통을 긁어 대면서 성질을 부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우주인의 인내심이나 참을성 같은 것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아 몰라 몰라! 로맨틱은 무슨 개뿔 얼어 죽을……. 난 잘났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해.”

“정말 충분할까?”

“얼굴 잘났지. 돈 잘 벌지. 밤일 잘하지. 그거 이상 바라면 도둑놈이야. 됐어. 오케이. 작전 회의 끝! 구 비서 들어오라고 해. 지금쯤 결재 안 해준다고 오리주둥이가 되어 있을 거야.”

우주인이 변하는 것보다는 배 변호사가 도박 끊는 것이 빠르지 싶었다.

그가 아무리 정삼봉을 꼬여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본질적으로 개초딩이고 유치하고 무식한데다 뒤끝까지 심하게 있어 주시는 우주인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주인은 끝까지 헐벗은 모습으로 버텼다. 그것은 마치 ‘니가 목욕시켜 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 혹은 ‘팬티가 없어서 옷을 입을 수가 없잖아!’로 보였다.

들고 온 서류 더미에 비해 구 비서의 용건은 그리 많지 않았고, 차예진 씨는 어차피 한 번 자리를 잡고 앉은 이상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형편이었다.

결국 마치 시즌 때와 같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각자 할 일을 하면서 한여름의 정오를 살짝 비켜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만간 건강검진을 할 테니까 몸들 가꿔 놔.”

“건강검진이요?”

구 비서는 바빠 죽겠는데 그런데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매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대들었다. 그런다고 외눈 하나 꿈쩍할 주인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구박의 손길은 배 변호사에게서 날아왔다.

“근로 기준법상 5인 이상의 사업장은 연 1회 건강검진을 실시해야 해.”

“언제부터 그런 걸 지켰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저 바쁩니다.”

“작년까지는 4인이었잖아. 지금은 삼봉이까지 5인이 되었으니까 법대로 해야지.”

“법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사설 카지노 도박장에서 월급 다 날리고 오겠습니다?”

“안 걸리면 장땡이지.”

팬티들을 죄 끌어 모아 다시 빨아서 널고 온 삼봉은 거실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노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사지 육신 멀쩡해서 한참 일할 나이에 사람들이 덥다는 핑계로 밖에도 나가지 않고 노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의 처신도 결코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우주인은 삼봉의 급여를 꼬박꼬박 지불해 주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도 욕실 타일 사이사이에 시커멓게 곰팡이 때가 끼어도 그것에 관해 일언반구 잔소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사님도 넋을 반쯤 빼놓고 다니는 삼봉에게 주의를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을 마음은 콩밭에 두고 몸만 너울너울 이 집에 있었던 결과가 오늘의 팬티 벼락이었던 것이다. 충분히 벼락 맞을 만한 일이고, 반성해야 하는 행실이었다.

머릿속이 쥐불 놓은 벌판처럼 타들어 가도 일하는 것과 개인적인 고민은 따로 두고 생각해야 한다. 고민의 대상이 고용주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계단을 치우는 것은 아무래도 잠시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삼봉은 거실에 눌어붙어 있는 사람의 숫자대로 차가운 오미자차를 준비했다. 지하실로 가서 곶감과 얼려 놓은 홍시도 꺼내 왔다. 전자레인지에 냉동되어 있던 찰떡을 돌려 녹이는 것으로 간단한 다과상은 금세 차릴 수가 있었다.

“차들 드셔유. 점심 먹고 얼마 안 지났지만서두 그냥들 계시기 심심하시지유?”

“어! 정 마담. 제정신이 돌아온 거야?”

배 변호사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 앉자 그것을 필두로 모두가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테이블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 은근히 먹을 거 주는 것에 약하다. 부리는 사람들도 결국 흉보면서 고용주를 닮는다는데 이런 면은 그 말을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증거였다.

“변호사 선상님도 참……. 지가 언제 정신을 놓기라도 했남유? 뭔 그런 말씀을 하셔유.”

“좀 아까 네 입으로 그랬잖아. 실성한 거 같다고.”

쫄깃쫄깃한 곶감부터 냉큼 한입 베어 문 배 변호사가 웅얼거리며 말하는 것에 삼봉은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욱해서 떠들어댈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남부끄러운 소리를 이 사람들 다 듣고 있는 데서 외쳤다는 자각이 들자 새삼 부끄러워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되었던 것이다.

“……건 지 문제구유. 일은 지대로 해야지유. 쥔 아자씨 말이 맞구먼유. 할 일은 해야 하는 거여유.”

“그게 정답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아.”

“아녀유. 사람 도리가 그게 아니지유. 아! 말 나온 김에 아자씨. 시방 빤쭈 널어 놨으니께 낼부텀은 풀 먹인 빤쭈 입으실 수 있으실 거에유. 목간은 좀 있다 시켜 드릴께유. 괜찮지유?”

“어디 가.”

사람들 앞으로 찻잔을 다 돌린 삼봉이 쟁반을 들고 일어서자 냉큼 주인이 예의 그 시비 거는 말투로 말했다.

“계단참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구먼유. 일단 거기부터 좀 치워야겄시유.”

“왜 니 몫은 없는데.”

삼봉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저 몹쓸 성질 머리.

“야?”

“왜 찻잔이 다섯 개뿐이냐고. 니 꺼는.”

삼봉은 기운 없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동안 실컷 께으름 부렸으니께 시방부터는 열심히 일 해야지유. 청소하러 가야 혀유.”

“누구 맘대로.”

“야?”

“니 차도 가져와서 앉아. 다 놀 때 혼자 일하면 누가 상주냐?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는 거야. 분위기 깨지 말고 너도 앉아 놀아!”

내용은 참으로 다정한데 들리기는 멱살 잡고 한판 하자는 말고 들리니 그것도 참으로 문제였다.

삼봉은 마음을 고백한 지 대체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주인의 얼굴을 심란하게 바라보다 말없이 주방으로 가 제 몫의 차를 만들어 내왔다. 그러지 않으면 또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 하면서 고집 부리고 난리 피울 게 뻔하니까 그냥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인의 얼굴을 보는 일이 쉽지 않은 삼봉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은근히 안 그런 척하면서 삼봉이 생각 많이 하는 걸?”

“야? 누가유?”

“누구긴 누구겠어. 사장님이지.”

별거 아닌 놀림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증상이다. 놀란 고양이 눈처럼 커다래지는 삼봉의 눈을 보면서 배 변호사는 양껏 재미있는 이 놀림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우리 정 마담 피곤할까 봐 일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변호사 선상님. 뭔 말씀을 혀도……. 그런 거 아니여유.”

“긴지 안 긴지는 사장님만 아시겠지.”

“월래? 그런 거 아니래두유? 아 아라씨유. 지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먼유. 지가 실수했시유. 다들 아까 일은 맘에 두지 마셔유. 그냥 날이 더워서 저게 살짝 맛이 간 모양이다. 고로코롬 생각하심 되는구먼유. 달리 신경 쓰지도 마시구유. 걍 이자삐리시면 고맙겠구먼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는 삼봉의 얼굴이 너무 안 돼 보여서 배 변호사는 살짝 마음이 아파졌다. 혼자 실컷 고민하던 문제가 얼결에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그걸 무마하기 위해 한껏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농담처럼 장난처럼 그렇게 넘겨 버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저 얼굴에 저 눈에 확연한데 그래도 애를 써서 그리 넘겨 버리려는 노력이 안쓰러워 악인이 되어야 하는 배변은 속이 쓰라렸다.

“연애해 본 적 있어 배변?”

“응?”

제법 어색한 공기가 배 변호사와 삼봉이 사이를 얼어붙게 만드는 와중으로 주인의 심드렁한 음성이 툭 끼어들었다.

“여기 연애해 본 적 있는 사람?”

“……?”

“양 여사. 중매결혼 했지? 불타는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아.”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 위에 달랑 올라가 앉아 쪼그리는 주인의 얼굴에는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배변은? 냄새 나는 노총각이지. 연애는 카드하고나 해봤을 거야.”

“엥?”

“구 비서. 음……. 어떤 미친 여자가 저런 변태를 좋아하겠어. 연애는커녕 친구도 없을걸?”

“그래도 전 제 인생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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