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58)

난데없이 웬 연애 경험 타령인가 싶어 먼저 격침당한 세 사람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저렇게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인간적으로 하자 많은 인생이라는 사실에 관해 스스로는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차예진 씨? 연애해 볼 생각도 없지?”

“없습니다.”

“흥!”

주인은 맹렬하게 콧방귀를 뀌고는 인생의 패배자들을 얄궂게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너무도 확연하게 비아냥거림이 느껴지는 시선이었지만 그들 모두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주인이 하는 말에 반박할 만한 빌미가 없었다.

“도대체 댁들한테 얘를 놀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무도 정색을 한 비난이라 모두가 깜짝 놀랐다. 조금 전 배변이 은근히 그가 삼봉의 편을 들어준다 놀리기는 했지만 이건 은근히 수준이 아니라 아주 대놓고 편을 들어주는 행태라 기가 막혔던 것이다.

“코딱지는 적어도 솔직해. 나처럼 멋진 남자한테 반하는 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그런데 댁들은 멋진 거 좋은 것에 좋다는 감정을 가지는 거 갖고 질 나쁘게 농담할 마음밖에 들지 않는 거야? 그건 얘가 경솔하거나 가벼운 게 아니라 그런 마음조차도 갖지 못하는 댁들이 자괴감을 가질 문제 아니야?”

“저 자뻑 개초딩.”

이제 구 비서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이 ‘빌어먹을 개초딩’이 아니라 ‘자뻑 개초딩’으로 진화했다.

“이제 아무도 그 일로는 코딱지 놀리지 마. 그건 나하고 코딱지 사이의 문제지 댁들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니까. 알아들어?”

저 무식하고 상식 없고 유치한 우주인의 입에서 이처럼 경우 바른말이 나올 줄은 아무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어느 한구석 트집 잡을 곳이 없는 명백한 논리였다. 비록 그것이 다소 짐승스러워 문제지만 말이다. 모두가 납득한 표정을 짓자 주인은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삼봉을 바라보았다.

“나 잘했지?”

“……야?”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그러니까 이제 목욕하러 가자.”

“허……. 허허…….”

“어이! 코딱지. 내가 너 편들어 줬잖아. 그러니까 목욕시켜 달라고!”

삼봉의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한숨만큼이나 남은 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암담했다.

우주인 저게 잠깐 제정신으로 돌아와 제법 사람 같은 말을 한다 싶었더니 금세 원위치 눈 깜빡할 사이 제자리였던 것이다.

“목욕시켜 줘. ……때도 밀어주고. 온몸이 근질거려 돌아 버리겠어.”

“……야.”

“후후후후. 넌 인마 적금 탄 거야. 나랑 같이 목욕하고 싶어 줄 선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야. 야. 알겄구먼유. 다 알아들었으니께 그만 허지유?”

저런 인간에게 반한 자신이 찢어 죽이고픈 정삼봉이지만 마음은 그리 쉽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겠는가. 고래로 반한 놈이 죄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우적대며 욕실로 걸어가는 삼봉의 뒤를 신이 난 우주인이 졸졸 따라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폭 담그고 앉아 좋다고 노래 부르는 우주인은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솔직히 저놈에 주둥이만 놀리지 않으면 망할 놈에 화보 인생이라고 배 변호사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삼봉은 기분이 한껏 좋아 보이는 주인을 보는 것이 괴롭고 쓰라렸다.

어째서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대체 이 마음은 어디서 시작되어 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당장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 좋아하는 마음도 밝힌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어린애 씻기듯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일이 결코 마음 편할 리는 없었다.

뽀얗게 허공으로 흩어지는 수증기 속에서 한참 신나게 놀던 주인은 삼봉이 때수건을 들고 자신의 팔을 잡자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날 왜 좋아하는데?”

“……야?”

“너 말이야. 날 왜 좋아하냐고.”

말갛게 물에 씻겨 석고상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미간이 제법 진지했다. 사실 마음으로는 그거 다 거짓말이었다고, 실없는 농담이었다고 부정하고픈 삼봉이었지만 그런 얼굴을 마주 한 채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지.

“모르겄는디유?”

“몰라?”

“모르겄시유.”

“흠…….”

몸이 가려워 죽을 지경이라고 한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잘 불린 팔뚝에서는 굵은 국수 가락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러…….”

“씨…….”

“이게 안 드러유? 아주 드러 죽겄구만. 대체 뭔 놈에 때가 일케 많대유?”

“나도 몰라!”

“으미! 까마귀가 성님 하겄네. 살성도 뽀얀 냥반이 뭔 놈에 시커먼 때가 끝도 없이 나온대유?”

“한 달이나 안 씻겨 줬잖아. 네 말대로라면 일주일에 한 번은 밀어야 한다면서!”

“아주 지를 잡아 묵어유. 잡아 묵어.”

“그건 좀 있다 할 거야.”

“야?”

삼봉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짙은 회색의 국수 가락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주인은 다시금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대체 내가 얼마나 좋은데.”

“그 야그는 인쟈 안 하면 좋겄는디…….”

“해 봐. 나도 알아야 할 거 같으니까.”

“모르겄시유. 아주 신경 쓰여 죽겄시유. 물가에 내 논 애 가터서 조마조마하고 거슬리고 걱정되고……. 아자씨가 뚱해서 기죽어 있으면 속상하고. 넘들이 아자씨 속마음 몰라주고 막 욕하면 화나고. 그런다고 지가 아자씨 그 지랄 맞은 성격을 어찌해 줄 수 있는 건 아닌디 갑갑하고…….”

한참 두서없는 말을 쏟아 내던 삼봉이 정색을 하고 주인을 노려보았다. 다소간의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열정이 담뿍 뒤섞여 본인에게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감정이겠지만 주인은 비교적 냉정하게 그것들을 가늠했다.

“아자씨는 참말로 요상한 사람이구먼유. 만날 억지 쓰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사람 복장 뒤집히게 하는데……. 그런데도 지는 아자씨 생각만 하면 왜 이런지 모르겄구먼유.”

“비슷하네.”

“야?”

“코딱지. 너랑 비슷하다고.”

“……?”

요령껏. 혹은 지금 성질이 나는 대로 북북 주인의 팔뚝을 다 민 삼봉이 탁탁 손을 치자 자동으로 주인의 다른 쪽 팔이 삼봉의 앞으로 내밀어 졌다.

“귀찮고 짜증나고 성가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이는데 이걸 확 파낼 수는 없고.”

“그게 뭔 말이래유?”

“내가 널 왜 코딱지라고 부르는지 알아?”

“아! 그거 쫌 그만 혀유. 아자씨 콧구녕에 지만한 코딱지가 들어 있음 코 터져유.”

“콧속에 마른 코딱지가 들어 있으면 딱 그런 기분이잖아. 귀찮고 짜증나고 성가시고. 그런데 손가락 집어넣어 파내려고 하면 안으로 기어들어 가 버리거든. 니가 꼭 그래.”

“야?”

당황한 삼봉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은 비단 수증기 가득 찬 더운 욕실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만약 말이야.”

“……?”

“누가 널 해치거나 죽인다고 해도 난 동화 속에 왕자님처럼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해 널 구해 주고 그런 건 못해. 아니, 안 해!”

“뭔 소릴 하시는 거에유?”

주인은 삼봉의 의아함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려는 것. 비록 그것이 상대로 하여금 ‘이 인간이 무슨 소릴 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엉뚱한 예제라고 해도 말이다.

“대신 약속할 수 있는 건 복수해 주겠다는 거다.”

“아자씨……?”

‘혹시 또 실성했시유?’라고 묻고 싶었지만 삼봉은 주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니 앞에 역경은 니가 해결하고,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 하지만 적어도 나와 연애하는 사람을 해치려는 누군가가 있으면 난 반드시 복수는 해 줄 테니까 거기까지가 내 애정 표현이라고 만족할 수 있으면 좋아. 나랑 사귈래?”

“엉?”

별생각 없이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주인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삼봉의 입장에서 지금 주인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코딱지만한 게……. 무려 이 내가 널 좋아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대답이 뭐 그래! 디질래?”

“어엉?”

“사귀자고. 너랑 나. 지금부터 한 번 제대로 연애라는 걸 좀 해보자고.”

“어어엉?”

주인은 미처 정삼봉이 패닉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열심히 설명했다.

“너도 나한테는 코딱지. 이야기 들어보니 너한테도 나는 코딱지니까. 어쩔 수 없잖아. 사귀자고 사귀자니까? 니가 바란 것도 그거잖아. 사귀자고!”

“어…….”

“어이! 야! 야!------.”

주인은 민첩하게 일어나 뒤로 넘어가는 삼봉을 받아 안아야 했다.

지금껏 사귄 사람은 몇 되지만 사귀자는 주인의 말에 기절을 해 버린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인마! 넌 지금 기뻐서 삼바 춤을 춰야 하는 거라고! 기절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절규하는 욕실의 비명이 너무 컸는지 배 변호사와 구 비서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삼봉이 눈을 뜨자마자 우주인은 당장에라도 정삼봉의 멱살을 잡아 흔들겠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걸 말리느라 구 비서와 배 변호사는 혼이 쑥 빠질 정도였다. 미친놈이 원래 힘세다고 어찌나 힘이 장사인지 양팔에 건장한 사내 둘을 매달고도 아주 펄펄 난다.

“야. 이 새끼. 너 그게 무슨 태도야. 내가……. 무려 이 우주인님이 사귀어 주겠다는데 기절하다니. 그게 무슨 태도냐고!----.”

아주 발광을 하세요.

배 변호사와 구 비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실하게 한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서글퍼졌다.

기절했다 깨어나자마자 날벼락도 유분수지 삼봉도 눈만 끔뻑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너 오늘 내 손에 디질 줄 알아. 엉!”

“참말이어유?”

“난 거짓말 안 하거든? 나 오늘 기분 나빠서라도 널 아주 요절내고 만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이거 안 놔?”

“진짜로……. 진짜로 참말이어유?”

“야. 너 지금 사람 갖고 놀려?”

삼봉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것만 봐도 지난 한 달 동안 애가 얼마나 속을 볶아치며 마음고생을 했는지 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구 비서도 배 변호사도 왠지 마음이 짠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은 우주인뿐이었다.

“너 오늘 초상 치를 줄 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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