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58)

“…….”

장난이나 허세로 하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처럼 기세등등했던, 심지어 정삼봉 본인조차도 성질 머리 개차반이라고 욕했던 정이봉 씨가 더 이상 군소리 없이 콩잎을 따기 시작한 것을 보면 말이다. 주인은 별만 심정 상한 표시를 내고 있지 않는 삼봉이 이번엔 자신을 보자 미간을 찡그렸다.

“우짠 일로 오셨시유? 심심혀유?”

“……응.”

“금 아자씨도 콩잎이나 따유.”

“싫어.”

“싫으면 가서 놀아유.”

“싫어.”

“우짜라구유.”

“너 바보냐? 내가 남들 놀 때는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하라고 했지. 구 비서야 원래 변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남들 다 노는데 넌 왜 일해.”

“억지 쓰지 말고 가서 놀아유.”

“하……. 야!”

말없이 콩잎을 따는 정이봉은 삼봉과 주인의 가운데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삼봉과 주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사냥감을 노리는 맹금류처럼 예리한 시선이 번들거리며 두 사람을 살폈다.

“콩잎은 니 형더러 따라고 해.”

“뭔 소리래유?”

“넌 내 고용인이야. 난 내 고용인이 콩잎 따는 걸 원하지 않아. 돈을 벌고 싶다면 네가 아니라 네 형이 콩잎을 따야지. 안 그래? 넌 저기 개울가에 가서 노는 것도 업무의 일부분이야. 그러니까 잔소리하지 말고 가.”

“뭔 억지를 또 쓰고 그런대유. 어차피 콩잎 따서 갖고 올라갈 꺼잖아유.”

“양 여사가 콩잎 따냐?”

“……?”

“난 내 고용인이 이런 허드렛일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당장 모자 벗고 밭에서 나와.”

어찌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인데 또 어찌 들으면 상당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

정이봉은 너 잘 만났다는 식으로 빙그레 웃었다. 이쪽도 성질 사나운 것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건수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그쪽이 우리 삼봉이 머슴으로 데리고 계신 분입니까?”

“그런데?”

“아무리 내기 내용이 그랬다고는 해도 요즘 세상에 머슴이라는 게 말 안 되는 거 아시죠?”

“왜 말이 안 되는데. 머슴 살러 온 사람이 있고 머슴 부리겠다는 사람 있으면 되는 거지 거기 또 뭐가 필요해.”

단박에 작은형의 기를 죽여 놓은 것으로 일을 무마했다 생각한 삼봉이 이번엔 창백한 낯빛을 했다. 암만 생각해도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이 법전을 달달 외면서 재학 중 사시 패스를 목전에 두고 있는 작은형을 어찌 이기겠는가. 이런 때는 믿음이 가지 않아도 현직 변호사가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콩밭의 소란은 너럭바위까지 들릴 리가 없었다.

“고용계약서가 필요하죠. 근로기준법에 의거…….”

“썼거든?”

“……?”

정이봉이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의기양양한 우주인이 두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주시며 유치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어린애도 따라 하지 않을 모양새로 흔들흔들 어깨춤까지 춘다.

“사람 약 올리십니까?”

“응.”

“……!”

“근로계약서 썼지. 당연히 나는 매년 써. 매년 연봉 협상도 하고 말이야. 시급 3500원으로 연봉 책정했고, 그것과는 별개로 상여금 800% 지급에 숙식 제공. 기타 의복비 문화 생활비 모두 지급하는데 내가 머슴 쓰면 안 된다는 법조항 있으면 지금 따져. 내 변호사 불러오지.”

승기를 몰아 주인은 핸드폰까지 꺼냈다. 이쯤 되면 정이봉이 아무리 따지려 해도 빈틈이 없는 방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만만한 것이 동생이라고 눈을 돌려 삼봉을 노려보았다.

“정말 썼어?”

“안 쓴 걸 썼다고 우기겄서? 울 아자씨가 좀……. 그래도 안 한 일을 혔다고 하진 않어.”

“전화는 왜 안 해! 전화 한 통 없다고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할 말 없으니 괜히 신경질이다. 평소 바늘만큼도 빈틈이 없다 생각한 둘째형이 빤한 억지소리를 하자 삼봉은 울적해 졌다. 하늘처럼 높고 완벽했던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빈틈과 허점이 보이는 것이다. 절대로, 세상이 무너져도 완고하고 무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작은형의 귀여운 모습이 낯설기도 했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아부지가 맘 약해진다고 전화는커녕 일 년 채우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 그랬단 말여.”

“이놈에 영감탱이를 그냥!”

시골집에 내려온 첫날밤에 들은 이야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였다. 이봉에게는 상당 부분 접고 들어가는 아버지와 큰형은 모든 잘못을 삼봉에게 뒤집어씌웠다.

내깃돈에 깔머슴살이 일 년을 내건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지만 삼봉이 말도 없이 상경해 버린 후 연락도 없어 애가 탄다, 그리 말했던 것이다. 어디 내놔도 야무지게 잘 살 놈이란 것은 알아도 막둥이가 그리 집을 나가서 반 년 동안 연락도 없는 것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 모든 사달을 알면서도 자신에게는 일언반구 말 한 마디가 없었던 형과 아버지를 쥐 잡듯이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제법 성을 내며 부아를 내는 양이 요상해서 가만 들어보니 형과 아버지가 한 말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 아닌가. 이 영감탱이들이 작심을 해서 삼봉을 머슴 살러 보낸 것이지 절대로 순순히 그러마 간 것이 아니고, 또 절대로 형과 아버지 몰래 야반도주하듯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으득으득 이를 갈아붙이며 주먹을 움켜쥐는 정이봉은 어째서 식구들이 자기 모르게 이렇게 사고만치는 것인지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내깃돈이라는 것을 노름빚으로 생각한다면 갚을 의무가 없다. 거기에 말도 안 되게 깔머슴 1년이라니 그건 아예 처음부터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조항이었던 것이다. 법률적으로는 깔머슴이라는 단어가 규명되지 않으니 잘 밀어붙이면 내기 빚 자체가 무효화 된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말했으면 문제없이 해결될 일이었다.

정이봉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아버지를 닦달할까 형을 족칠까 생각하는 중에 연락을 받고 득달같이 배 변호사가 달려왔다.

무슨 큰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삼봉이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하나 추가되어 있을 뿐 콩밭은 평화로웠다.

“뭔 일이야. 어디 갔었어. 고기 다 구워졌는데.”

“저기 저 친구하고 코딱지 근로계약 조건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봐. 필요하다면 계약서 사본도 보내 주고.”

“예?”

“내가 돈 한 푼 안주고 애 부려 먹는다는 식으로 말하잖아. 기분 나빠.”

“……?”

그걸로 끝?

배 변호사는 목구멍 끝까지 치미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냥 봐서도 얼핏 봐서도 자세히 봐서도 ‘나 삼봉이 형이요.’ 하는 청년과 우주인이 붙었는데 이 좋은 구경을 놓쳤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우주인의 태도는 상당히 미적지근했다.

기분이 나쁘면 동네가 떠나갈 듯 소란을 피우고도 남았을 위인이 그냥 기분 나쁘다며 변호사 불러 처리하라고 하다니……. 역시 정삼봉의 위력은 그 정도였던 것일까? 싶었던 것이다.

“야 코딱지! 밥 먹으러 가자.”

“먼저 가시면 안 돼유? 지는 콩잎 마저 따고…….”

“길 몰라.”

“야?”

“길 모른다고! 앞장서.”

“어우…….”

아까부터 폴폴 풍기는 고기 냄새만 맡고 가도 너럭바위 있는 곳까지는 쉽사리 찾을 수 있을 듯한데 주인은 강짜를 부리듯 우겨댔다. 삼봉이 어쩌겠는가.

월급 주는 것은 우주인이고, 반한 놈은 정삼봉인데.

등짝이 뜨끈뜨끈함에도 불구하고 삼봉은 작은형 이봉을 남겨 두고 콩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잡아 손.”

“야?”

“자꾸 해야 진도 나가지. 잡아!”

“풋!”

참으로 다정한 남자다.

억지 쓰고 요상한 소리로 사람 속 뒤집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외의 부분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로 사람을 감격하게 만들 때 그는 참으로 다정한 남자였다.

콩밭 주변의 깊은 숲 그늘로 오자마자 대뜸 손을 내미는 주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삼봉은 가만히 그 손을 잡았다.

길을 모른다고 말해 놓고서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걷는데 명치께가 뜨끈뜨끈해져 왔다.

“아!”

“야?”

“손이 아니잖아. 오늘은 끌어안는 거 아니었어?”

“야……?”

“미적거리다 언제 섹스 해. 매일매일 열심히 해야지. 이리와.”

라며 확 사람을 끌어당겨 안는데 삼봉은 눈만 끔뻑거리고 있어야 했다. 커다란 가슴도 좋고, 꽉 끌어안아 당기는 팔의 힘도 행복했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대입 시험 치기 전에 국․영․수 진도 빼듯이 다분히도 계획적이다.

물론, 그런 계획을 제시한 것은 삼봉이었지만 조금의 로맨틱함도 없이 어제는 손잡고 오늘은 껴안고? 그건 아니다 싶어 미간의 주름이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중간 단계 다 건너뛰고 그냥 하면 안 되나?”

“……?”

꼭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 욕망이 이글거리는 주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삼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절차 순서 그거 나중에 하면 되잖아. 응? 좋지? 너 나 좋다면서. 이따 집에 가서 하자. 내가 아주 죽여줄께.”

“…….”

삼봉의 침묵을 긍정의 단서로 알았는지 하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네 주제에 나만큼 잘난 남자와 사귀면서 한 달이나 순서 밟아 기다리라는 거 그거 솔직히 너무 비양심적인 거 아니냐? 나랑 한 번 자 보려고 줄 선 남자들이 한둘인 줄 알아?”

저 비양심적인 면상을 확 후려치고 싶은걸 간신히 눌러 참은 삼봉이 기계처럼 딱딱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싸늘하게 속삭여 줄밖에.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확실히 삼봉은 우주인이란 몹쓸 외계인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이 행운을 좀 더 느긋하게 만끽하고 싶었다. 애가 달아 밑천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혹질을 하는 우주인에게 넘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삼봉의 이름이 운다.

“사귀는 거잖아. 사귀는 주제에 너무 튕기는 거 아냐? 너무 튕기면 나중에 재미없다 너?”

“됐구먼유!”

“뭐야?”

“지는 지금 양껏 재미있구먼유. 분명 아자씨 입으로 아프리카 스타일이라고 했잖여유. 왜 한입을 갖고 두말을 하남유? 됐시유!”

조금만 로맨틱하게 꼬셨으면 집까지 갈 것도 없이 어둑어둑한 숲길에서라도 옷 벗었을 삼봉이었다. 꼭 인간이 방정맞게 입초사를 떨어 김 나가고 맥 빠지게 하는 것이다.

완전히 토라져서 팡팡 땅을 차대며 앞서 걷는 삼봉의 뒤를 기운 빠진 우주인이 뒤따랐다.

“거참 쪼끄만 게 더럽게 까탈스럽네……. 쳇!”

욕구불만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삼봉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아프리카 스타일이 지극히 인도적이고 로맨틱하다는 것뿐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주인에게 그런 섹스 스타일을 가르친 사람은 날개가 없을 뿐 천사임이 분명했다.

단체 건강검진을 핑계 삼은 삼봉의 검사가 무사히 끝났다. 폭스 마이어 재단에서는 별반 기다릴 것도 없이 연락이 왔고, 재단에 등록하여 지속적인 관리를 받으라는 권유 또한 그 통보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배 변호사는 물론이고 양 여사 역시 꽤나 충격을 받았지만 우주인만은 그런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시종일관 삼봉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삼봉을 골리고, 억지 쓰고, 때로는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팩팩 거리면서 성질을 부리다가도 손을 잡거나 말없이 슬쩍 껴안아 주면 삼봉은 또 화난 걸 마냥 잊어버리고 좋아라,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주인에게 변화는 손톱 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봉은 지나치게 친절해진 배 변호사나 양 여사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배 변호사는 우주인의 아가리 속으로 홀랑 기어들어 간 네가 가엾어서라고 핑계 대었고, 양 여사는 이제 앞으로 네가 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할 것이니 지는 해는 권세 부리기 뭣하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삼봉은 길가다 자빠져 다리가 부러져서도 안 된다. 교통사고가 나도 안 되고, 크게 화상을 입어서도 안 된다. 사실 그것뿐이었다. 메디컬 케어가 필요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삼봉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배 변호사와 양 여사에게 그런 삼봉을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우주인 말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예감이었다. 지금까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골질하고 억지 부리고 큰소리치는가 하면 가끔 사람 기막혀 돌아가실 정도로 부앗장을 뒤집어 주기도 하는 우주인이 아니라면 언젠가 삼봉도 제 병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오직 개초딩 우주인이기 때문에 그런 큰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앞에서도 저만치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태연함이 삼봉에게는 가장 이롭다는 것. 배 변호사는 그의 팔자가 참 기구하다고 느꼈다.

다 좋다. 요즘 세상에 게이 테러 같은 것을 하는 놈이 더 병신 같으니까 게이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태어났다면 타인이 간섭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반한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우주인일까. 번드레한 얼굴 말고는 볼 것이 없는 유아독존 개초딩의 어디가 정삼봉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꼬아 보고 뒤집어 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 변호사에게 삼봉은 기구한 팔자를 가진 가엾은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삼봉에게 더 잘해 주겠다 날마다 다짐했다.

“뭐라?”

“못 들었어? 종신 계약.”

“종신……계약?”

벌거벗고 자빠져서 하는 말이 안드로메다 사투리 수준이다.

배 변호사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목구멍까지 꽉꽉 틀어 막히는 저 황당함에 아연실색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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