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내 밥 만들어 줄 사람인데 그만한 보험 없이 양 여사 나갈 때까지 손 빨면서 기다려?”
“종신 계약이 뭔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냐?”
“종신 계약이 종신 계약이지 달리 뭐 있어?”
“에라이 헛똑똑이야. 삼봉이가 잘도 거기다 사인하겠다.”
“당연히 지금은 하지.”
“근거 없는 그 자만심은 어디서 비롯된 거냐.”
주인은 패 죽이고 싶을 만큼 밉살맞게 웃었다.
“잘난 내 얼굴.”
“뭐?”
“지금 나한테 푹 빠져 있잖아. 저 나이 때는 사랑이 세상 전부라고 믿어. 그러니 종신 계약하자고 하면 얼씨구나 옳다구나 아니야? 지금 아니면 못 받아. 서둘러.”
“헉!”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사랑이 세상의 전부인 줄로만 안다. 그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랑에 전부를 던져 버리는 어리석은 일도 망설이는 법이 없다. 주인은 그 점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 변호사는 나서서 그 일을 말릴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쪽은 주인이 놓아주기 전에는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너 정말 나쁜 놈인 거 알고 있냐?”
이번엔 가벼운 질타가 아니라 정색을 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그따위에 주눅 들 인간이었다면 저런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나 좋다는 녀석 좋아해 주겠다는 게 나쁜 놈이야? 아니면 날 좋아하는 녀석하고 애인까지 하겠다는 게 나빠? 그것도 아니면 아픈 놈 뒤 봐 주느라 이놈 저놈 입 틀어막고 조용히 시켜서? 그놈이 평생 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날 좋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거? 내가 뭐가 나쁜데?”
말로는 모든 것이 선함에서 비롯된 행동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에 진심이 없다는 것. 타인의 감정을 제 잇속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마음마저 편리한 대로 움직이는 그 오만이 끔찍할 만큼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배 변호사는 지금 내려진 주인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주인이 악마보다 간교하고 괴물처럼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넌……!”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 내가 아는 배변은 훨씬 영리한 사람이잖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앞에 이익만 생각해. 남을 배려하는 건 그다음 문제라고. 변호사는 얼마든지 있어. 갈아치우는 건 문제도 아니야.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겠지?”
그것은 굴레였다. 그가 벗어난 것과는 달리 조금도 의식되지 않고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지만 평생 결코 어떤 방법으로도 달아날 수 없는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 함정으로 걸어 들어 간 것은 배 변호사 자신이었다. 양 여사나 차예진 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배 변호사도 달콤하고 안락하지만 위험한 덫으로 제 발을 밀어 넣은 것이었다.
배 변호사가 우주인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면 그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배 변호사를 제거할 것이다. 그게 우주인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설득해 볼게.”
“그래야지. 배변은 유능하니까 일주일 내로 서명된 계약서를 받아올 거라고 믿어.”
“…….”
배변은 지독히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정삼봉 따위 나락으로 밀어 떨어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약하게 흔들리는 양심 같은 것은 도박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아무에게도 박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앞에서 허망하게 스러졌다.
주인은 오후에 외출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말은 그 외출에 삼봉도 동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전에 놀러 갔던 그곳이란다.
아주 잠시였지만 삼봉은 이 인간을 확 죽여 버릴까 고민했었다. 사람 황당하게 만들던 광경이 생각났고, 어이없이 당한 봉변도 떠올랐다. 그런 데를 또 가겠다는 것으로 모자라 함께 가자니 이게 과연 사람 맞을까 심각하게 계산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인두겁은 쓰고 있는데 사람이 아니면 이쯤에서 고이 접어 마음속에 추억으로 남겨 두고 보내는 것이 인류 평화를 위해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대번에 흉흉하게 변한 삼봉의 표정을 보며 ‘왜?’ 하고 묻는 주둥이를 콱 쥐어박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았다. 일단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들어보고 난 후에 구세의 영웅이 될지 사랑에 빠진 남자로 남을지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그를 지더러 또 가자는 말씀이셔유?”
“응.”
“놀러 가는 건감유?”
“아니. 개 돼지처럼 놀지 말라며. 오늘은 경제인 회합.”
“경제……. 뭐유?”
“경제인 회합자리라고. 돈 많은 양반들 모여서 인사하고 수다 좀 떨다가 술 마시면서 어떤 놈을 망하게 할까 어떤 놈한테 돈 빌려줄까 여기 길을 놓을까 저기 다리를 놓을까 그런 거 이야기하는 자리.”
“그런 데를 아자씨가 왜 간대유?”
삼봉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주인은 기가 막혔다.
나름 재계에서는 알아주는 큰손이 아니던가. 아니 큰손이라기보다는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중이었다. 우주인 본인은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것이 별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큰돈 굴리는 양반들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길 없는 주인을 총애하는 이유가 그 마이더스의 손 때문이니 싫다고 체머리를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 가기는. 오라고 하니 가는 거지.”
“그니까 왜 그런 자리에 초대를 받느냐구유.”
주인의 대답도 정답이고, 삼봉의 의문도 합당했다.
주인도 사실 그런 자리에 자신이 왜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어르신들이 부르니 나이 어린 사람으로서 마냥 거절하기 힘들어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참석하는데 갈 때마다 소개받는 사람은 왜 그리 많고 친한 척하는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생각만 해도 두통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노친네들이 부랴부랴 전화를 해 ‘꼭 와라.’ ‘안 오면 섭하다.’ ‘다른 약속 잡지 말어라.’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니 어쩔 수가 없다.
“아. 몰라! 귀찮아. 너 안 가면 나도 안 가.”
또 나왔다. 우주인 표 떼쓰기. 삼봉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심란해져서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못 말리는 보모 기질 때문이었다.
분명 주인은 삼봉보다 한참이나 연상인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체격이든 체력이든 삼봉만하지 못한 구석은 눈 씻고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봉은 언제나 주인이 안타깝고 그를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았다. 안타깝고 쓰라려서 소금물에 드리워진 상처 같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완전 삐쳐서 잔디밭을 뒹굴 구른 주인이 뽀얀 등짝을 볕 아래 내놓는데 역시 지는 것은 먼저 반한 놈일 수밖에 없었다.
“안 가면 안 되는 거 아녀유?”
“안 되지.”
“…….”
“영감탱이들 속이 좁아서 꼭 오랬는데 안 가면 심하게 삐지거든.”
설마 지금 당신만 할까.
“……근데 참말로 저번처럼 놀지 않는 게 확실혀유?”
속마음으로야 울끈불끈 치솟는 것이 마그마 같아도 삼봉은 이번 한 번만 더 봐주자 싶었다. 설마 지난번에 그 난리를 펴놓고 또 그러고 놀까 싶었던 것이다.
“개 돼지처럼 놀지 말라며.”
“야?”
“니가 놀지 말라며.”
어이없는 삼봉과는 달리 다시 뒹굴 몸을 뒤집은 주인이 미간을 찡그린 채 물어 왔다. 강렬한 태양 때문에 저절로 찡그려진 얼굴이지만 그 역시도 화보다.
“뭔……. 소리래유?”
“니가 개 돼지처럼 놀지 말라며! 안개 안돼지 같이 노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개 돼지처럼은 놀지 말라며. 그런데 또 그렇게 노는 데로 널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냐? 너 바보냐? 아니 내가 바보로 보이냐?”
“야.”
“이게!”
이번에는 주인이 제대로 알아듣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삼봉은 충분하고 남을 만큼 우주인이 바보라고 생각했고, 무식하며 상식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또 그런 황당한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고도 남을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근디 지는 왜 델꾸 갈라 그러는 거래유?”
“거참……. 너 진짜 머리 나쁘지?”
“……?”
우주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그런다고 해도 삼봉은 제 궁금한 것이 더 중요했으니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니가 저질러 놓은 사고는 니가 수습을 해야지. 너 전에 클럽에서 깽판 치는 바람에 난 쪽팔려서 이제 클럽에도 못 가잖아! 너 벼르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가서 니가 해결해 놓으라고!”
“그런 건 아자씨가 해결 해야지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니 문제는 니 문제. 내 문제는 내 문제라고.”
“쪽팔려서 클럽에 못 가는 게 왜 지 문제여유? 아자씨 문제지. 그라고 지는 아자씨가 계속 쪽팔려서 그런데 안 갔으면 좋겠구먼유. 아자씨 문제는 아자씨가 해결해유.”
“윽!”
주인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치명적인 반격에 상처 입었다는 표현을 하는 것 자체가 실제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삼봉은 죽었다 깨나도 알지 못하겠지만 우주인이란 작자는 원래 태생이 음흉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어이. 코딱지.”
“왜유?”
“같이 가자.”
“혼자 가라니께유.”
“같이 가자.”
“아! 지가 왜 거길 가유. 혼자 가셔유.”
“애인이잖아.”
“……!”
이번에는 삼봉이 제대로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그런데 우주인이 그렇게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심리적인 타격이 제법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귄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우주인의 고백 같은 것은 절반쯤 믿을 수 있고 나머지 절반쯤은 긴가민가 하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 사람이 대놓고 애인이니까 함께 가자고 청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의 남자는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자고 해도 연인이 그리하자면 기꺼이 그 길을 나서는 것이 인지상정.
“파트너 동반 모임이란 말이야. 같이 가자.”
사악한 미소. 하지만 그것은 뱀의 유혹처럼 거절하기 힘든 달콤함이었다.
어느새 삼봉의 어깨를 감아 오는 팔이 은근슬쩍 그를 끌어당겼다. 볕 내음을 가득 안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삼봉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마침내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냉큼 삼봉의 입술을 훔치자 더 이상은 버틸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삼봉은 깔끔하게 백기를 흔들었다.
“……언제 출발혀유?”
“같이 가는 거지?”
“…….”
“이따 한 여섯 시쯤.”
“하아…….”
“갈 거지?”
거듭해서 부드러운 입술이 질척임 없이 몇 번이고 삼봉의 입술에 와 닿았다. 더는 못 버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남자의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지는 그런데 입고 갈 옷도 없구먼유.”
“아무거나 입어.”
“그랴도 아자씨 체면이 있는디…….”
“내 체면은 내 문제야.”
“참말. 청바지에 티 쪼가리 입고 가도 낭중에 딴소리 혀면 안 돼유.”
“코딱지는 코딱지처럼 입고 코딱지처럼 행동하면 돼. 그건 코딱지 문제니까. 오케이?”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참말로 연구 대상이구먼유. 몰러유. 워째뜬 아자씨가 암케나 입어도 된다고 혔시유! 낭중에 딴소리 허면 뒤로 일주일이구먼유.”
뒤로 일주일이라는 말은 요즘에 와서 우주인이 차근차근 밟고 있는 연애의 순서를 일컫는 말이었다. 질색하는 그 말에 주인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치사해서도 안 한다. 안 해!”
“……에휴.”
“……?”
“내가 미쳤지. 내가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겨. 내가 워쩌자고 저런 사람한테 홀딱 넘어가서 신세 조지는 길로 꾸역꾸역 가는지 나도 연구 대상이구먼. 참말로 요상한 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