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58)

혼잣말처럼 구시렁구시렁 읊어 대면서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삼봉의 뒤로는 이제 아주 외워 버린 우주인의 외침이 뒤따랐다.

자기처럼 잘난 남자한테 반하지 않는 게 연구 대상이라면서 이렇게 잘난 사람하고 연애할 기회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라고도 하고 또 아무리 생각해도 자긴 너무 잘났다나 어쨌다나.

삼봉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주인이 장담한 것과 같이 같은 건물에 같은 층 그리고 같은 홀임에도 불구하고 실내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은연중에 걱정하고 있던 삼봉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의 점잖은 모습과 군데군데 보이는 여성들의 품위 있는 옷차림에서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주인은 그것을 가증스러운 가식이라고 폄훼했지만 삼봉의 눈에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그리고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말이다.”

“야?”

“니가 저번에 깽판 치고 나간 뒤에 여기 클럽 종업원들이 들고 다니는 쟁반을 목재로 바꿨어.”

“……?”

“그런 걸로 사람을 패 봤자 잘 쪼개지기만 하고 별 타격도 없거든? 사람 패려면 저기 바 있지? 바에서 술병을 낚아채서 그걸로 머리를 까 버려.”

그날 주인은 내도록 삼봉의 행태를 보고 있었다. 혹시나 의심했는데 그 의심이 역시나로 들어맞자 삼봉은 아주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래 놓고 사귀기는 뭘 사귄단 말인가. 지금 삼봉이 바로 걸어가 술병을 집어 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우주인의 머리를 까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주인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가당찮게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머리를 뽀개 놓으란 말이다. 알았지?”

“재미있시유?”

“응. 너 보기보다 싸움 잘하던데? 그냥 막 굴려도 맞고 들어오지는 않을 거 같더라구.”

홀의 입구에 서서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와중에도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우주인이었다.

“지가 고등핵교 졸업하면서 짝은성이랑 한 약속이 있구먼유.”

“응?”

“인쟈 사고 치면 교무실이 아니라 경찰서로 끌려가니께 짝은성 앞길 망치는 짓을 할 바에야 농약 묵고 디지겠다고 단단히 약조를 했구먼유.”

“……?”

“지가 얼없이 세 대나 세 가믄서 처맞고 있었는 중 아남유? 세 대 먼저 맞으면 그 때부텀 정당방위니께 그런 거구먼유.”

“킥!”

사람 찾는 일보다는 삼봉의 말이 더 재미있는지 우주인이 작게 웃더니 우악스럽게 삼봉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냉큼 그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 버린 삼봉이 얼굴을 붉히면서 마구 발버둥을 치는데도 낄낄대며 웃는 주인은 그를 풀어 줄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정말 반해 버리겠다.”

“야? 아니……. 여튼 이거 놔유! 백주 대낮에 이게 뭔 짓이래유?”

“뭐 어때. 넌 내 애인이고, 오늘 이 자리 내 파트너로 온 거거든? 내가 내 파트너를 좀 껴안아 보겠다는데 누가 뭐래.”

“참말! 정신 나갔시유? 남들이 다 보자녀유!”

“어이. 코딱지.”

“……?”

삼봉이 발광을 하거나 말았거나 얌체 같은 입술이 냉큼 삼봉의 입술을 훔치고 달아났다.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뭔 소리래유?”

“니가 서울역 광장에서 사람을 찔러 죽여도 경찰은커녕 경비 업체 사람도 오지 않게 해줄게.”

“헛소리 그만하고 이것부터 놔유!”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소란스러운 둘에게로 몰리고 그중 몇몇은 삼봉을 알아보았는지 눈에 띄게 미간을 찡그렸다.

“진짜야.”

“아. 씰데없는 소리 관두고 좀 떨어져유. 사람들이 다 보자녀유. 아주 내가 챙피시러 살 수가 없구먼유. 아자씨는 지발 남의 눈 좀 생각하고 살어유. 흐미……. 쪽팔려 고개를 못 들겄네.”

아주 발광을 하는 삼봉의 허리를 아쉬운 듯 놓아주었지만 주인은 대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보았고, 그를 만나고 나면 이 재미없는 자리를 떠날 수가 있는 것이다. 불편하고 불쾌한 만남이 될지도 모르지만 마냥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머슴의 새로운 면모가 그를 대단히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마치 심심해서 걷어차며 놀고 있던 돌멩이가 50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몬드 원석인 것을 알게 된 심정과 비슷했다. 실제로 그가 경험한 것은 30캐럿짜리였지만 그 때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으로 봐서는 50캐럿짜리라고 인심 써도 좋을 정도였던 것이다.

민 씨 혈족의 우두머리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곁에 앉혀 둔 웃방아기인지 애첩인지 모를 여성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하무인 형편무인 지경인 상식으로도 우주인은 그런 어르신들에게 귀여움 꽤나 받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삼봉의 손을 잡고서 민주환이 앉아 있는 자리로 걸어간 주인이 허리를 굽히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 왔습니다.”

“어어. 그래. 주인이 왔는가? 어이쿠. 자네 여름 타는가 보구먼. 얼굴이 영 못쓰게 되었어.”

“아닙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먹고 잘 싸는데요?”

그런데 말하는 꼬라지는 영…….

삼봉의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껄껄껄 웃으며 테이블까지 팡팡 내리치는 노인과는 달리 삼봉은 주인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아프리카에 살다 와서 한국 예의범절 모르는 것이야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지만 딱 봐서도 품위 있고 고상한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런 무식을 티 낼 거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자네는 여전하구먼. 응. 여전해.”

“예?”

“내 잘 아는 한의사가 있어. 소개시켜 줄 테니 가서 보약이라도 한재 지어 먹어.”

“……약이요? 저 약 안 하는데요?”

우주인은 아주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보통의 경우 그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진지해지는 법이 없었다. 마냥 장난이고 마냥 농담 같은 말 속에 진심을 담는 일은 있어도 정색을 하고 안색까지 굳히면서 말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민주환은 보약을 지어 먹으라고 했는데 우주인은 마약은 안 한다고 대답하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다.

“보약이유. 몸이 약해져서 몸에 좋은 약 지어먹으라는 말이어유.”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질감에 얼떨떨해 하고 있었지만 삼봉은 재빨리 민주환의 말을 해석해 주었다. 솔직히 주인에게 한국인 대부분의 말들은 해석하기 난해한 외국어였고,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정삼봉이었다.

“응?”

“뭔 약에 그리 치를 떠는 중은 몰라두 저 어르신이 말씀하신 것은 보약이라니께유. 여름 타서 안색이 나빠진 모냥이라고 몸에 좋은 약 지어 먹으라고 말씀하신 거여유.”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는 있지만 민주환의 귀에도 삼봉의 해석이 들렸다. 그것도 너무 잘 들려서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가끔 하는 짓이 해괴하고 나오는 대답이 엉뚱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저 재주 많은 우주인은 한국말이 서툰 모양이었다 싶었던 것이다.

“아픈 데도 없는데 무슨 약을 먹어.”

“아픈 데는 없어도 아플 거 같으면 미리 몸을 보해야지유. 그게 보약이라니께유?”

“아픈 데 없는데?”

“아, 닥치고 그렇다면 그런 중 아셔유. 걍 어르신이 아자씨 걱정돼서 덕담해 주신 거다, 생각하시믄 되자녀유.”

“응? 아…….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제서야 민주환은 더 크게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아니야. 내 오늘 큰 정보를 얻었구만. 자네 한국말이 서툰 모양이군.”

“예. 한국에 온 지 칠 년밖에 안됐는데요?”

“그래? 그런 것치고는 한국말이 유창한 걸세. 부모님이 엄격하셨던 모양이야.”

“뭐…….”

우주인이 대답을 꺼리는 기색으로 미간을 찡그리자 노회한 민주환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자네 옆에 그 귀여운 청년은 누군가? 자네가 이런 자리에 누굴 데려오는 건 또 처음이로구만.”

“아…….”

주인은 잠시 고민했다. 성질대로라면 그냥 ‘머슴’이라고 말할 뻔했는데 그랬다가는 얄짤 없이 뒤로 일주일을 당할 것 같았다. 암컷의 비위를 있는 대로 맞춰야 교미할 수 있는 짐승의 로맨스만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 역시도 암컷. 즉, 삼봉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연애를 하면 이런 것이 아주 번거롭다. 그래서 추파를 던지는 암컷만 상대했는데 당장 밥줄이 달려 있으니 귀찮고 성가셔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주 귀엽게 생긴 청년이지. 그렇지 정 사장?”

“……촌닭.”

“응?”

주인은 그제야 민주환의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저 여자 꽤 잘나가는 강남 클럽의 새끼 마담인데 죽은 민용태와 내연의 관계였다. 즉, 그녀는 민주환의 옆구리에 안겨 앵앵대며 애교를 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10% 클럽들에서도 알아주는 마당발이다. 그 바닥에서 인맥이 넓고 탄탄하다는 것은 곧 힘이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파워를 가진 이는 흔치 않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민주환의 부름을 애교 있게 거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따라 나왔다는 것은 그녀가 연인을 처참한 죽음으로 내몬 누군가를 지목하여 골탕 먹이려는 의도를 가슴에 비수처럼 품고 있다는 의미였다.

“회장님은 뭐 저렇게 촌티 나는 애한테 귀엽다고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요. 우주인 사장님? 이번에도 핸드폰 갖고 오라고 시키신 거예요?”

“흐응?”

이 여자 꽤 귀엽게 논다. 주인에게 여성은 수비 범위 밖의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덤비는데 모른 척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민용태가 왜 엿 먹었는지 나름대로 조사를 마친 끝에 망신이라도 주려는 계획을 잡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회장님. 쟤 우주인 사장님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에요.”

“외람되지만 어르신.”

“응?”

비아냥거림이 잔뜩 묻어 있는 여자의 말에 삼봉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옆에 앉아 계신 여자 분은 어르신 애인 되시는 분이신가유?”

“허허! 글쎄……. 그렇게 된다면야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아. 그럼 시방 꼬시고 있는 중이신감유?”

“허허허허……. 그렇다네 청년. 지금 내가 정 사장을 꼬여내려고 애쓰는 중이지.”

“아……. 그렇구먼유.”

주인이 저 앙큼한 여우 새끼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50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몬드 원석은 크게 한방 터트려 주신다.

“지가 헐 말은 아니지만서두 어르신 안목이 촌스러우신 모냥이구먼유.”

“으응? 뭐라는 것인고?”

“촌스러운 사람더러 귀엽다고 하시니께 어르신 안목이 촌스러우신 거 아니겄시유? 거 뭐라나. 취향이라고 하지유? 취향이 촌닭 계통이신가 봐유.”

“……?”

“푸핫!”

미처 삼봉의 고차원적인 비아냥을 알아듣지 못한 민주환과 여자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 동안 주인은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얼마나 큰 웃음이었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돌아볼 정도였다.

민주환이 삼봉에게 귀엽다고 했고, 정 사장은 삼봉이 촌닭이라고 했다. 그런데 민주환이 정 사장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했으니 민주환은 촌닭이 귀엽거나 예쁘게 보이는 취향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대놓고 촌닭이라 욕한 정 사장을 향해 내가 촌닭이면 너도 촌닭이라고 쏘아붙인 격이니 제가 한 말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여자의 얼굴이 파릿하게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배를 잡고 쓰러지는 주인의 뒤를 따라 민주환도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삼봉은 비록 대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파르르 떠는 여자의 얼굴에다 혀를 내밀며 메롱! 까지 하는 게 아닌가. 주인은 바닥으로 쓰러지듯 뒹굴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취소하고 싶었다. 저건 50캐럿이 아니라 80캐럿짜리다.

결국 민용태의 일로 주인에게 지나는 말로라도 한 소리 하려 했던 민주환은 당돌하고 영리한 사내아이 때문에 그저 웃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애를 건드려 놨으니 우주인이 발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업이 위태롭다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은 민용태가 쓸 만한 재목이 못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우주인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고 당부를 했건만 아무리 방계 먼 혈족이라고 해도 제 그늘 밑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우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위태로운 민용태의 사업체를 원상 복귀시키기 위해 들이고 있는 노력은 감수할 만했다.

우주인 또한 민주환의 면을 세우기 위해 미리 민주환에게 민용태에 대한 그의 행동을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청까지 넣었었다.

더 이상 가타부타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생각한 민주환은 팔팔 뛰는 정희수와 숨넘어가게 웃느라 정신도 못 차리는 우주인을 보며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우주인은 아무래도 제법 괜찮은 인물을 어디선가 건져 온 모양이었다. 큰돈 되는 것을 귀신같이 찾아내는 안목이 사람한테도 적용되는 모양이라며 민주환은 부러움에 살짝 입맛이 썼다.

“왜 안 놀고 그냥 간대유?”

“여기 온 목적은 달성했잖아.”

“목적이 저 할부지 만나는 거였시유?”

“눈치 빨라서 좋다.”

주인의 큰 걸음걸이를 따라가기 위해 삼봉은 종종걸음 쳐야 했다.

“참말로 안 놀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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