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58)

“안 놀아.”

“왜유?”

“니가 놀지 말라며.”

“지가 놀지 말랬다고 참말 안노는 거여유?”

“응.”

너무 단순한 대답이 아닌가. 그리고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대답이기도 했다. 삼봉은 미심쩍게 인상을 쓰며 다시 물었다.

“금 지가 인쟈부터 바람피지 마셔유. 하면 바람 안 필 꺼여유?”

“바람……. 아! 내가 너 말고 다른 놈 만나서 섹스 하는 거?”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참말로……. 야. 그거유. 안 할 꺼여유?”

“하지 마?”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현관에서 경비를 맡는 사람들이 재빨리 주차장으로 연락 넣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은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근사하게 다리를 꼬더니 들쩍지근한 눈빛으로 삼봉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하고 섹스 하지 말라고?”

“지가 하지 말라면 참말 안 할 껀감유?”

“니가 하지 말라면 안 해.”

“왜유?”

“바보냐? 애인이 하지 말라면 안 해야지. 애인이 떼씹을 좋아하면 사람들 끌어 모아 떼씹을 해야 하고, 애인이 에셈플레이를 좋아하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참말이어유?”

“그런 일로 농담할 만큼 내가 한가해 보이냐?”

“……아뉴.”

“안 해. 그럼 되지?”

“…….”

“…….”

저 눈빛은……. 순서 건너뛰고 오늘 거시기 하자고 꼬실 때 보여주는 그런 눈빛이었다. 삼봉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거 같지만 그동안의 학습이 그로 하여금 이런 순간에 기쁜 내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가르쳤다.

“금. 아자씨는 지한테 바라는 거 없시유?”

“응?”

“애인이 원하는 건 뭐든 한다면서유. 지는 아자씨가 바람 안 폈으면 했는디 아자씨는 지한테 바라는 거 없냐 이 말이어유.”

“아……. 있다.”

“뭐여유? 지도 꼭 들어 드릴께유. 순서 건너뛰자는 말만 아니면유.”

“쳇!”

묘하게 선수를 빼앗긴 주인이 비열하게 혀를 찼다.

“약 하지 마.”

“야?”

“약 먹지 말라고. 보약 빼고.”

“뭔 약이유?”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차량 불빛이 번쩍하고 로비를 비추자 주인은 일어서 삼봉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근간에 들어 주인은 예사롭게 삼봉의 손을 잡았다. 그 정도는 다소 부끄럽기는 해도 민망한 짓이 아닌지라 삼봉은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 줄 때마다 가슴팍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붙들고는 삼봉의 걸음에 맞춰 걷는 남자가 정말 자신의 애인인지 볼때기를 꼬집어보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뭐든. 약 많이 먹으면 안 좋아. 약 먹을 때 꼭 나한테 말하고 먹어.”

“……지 약 같은 거 안 먹는데유?”

“그래. 앞으로도 먹지 마.”

여름이 물러나고 있는지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그리고 삼봉은 좀 요상하기는 하지만 애인의 바람이 그것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수 있겠다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알았시유. 지도 아자씨가 시키는 대루 약은 절대 안 먹을 꺼구먼유. 혹시 먹게 되면 아자씨한테 말하고 먹을 께유. 됐시유?”

“그래. 그렇게만 해.”

“헤헤헤…….”

주인은 제 손에 잡힌 삼봉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조그만 손이 손안에서 꼬물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우주인은 여러 개의 사업체를 갖고 있다. 갖고는 있지만 운영하지는 않았다. 여러 개의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의 경영은 마소처럼 부려 먹는 어느 한 사람의 손에 일임되어 있었다.

일은 모두 구 비서에게 맡겨 놓고서 자신은 매일같이 집에서 빈둥거리기나 하고 어느 날 문득 어딜 가고 싶다고 말한 뒤 튀어 버린다. 도대체가 출근이란 것을 하는 일이 없으니 입사한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여직원이 사무실로 들이닥친 우주인을 향해 누구냐고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구 비서의 사무실로 차를 가져온 여직원이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하자 우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상하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그럴싸하게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커피 맛있네. 시집가서 사랑받겠어.”

“……감사합니다.”

누구신데 남의 사무실에 함부로 들어오냐며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해도 우주인이 저리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이상했다. 구 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을 나가는 여직원의 뒷모습을 보다 심드렁하게 말했다.

“성격이 많이 변하셨습니다.”

“응?”

“직원들이 사장님 얼굴 모르는 건 당연한 문제인데 그럴 때마다 가볍게 지랄 발광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연애하잖아.”

“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세상 모든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유순해지지만 그건 지구인 사정이다. 우주인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일인 것이었다. 아니, 당초에 우주인은 사랑에 빠지고 어쩌고 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몰랐어? 나 코딱지랑 연애하잖아. 왜 새삼 놀라는 척이야?”

“그 거짓말 설마 저보고 믿으라는 건 아니시죠?”

“사 놓으라고 한 건?”

뜬금없이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모든 영화 DVD를 구입해 놓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구 비서는 군말 없이 DVD가 가득 들어 있는 종이 백을 내밀었다.

“영화 같은 것도 보십니까?”

“코딱지가 다음 단계는 같이 영화 보는 거래.”

“예?”

“근데 영화관까지 가고 남들이랑 다 둘러앉아 시커먼 데서 뭐해. 홈시어터 사서 설치하라고 했지.”

“…….”

그게 한두 푼짜리냐? 정작 본인은 영화는커녕 드라마도 오 분을 넘기지 못하고 지겨움에 몸부림치는 주제에 홈시어터가 웬 말이냐.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지만 구 비서는 더 본격적인 화제 때문에 속마음을 감췄다.

“나한테 우편물 온 거 없어?”

“DHL로 일주일 전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두꺼운 책자 수준의 종이 뭉치와 그 위에 몇 장으로 덧붙인 서머리 리포트를 건네주면서 구 비서는 주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께로는 갈데없이 무기 수준인 영문 자료를 번역 요약하면서 그는 내도록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당장 집으로 뛰어가 빌어먹을 개초딩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픈 마음이었지만 발목 잡고 있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끈기를 갖고 기다려야 했다.

“이건 뭐야.”

“읽기 편하시라고 번역 요약본을 준비했습니다.”

“나 까막눈 아닌데?”

“폭스 마이어는 뭐고 삼봉 씨 이름은 왜 거기 있는 겁니까?”

“…….”

뜻밖에도 주인은 번역본 서머리 리포트가 아니라 영문으로 된 두꺼운 팸플릿을 넘겼다.

“사장님!”

“읽고 요약까지 했으면 내용 다 알겠네. 입 아프게 그걸 또 설명해?”

“설마…….”

“그리고 앞으로는 이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나 한국어는 거의 까막눈이야.”

“영어를 잘하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국어보다는 쉽잖아. 한국말은 라틴어보다 어려워. 특히 문법은 거의 외계어 수준이라고.”

“대체 몇 개 국어를 하실 수 있는 겁니까?”

“영어. 에스파냐어가 제일 쉬워.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통용되는 말은 거의 하고.”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주인은 아주 편안하게 팸플릿을 읽고 있었다. 중간 중간 어려운 의학 용어들은 번역을 위해 메모해 놓은 구 비서의 각주가 있으니 사전을 요구할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무식하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구 비서 역시 내용을 모두 알고 있으니 팸플릿과 환자 케어를 위한 지침 사항이나 참고 사항에 대해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었다.

술렁술렁 넘어가는 종이를 보며 구 비서는 생각해야 했다.

한 번도 그는 우주인이 왜 파리 잡듯 가볍게 사람을 죽이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또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와 주인의 관계는 그야말로 상호 간의 필요에 의한 결합일 뿐 개인적인 어떤 접점도 갖지 않은 채 유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러한 기류에 변화가 생겼다.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웅덩이로 누군가가 돌멩이 하나를 던진 것처럼 작은 물결이 번져 일었고 잠들어 있던 웅덩이 바닥의 흙이 일어나 대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직하다고도 볼 수는 없었지만 또 마냥 나쁘다고도 보이지 않는 변화였다.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 시작해 이제는 제법 사나운 파랑으로 변해 버린 물결 앞에서 구 비서는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정삼봉.

과연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가진 인물일까.

그는 사장님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제법 큰돈을 걸었다. 하지만 정삼봉이 지켜 줄 만한 가치를 가진 인간이라는 가정 하에 그 돈은 잃는 것이 아깝지 않은 돈이 될 것이다. 반면 그 반대의 경우라면 구 비서는 돈을 따도 입맛이 쓸 것 같았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린 남자. 그리고 가당찮은 이유로 그 남자를 곁에 두겠다는 우주인.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자신.

“무슨 생각해.”

“예?”

“넋 빼고 앉아서 뭐하는데.”

“아…….”

주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거의 칠 년 가깝게 그의 곁을 지킨 구 비서는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무실에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별난 우주인의 평소 행실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가 구 비서의 눈앞에 있었다.

“연애하면 온화한 성격으로 변하는 겁니까? 천하에 우주인도?”

그것은 확인을 위한 간단한 절차였다.

“나라고 별수 있어? 원래 수컷들은 차지하고픈 암컷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야. 강하고 호전적인 수컷을 원하는 암컷 앞에서는 허세 부리면서 깃털을 세우고, 상냥하고 다정한 수컷을 원하는 암컷에게는 똥오줌이라도 핥으면서 기어야지. 그게 당연한 거고.”

“……?”

“코딱지가 바라는 건 상식 있고, 경우 바른 사람이니까 거기 맞춰 행동해야지. 것도 꼬시는 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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