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비서는 자신이 제법 큰돈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씨……. 진짜 얼어 뒈질 놈에 순서. 짜증나 미치겠네. 이거 내숭이잖아. 구 비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적성에 안 맞는 경우 바른 사람 노릇 진짜 환장하겠어.”
또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을 잃거나 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는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구 비서도 내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
“왜요?”
“배변은 날더러 진짜 나쁜 놈이라고 하던데?”
“삼봉 씨는 사장님을 좋아하고, 사장님은 삼봉 씨가 필요합니다. 사장님은 삼봉 씨의 바람을 들어주는 대신 삼봉 씨 역시 사장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거죠. 거기에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이 왜 적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흐흐흐흐. 역시 구 비서네. 그럼 지금 내가 구 비서한테 뭘 시킬지도 알겠네?”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끄러미 구 비서를 향하는 시선에 구 비서 역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종 질환별 대체 의학의 전문가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쪽 반응은 어때?”
“양키들이.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동안 폭스 마이어 재단에서 왜 이 질환에 대해 자신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았는지 불만을 표시하지만 비교적 조심스럽고 흥미로운 반응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을 하는 동안 내내 구 비서는 스스로의 행동에 회의감을 느꼈었다. 과연 우주인이 이 정도로까지 정삼봉에게 투자하려 할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지금 눈앞에 있는 주인의 표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정삼봉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필요에 의한 사악한 술수였든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와 애착에 기인한 것이든 구 비서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재단에서 온 팸플릿과 DVD를 챙겨 사무실을 나서던 우주인은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보며 말했다.
“양 여사만큼이나 난 당신이 편하고 좋아.”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적힌 이름이 정삼봉이 아니라 구라였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구 비서는 웃었다.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됐거든요?”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인과 함께하면서 배운 건 아무 근거 없는 예감이 때로 진리보다 더 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는가 싶더니 가을도 없이 겨울이 찾아온 것 같았다. 집이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인지 겨울철의 찬바람은 여간이 아니었다. 산촌에서 살다 왔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소름 돋은 팔을 어루만지며 집안으로 뛰어들어 오는 삼봉의 반응이 정상적이라 할 것이었다.
추운 것을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우주인도 만만찮았다.
대체 봄부터 왜 볕만 나면 마당으로 기어 나가 햇빛 아래 훌렁 벗고 있는가 싶었더니 저 외계인은 광합성을 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삼봉은 기운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주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자씨. 자유?”
“안 자.”
“금 어디 아파유?”
“안 아파.”
“금 왜 그런대유?”
“추워.”
아침부터 내내 물어보는 데 돌아오는 대답은 저거 한 가지였다. 실내 온도를 22도로 설정해 놓았는데도 춥단다. 치솟는 기름 값 때문에 이 큰 집에 어떻게 보일러를 팡팡 돌리냐며 싸우고 얼러서 합의 본 온도가 저것이었다. 삼봉은 밖에 나가서 한참 일하다 들어왔으니 추운 게 당연하지만 내도록 집안에만 있었으면서도 추워 죽겠다면서 어리광을 부리는 우주인이다.
“대체 왜 내가 내 집에서 이렇게 춥게 지내야 하는 거냐고!”
“땅 파면 기름 나와유?”
“땅 파면 기름이 당연히 나와야지. 그럼 모래가 나오겠냐?”
“음마. 또 억지소리 한다.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 안 나거든유?”
“안 나오기는 왜 안 나와. 나오거든?”
“아우! 그려유. 나와유. 근디 그건 아자씨 기름 아니자너유.”
“한국은 원유 수입국이기는 하지만 석유 수출국이야. 남아돌아서 외국에 파는 그 기름 좀 쓰겠다는데 왜 잔소리야. 니가 그린피스냐!”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은 몹시 행복하지만 그 높고 아슬아슬한 행복감만큼 복장 터지고 어이 가출 사태가 종종 발생했다. 삼봉은 난데없이 자신을 그린피스로 몰아붙이는 우주인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너무 기가 막혀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는 그런 심정이었다.
“환경보호는 뭔 놈에 환경보호. 사람이 얼어 죽게 생겼는데……. 망할 놈에 그린피스.”
“이 정도로는 안 얼어 죽어유.”
“내가 말했잖아! 나 열대에서 살다 왔어. 너 한국의 겨울이 열대에서 살다 온 사람한테 얼마나 추운지 모르지? 너한테는 절대로 안 얼어 죽을 온도래도 난 동사하기 직전이란 말이야!”
“아무리 열대에서 온 사람이라도 섭씨 10도 정도로는 내려가야 얼어 죽는대.”
구원병은 생각지도 않게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대체로 그녀의 말에는 억지 쓰면서 대들지 않는 주인을 알기 때문에 삼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 여사는 누구 편인데!”
어린애도 아니고 편 가르기까지 해 주시는 유치한 우주인에게는 냉정한 눈 흘김이 돌아갔다.
“난 진실만 말해. 누구 편들어 줄 만큼 내가 정이 많은 사람으로 보여?”
“아니.”
“그렇게 입고 춥다 그래 봐야 삼봉이는 절대 보일러 안 틀어줄걸?”
“작년에는 내가 다 벗고 있어도 보일러 잘만 돌렸잖아.”
이제 아주 애원을 하신다. 그럼에도 양 여사는 강경했다. 구 비서를 통해 작년 겨울 난방비를 확인한 삼봉이 아주 기겁을 하면서 양 여사를 설득한 공이었다. 아무리 집이 크고 산그늘에 계곡까지 있어 바람이 드세다지만 여름 초입서부터 늦봄까지 한 달 평균 난방비가 이백만 원이 넘어가는 것은 삼봉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는 집안 살림하는 사람이 없었잖아. 지금은 그게 삼봉이 소관이라서 나도 간섭하기 힘들어. 그러니까 삼봉이를 이겨 보든지. 해고하든지. 옷을 좀 더 입든지. 그건 사장님이 선택하라고.”
라고 말씀하신 양 여사님은 자신의 방으로 가 버리셨다. 여름과 달리 휑한 느낌의 거실에 주인과 삼봉 이렇게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아자씨.”
“왜!”
“글케 추워유?”
“얼어 뒈지겠어.”
“에휴…….”
날은 점점 싸늘해지는데 금자가 맨발로 다니니 아직 여름인 줄 아는 주인의 옷차림을 생각하면 좀 더 잔소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삼봉은 그러는 대신 주인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제 팔로 한 아름 안아도 모두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체온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일인지 삼봉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인쟈 좀 덜 춥지유?”
“…….”
“우리 영화 볼래유? 이렇게 꼭 붙어서 이불 하나 덮고 같이 영화 안 볼래유?”
“…….”
“예? 아자씨. 우리 영화 봐유. 오늘 홈시어터도 설치했고 또 아자씨가 영화도 잔뜩 사 갖고 오셨잖어유. 예?”
“니가 보고 싶은 거지? 나랑 딱 달라붙어서……. 응큼한 놈.”
“…….”
가출한 어이가 이제는 아주 뺨따구를 갈겨 주신다. 그럼에도 삼봉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용케 눌러 참아야 했다. 여기서 삐끗하면 밤새 구시렁구시렁 대며 잠도 못 자게 남의 방으로 와서는 멀쩡한 총각 가슴 설레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쳇! 그래. 니가 그렇게 보고 싶다니까 훌륭하신 우주인님께서 널 위해 같이 봐 주지.”
“고, 고맙구먼……유.”
애써 눌러 참는다고 터진 부앗장이 도로 붙는 것은 아닌지라 저절로 이가는 소리가 나오는데도 주인은 모른 척 삼봉의 손을 잡았다.
“가자. 같이 봐 줄 테니까. 확실하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니가 보자고 해서 보는 거다. 그것도 꼭 들러붙어서. 맞지?”
“야. 야. 맞구먼유. 아자씨가 다 맞어유.”
“난 맞는 거 싫어. 니가 다 맞아!”
삼봉의 손을 잡은 채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우주인인데 하는 말은 삼봉이 너무 영화를 보고 싶어 해서 자신은 어쩔 수가 없단다. 삼봉의 이마에는 힘줄이 돋았다.
삼봉이 선택한 영화는 디카프리오 주연의 블러드 다이아몬드였다. 삼봉이 워낙에 디카프리오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거의 다 섭렵하였지만 블러드 다이아몬드만은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어터 룸에 불을 끄고 도톰한 담요 두 장을 가져와서는 두 사람이 앉아도 넉넉한데다 등받이 각도까지 조절할 수 있는 의자에 하나를 깔자 주인은 냉큼 의자에 앉아 한쪽 팔을 내주었다. 팔베개까지 하고 이불 덮고 누우니 뭔가……. 야릇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곧 시작한 영화의 꽝꽝 터지고 튀는 요란함으로 사그라들었다.
영화의 내용도 모르고, 디카프리오가 누군지도 얼굴 보기 전에는 몰랐던 주인은 평소와 달리 꼼지락 꼼지락 지겨움을 표시하지 않고 영화를 주시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좋아하는 영화배우의 영화를 보는 삼봉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누군가 그에게 천국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천국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우주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지나친 금욕 생활로 인해 정액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서 이제 입만 열면 허연 정액이 줄줄 새나올 것 같다고 엄살 부리던 그런 이유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RUF 반군들이 소년들을 납치해 소년병으로 만드는 과정에만 주목하고 있었다.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다못해 다이아몬드에 관해서도 그는 관심이 없었다.
술과 담배, 마약과 세뇌. 그런 것들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살인 병기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것은 이미 주인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불쾌한 내용의 영화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삼봉이 아무리 애원해도 이 영화를 함께 보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전반적으로 암울하고 그리고 불행했다. 심지어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덫에 걸려 죽어 가는 짐승조차도 자신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온통 스스로에 대한 동정과 불쾌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아프리카를 겪어보지 못한 자들의 눈을 통해 미개하고 어리석은 흑인들과 그들을 이용하는 백인 우월주의가 너무도 선명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군의 이념은 어리석은 가치관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제 뱃속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독의 의도도 분명 그러했겠지만 주인의 눈에는 그런 가식조차 재수 없는 자기 위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감동적인 인간애 부활의 장치로 소년병 디아와 그 아버지의 재회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감동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인에게는 언젠가 배 변호사의 입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되었던 것처럼 ‘능력 없는 작가가 고갈된 소재를 극복하지 못해 식상한 레퍼토리로 관객의 눈물을 쥐어짜려는 약은 수’에 불과했다. 디아의 자리에 우주인이 서 있었다면 그를 찾기 위해 온갖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아들을 찾아온 아비의 심장에 망설이지 않고 총알을 박아 넣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세뇌 받은 소년병들은 그 아비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원래의 착한 아들로 돌아오지 못한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총은 대단히 효율적인 세뇌 도구였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아홉 살짜리 소년이라 해도 거구의 흑인 전사를 단 한 번에 죽여 넘어트릴 수 있는 것이 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과 같은 경계가 되었다. 그 선을 한 번이라도 넘은 사람은 결코 어떤 수를 써서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생명의 존중이 사라진 공백은 눈을 뜬 살육의 욕망만이 들어차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아비의 연설은 감동적이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소년병 디아를 원래의 착한 소년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하는데 영화는 너무도 쉽게 디아의 눈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담배와 마약에 찌들어 총질하던 소년병 디아는 이미 인간이라기보다는 피 맛을 본 맹수에 불과한데 어떻게 저 아비의 말을 알아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적이게도 아비의 품에 안기는 것일까. 똥 같은 이야기다. 짐승은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듣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수긍하거나 하는 것은 타락해 버린 짐승에게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남자 배우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흙을 바라보며 주인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열다섯이 될 때까지의 삶은 쉬웠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 쉬웠다. 그리고 그것에 가책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죽였다. 아무도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열다섯에 만난 그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이념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누군가를 죽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열다섯이 된 짐승에게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너무 쉬우니 이제부터 칼을 사용해 보라고 했다.
변화의 계기는 그것으로 시작되었다. 칼을 사용하는 것은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르다. 내 손에 죽어 가는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체온과 맥박이 뛰는 느낌, 고통과 긴장으로 흘리는 땀의 냄새까지 너무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본능에 따라 움직이던 짐승을 이끌어 준 힘이기도 하였다.
아프리카에서의 어린 시절. 그리고 콜롬비아 캘리에서의 십대.
단 한 편의 영화로 인해 그것들이 스치듯 빠르게 주인을 훑었다.
때로 대부분의 욕구는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주인은 한편의 영화가 도화선이 되어 파지직 파지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도화선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가슴 안에 들끓는 것이 식욕인지 성욕인지 혹은 파괴욕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아자씨?”
“…….”
커다란 화면에는 이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자씨. 눈 뜨고 자유?”
“아니.”
“금 표정이 왜 그런대유?”
“키스해 봐.”
“야?”
주인은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순하게 눈만 깜빡거리는 삼봉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탐욕스러운 하지만 결코 거칠지 않은 입맞춤에 바지락 거리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그는 양껏 어린 양과 같이 보드라운 생명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삼봉이 제시한 서른 가지 순서를 이미 다 치르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주인은 열 번째인가 열다섯 번째인가에서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그놈에 망할 뒤로 일주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더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멈추거나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생존하는 모든 것은 이기적이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혼란 앞에서는 여지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긴 입맞춤을 잠시 멈추고 삼봉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대니 작은 몸이 제법 뜨거워져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저렇게 불쾌한 영화는 처음이다.”
“야? 그게 뭔 말이래유?”
집요한 입맞춤 탓인지 삼봉의 음성 역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펄펄 뛰는 생동감까지 희석하기 모자랐는지 반짝거리는 눈만은 건강하게 주인을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