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계약 연장이요?”
“응. 일단 지금은 장호에 어르신 깔머슴 사는 내용 때문에 연봉이 좀 짜지. 내년부터는 그 항목까지 포함해서 꽤 금액이 커. 계약을 연장하자고 하는 중이거든. 물론, 그 때 자네한테 말한 대로 삼봉이가 원하면 대학도 보내 줄 수 있고 말이야.”
“아니. 뭐 집안일 하는 애한테 그렇게까지…….”
“훗……. 우리 사장님 성격이 좀 까탈스러워야지. 한번 마음에 든 사람은 바꾸는 거 싫어하셔. 지금 음식 해 주시는 아주머니도 벌써 칠 년 가까이 함께 있는데 이제 기운 없어 은퇴한다고 하니까 난리 발광을 하는 거거든.”
그런 사람도 있다. 낯익히는 일이 서툴러서 익숙한 사람들 말고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그런 사람 말이다. 돈 있겠다 권세 있겠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익숙한 고용인을 놓아주고 싶지 않다면 삼봉은 운이 터도 보통 튼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이봉이었다.
월급도 오르고 학교도 보내 준다면 삼봉이에게 그만한 일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은 집안일만 하는데 내년이 되면 그 아주머니 그만두시고 주방 일까지 해야 하거든. 물론, 업무 내용이 많아지니까 거기에 맞춰 장호 어르신 문제와는 또 다르게 급여도 변동돼. 지금 받는 돈에 세 배 이상은 받을 수 있어. 물론,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로 인해 빠지는 시간이 계산되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많이 받겠지.”
“…….”
이 사람들에게 집안일은 하찮은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봉은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에 그저 놀랄 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집안일 전체가 삼봉이 책임이 되니까 필요한 경우 삼봉이 밑으로 사람을 쓸 수도 있고……. 사실 지금 하는 일도 많은데 거기 주방 일까지 맡게 되면 당연히 사람을 써야 하겠지.”
“그 정도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이야.”
“예?”
거친 비탈길을 걸어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구름다리 위에 서 배 변호사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삼봉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반듯하고 소신 있고 그리고 참 따뜻한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없겠나? 계약 연장 건.”
“아. 예. 물론……. 어차피…….”
“어차피?”
“솔직히 말씀드려 삼봉이한테 이런 일자리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그렇지?”
“동생한테 이득이 되는 일인데요 뭐. 선배님도 계시고…….”
배 변호사는 손을 내저었다.
“내가 뭐. 난 삼봉이한테 얻어먹는 처지야. 예전에는 말이야. 삼봉이 집에 들어오기 전 이야기야. 보고할 일이 있어서 집에 가도 차 한 잔 얻어먹기 힘들었어. 요새는 삼봉이가 밥도 챙겨 주고 과자도 챙겨 주고……. 삼봉이 덕분에 내 팔자가 폈지.”
“설마요.”
솔직히 이봉이 아는 한 삼봉은 누굴 막 퍼 주고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막내라서 그런지 아니면 어려서 워낙 저 혼자 놀아서 그런지 제 잇속에 너무 밝아 가끔은 형제지간인데도 정떨어지는 면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네 품을 거들어서 얼마나 받는지 뻔히 아는데 가끔씩 내놓는 통장에 깜짝 놀랄 돈이 들어 있는 것만 봐도 절대 헤픈 성격은 아니었다.
이봉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정삼봉 예찬에 자신이 아는 동생과 이 집에서 일하는 정삼봉이 동일 인물인가까지 의심할 정도였다.
산더덕이 들어 있는 보퉁이는 제법 묵직했다.
“날 좀 풀렸다고 고새를 못 참고 나와 또 훌떡 벗고 있는 거여유?”
“뭐!”
“이따 한참 추워진다고 했구먼유. 적당히 하고 들어와유.”
“여기 와서 앉아 봐.”
나무들 겨우살이를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바빴던 삼봉은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청하는 주인에게 못이긴 척 다가가 앉았다.
정말 못 말리는 지극 정성이다. 춥다고 그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날이 좀 풀리니까 또 나와 옷을 벗어 재끼니 말이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훌렁 벗은 우주인을 봐도 놀랍지가 않았다. 마음속에서 삼봉에게 우주인은 광합성을 해야 살 수 있는 외계 생물체였다.
“너 왜 계약 연장 안 해?”
“아…….”
사실 한 달 전부터 배 변호사가 집에 올 때마다 삼봉을 붙잡고 늘어지던 문제였다. 그것이 이제 우주인 본인의 입에서 나왔으니 더는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막말로 사장이 직접 계약 연장을 담판 짓자는데 더 미룰 수 있는 고용인이 어디 있겠는가.
“왜 말을 안 해.”
“그게 말이지유.”
“…….”
“해도 되는가 싶기두 허구 또…….”
“또?”
삼봉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가 계약 연장을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누구보다 계약 연장을 바라는 것은 삼봉 자신이었다. 그래야 돈을 모아 집에 트랙터를 사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본디 목적한 바가 그러했는데 계약 연장은 삼봉에게 아주 반가운 소리여야 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믿어지지 않는 연봉 액수만 아니라면 벌써 진즉에 사인을 했을 것이다.
“돈이 너무 많구먼유.”
“뭐?”
“연봉이란 것이 솔찍히 너무 많구먼유.”
“……?”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 집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의 월급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이 작은 금액이었다. 당장 내년부터 삼봉은 집안일뿐만 아니라 우주인의 식사도 마련해야 했다. 각종 음식 준비는 물론이고, 식재료 전반에 대한 책임까지 맡게 되는 사람이니 양 여사만큼은 되지 않는다 해도 배 변호사는 합당한 금액을 제시했을 것이다.
“대체 얼만데 이 난리야.”
“사천 만원이유.”
“한 달에?”
“미쳤시유? 일 년에유.”
“상여금 빼고?”
“아니유. 포함 해서유.”
“너무 작은 거 아니야?”
“야?”
“……?”
“…….”
끔뻑끔뻑 할 말 많은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너 내년에는 양 여사 이 집에 없다. 그러면 내 밥도 니가 해야 돼.”
“그게 워째서유.”
“지금 하는 집안일에 음식 만드는 것까지 해야 하는 거라고. 그럼 일은 더 힘들어지는 거고 또.”
“또유?”
주인은 그 정도의 임금이 합당한 이유를 설명했다. 솔직히 자신이 고용인들의 임금에 후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부려 먹는다. 부려 먹는 만큼 돈을 지불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삼봉이 이처럼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에 벌벌 떠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올해 니 임금은 원래 깔머슴살이 까는 것 때문에 돈이 많이 빠지는 거지. 그것만 안 빠져도 지금 받는 돈 두 배거든?”
“야?”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주인은 끌끌 대며 혀를 찼다.
“바보냐?”
“…….”
“거기다 일도 많아지는 거거든.”
“그것뿐만이 아니구먼유.”
“그럼 또 뭐.”
삼봉은 한참 심란하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야단이었다. 그러고는 결국 겸연쩍은 듯 한마디 내뱉는다.
“아자씨랑 지랑……. 그니께 애인이자너유.”
“그래서?”
“애인 집에 일을 허면서 돈을 워뜨케 받남유?”
작정하고 때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보다 손이 빨랐을 뿐이다.
주인은 불끈 쥔 주먹으로 삼봉의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인상을 썼다. 그럴 때마다 삼봉의 상체가 휘청휘청 뒤로 밀렸다.
“공사 구분 분명하게 하자. 응?”
“야?”
“일하는 건 일하는 거. 연애하는 건 연애하는 거. 그거 구분 못 하면 곤란하지.”
“그러니께 말여유.”
“잔소리하지 말고 계약서 사인해. 그리고 만일 말이다.”
“……?”
“연애가 틀어져도 넌 내 고용인이고, 니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해도 넌 내 애인이다. 그 두 가지가 같은 선상에 있는 것만큼 엿 같은 일이 없으니까 분명히 구분해. 알았어?”
“아…….”
물론, 주인으로서는 삼봉을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정삼봉은 우주인의 밥줄이 아니던가. 누가 밥줄 놓고 살겠는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던지는 보험을 아직 어수룩한 스무 살 청년은 냉큼 물어 버렸다. 달콤하고 또 현실적인 그 미끼를 유혹하는 노회함 따위는 갖지 못한 것이 사랑에 빠진 스무 살 청년이었다.
“아자씨…….”
“그건 그렇고 말이야.”
“……?”
“너 왜 요즘은 호 안 해주냐?”
“허!”
좋은 분위기 망치는데 우주인만 한 외계인도 없다. 한참 해롱대면서 몽롱하게 젖어 가는 눈이 왕창 찌그러졌지만 그러면서도 삼봉은 웃어야 했다. 한 때는 저 말좆에다 대고 매일 몇 번이고 호를 해줘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말도 솔찮게 시켰고, 술에 취해서는 보고 싶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생각해보면 우주인보다 훨씬 먼저 친해진 녀석이 우주인의 거시기니까 말이다.
슬그머니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주인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멋지지?”
“음마. 징그런 거. 시상에 저런 게 거그로다 드갔단 말여유?”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주인은 대단히 흡족했다.
“그럼. 당연하지. 보통은 아주 죽는다고 환장을 하며 좋아하거든? 너 같이 불감증만 아니라면 말이야.”
“지 불감증 아녀유!”
“아냐. 내가 보기에 넌 불감증이 확실해.”
“쳇! 아자씨랑 안 놀아유.”
“웃기고 있네. 너 만져 보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