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58)

“오케이. 그럼 말장난은 이쯤 해 두고. 너 영어 할 줄 아냐?”

“……?”

‘그건 왜 묻냐. 이 미친놈아.’ 하는 시선으로 정이봉이 주인을 노려보자 주인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코딱지 형이니까 영어를 할 리가 없지. 좋아. 내가 선량한 마음으로 요약 번역본을 주지. 한글은 읽을 줄 알겠지?”

“미친놈…….”

“야! 내가 너보다 나이 더 많거든?”

“아. 예. 그러십니까? 나이를 똥구멍으로 쳐드셨습니까?”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똥구멍으로 뭘 쳐드신 적이 없다. 똥구멍으로 내 좆을 처먹는 건 니 동생이지.”

“야!”

“왜!”

“두 분 다 진정하시고……. 자꾸 이런 식이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배 변호사가 이제 지겹다는 얼굴로 계속 해 왔던 말을 되풀이하자 주인은 늘 하던 대답을 들려준다. 창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배변은 누구 편이야.”

“나야 물론 법과 정의의 편이지.”

“풋!”

보통 법과 정의 어쩌고 하면 우주인이 창문을 열면서 ‘금자가 웃는다.’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없이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 구 비서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배변의 얼굴은 붉어졌지만 주인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책상에서 서류철 하나를 집어 들고는 정이봉의 앞으로 던졌다.

“읽어.”

“이게 뭡니까.”

“편한 길.”

“……?”

“내가 뭣 때문에 짜증나게 너 따위한테 붙들려서 끝도 한도 없이 싸워야 하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나한테는 꽤 그럴듯한 명분이라는 게 있거든. 읽어.”

구 비서는 양껏 마음이 상한 배 변호사의 옆구리를 찔러 상황 설명을 재촉했다. 배 변호사가 아주 간략하게 정이봉을 소개하고 그가 저렇게 격분한 이유와 깐죽거리는 사람을 아직 사지 육신 멀쩡하게 살려 둔 우주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구 비서는 그저 ‘아…….’ 하며 뜻 모를 소리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서류를 읽는 정이봉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의문, 당혹, 경악, 부정 그리고 분노. 그런 다음에 싸늘해진 미소로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인은 그것까지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얼굴로 구 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져왔지?”

“예. 지금까지 컨택이 성사된 명단이고, 상황에 따른 비용 협의가 끝난 부분은 항목별로 표를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구 비서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보지도 않고 정이봉에게 넘겼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것도 읽어. 파렴치한 너네 가족들이 머슴으로 팔아넘긴 놈한테 앞으로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눈으로 직접 보라고.”

“우린 삼봉이를 팔아넘긴 적이 없습니다.”

“없으면 말고. 어쨌든 읽어.”

“……제가 왜 이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겁니까?”

주인은 사악하게 웃었다.

“믿지 않으면 네 동생이 알게 될 테니까.”

“……?”

“알게 되면……. 앞으로 진통제 한 알도 먹지 못하는 자기 인생을 비관하게 되지 않을까? 거기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그 병은 스트레스가 청산가리보다 무서운 병이야. 넘어지지 않을까. 차에 부딪히지는 않을까. 화상을 입는 건 아닐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마 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걸?”

“당신!”

“그런다고 내가 널 여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나라도 형제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아?”

핀트가 다소 어긋나기는 하였으되 정이봉으로 하여금 우주인은 말이 안 통하는 상대란 교훈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배 변호사와 구 비서는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정이봉의 시선에 아는 대로 실토해 주었다.

편한 길이 맞았다. 연애 감정이 어떠니 사랑이 저쩌니 해 봤자 씨도 안 먹힐 노릇이다.

니 동생은 병이 있고, 그 병에 쏟아 부을 돈이 나에게는 있다.

얼마나 심플하고 명확한 설명인가.

“폭스 마이어 재단에서 사람이 와 이미 모든 검사를 마친 후입니다.”

“난 폭스 마이어 재단까지 가서 그 질환에 대한 정보를 직접 듣고 왔어.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고, 대부분의 의사들도 잘은 모르지만 찾아보면 몇몇 학술지에 관련 질환에 대한 연구 자료가 기재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삼봉이가 폭스 마이어 증후군 환자라는 사실이야.”

“관련 논문이 기재된 학술지는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치료할 수 없는, 혹은 치료해서는 안 되는 병을 가진 가족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것일까. 정이봉은 멍해진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새로 건네받은 서류철에서 각종 생활 질환이나 상해 등의 목록과 그 옆에 기재된 이름 그리고 치료비용을 보면서도 그것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애를 데려가겠습니다.”

“흥.”

고통스럽게 내려진 결론 앞에서 주인은 가열 차게 콧방귀를 꼈다. 너무도 비웃음이 확실한 그 얼굴 앞에서 화도 내지 못할 만큼 충격에 빠진 정이봉을 양껏 비웃어 주는 것이다. 그는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였다. 평소의 그가 냉혈한보다는 단순 무식한 어린애처럼 보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집에 돈이 많은가 보지?”

“…….”

정이봉은 대답하지 못했다. 치명적인 약점을 공격당한 것처럼 괴롭고 분한 표정은 지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니면 거기 명단에 있는 누구라도 끌어다 댈 수 있을 만큼 권력이 있나?”

“…….”

조롱하는 것일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말고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평범한 가족의 서글픈 의리를 비웃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끝까지 이 사실에 관해 코딱지가 알지 못하도록 할 자신은 있어?”

“그건…….”

“난 세 가지 모두 갖고 있지. 그래도 데려가겠다면 미안하지만 난 이 사실에 대해 정삼봉에게 말해야겠어. 넌 병에 걸렸고, 이제부터는 진통제 한 알도 네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줘야겠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정이봉뿐만 아니라 구 비서나 배 변호사까지도 몹시 놀란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망가진다고 해도 상관없거든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겠어?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려야지.”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좋게 말해 못 알아들을 위인한테는 가장 잘 먹히는 방법을 써야 하지 않겠어? 쉬운 길을 놔두고 왜 돌아가.”

“사장님!”

배 변호사는 만류했지만 주인은 그만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가족애야? 진짜 웃기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면서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환경에서 빼앗아 오는 게 가족앤가?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결국 자기 면역 기능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하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애 보면서 통곡만 해 주면 되는 거야? 난 내 동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난 내 아들을 위해 정말 모든 것을 다 했어. 하.하.하. 웃긴 거 알지?”

“하지만 적어도 우리들은 진심으로 삼봉이를 걱정하고 사랑합니다.”

“진심? 그거 얼마짜린데?”

“……?”

왠지 알 수 없지만 배 변호사나 구 비서는 주인이 지금 몹시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복장 뒤집는 소리를 뻔뻔하게 해대는데도 그게 꽤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해 납득할 방법은 없었지만 주인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진심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데? 너네 그 잘난 가족애가 진심인지 아닌지 나한테 증명할 방법은 있어? 정이봉의 마음은 진심이고 우주인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라는 그 잘난 결정을 누가 내리는 거지? 진심이라……. 그거 먹는 거냐? 아니면 갖고 노는 거냐? 묵혀 두면 값어치가 올라가는 거냐? 대체 그게 뭔데. 그게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만큼 대단한 거라는 생각, 나는 못하겠는데 넌 어떠냐.”

“적어도…….”

정이봉은 이를 갈았다.

“적어도 삼봉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삼봉이를 보는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흐음……. 배변.”

“으, 응?”

그 얼굴은 마치 시즌 중에 시비 거는 사람을 만난 우주 괴물과 유사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말까지 더듬는 배 변호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주인이 너무도 진지하게 물어 왔다.

“나 이 새끼 죽여 버리면 안 돼?”

“…….”

“죽여 버리고 싶어. 말도 안통하고 사리 분간도 못 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는 진심 말고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놈들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나한테서 코딱지를 데려가겠다는데도 내가 참아야 하는 거야?”

“사장님?”

이대로는 정말로 위험했다. 그것은 배 변호사보다 구 비서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구 비서가 벌떡 일어나 정이봉의 옆자리로 옮겨 앉자 배 변호사 역시 그것을 따라 했다. 정이봉은 좌우에 구 비서와 배 변호사를 두고 끼어 버린 듯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코딱지거든? 내 콧구멍 속에 있는 코딱지란 말이야. 그걸 왜 니들이 빼라 마라야. 귀찮고 짜증나고 성가셔도 내 콧구멍 속에 있는 코딱지는 나만 건드릴 수 있어. 그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거란 말이야!”

쾅!

아무도 그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재에 있는 소파들 중에 2인용 소파가 맹렬한 우주인의 발길질에 날아가 근사한 마호가니 책상을 덮쳤다. 난데없이 소파의 덮침을 받은 책상이 당황한 듯 크르르르 몸을 떨었다.

“사장님.”

구 비서조차도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우주인을 본 적이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지금 우주인이 사람도 뜯어먹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양 여사가 아니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것이다.

“사장님 때로는 말입니다. 쉽게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멍청해집니다. 누구나 사장님처럼 언제 어느 때건 가장 적합한 판단을 본능적으로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이봉 씨도 지금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전 생각합니다. 정이봉 씨에게 좀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구 비서로서는 목숨을 건 직언이었고 외계 생물체에게조차 그런 진심은 통했던 모양이다. 당장 달려들어 정이봉의 목줄을 물어뜯을 것 같았던 주인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정이봉을 노려보았다.

“현명한 판단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정이봉은 우주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구 비서나 배 변호사가 경악을 하거나 말았거나 시종일관 이봉은 주인에게 부정적이었다.

“놀고 있네……. 이봐.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든 결정을 해야 할 때 그 선택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게 뭔 줄 알아?”

“……?”

주인은 소파에게 덮침을 당하고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는데 과격한 소파 때문에 책상도 꽤나 데미지를 입었는지 주인이 열려고 하는 서랍은 쉽게 아가리를 벌리지 않았다.

온갖 성질을 부리며 책상을 걷어찬 주인이 서랍에서 꺼낸 것은 무식하게 생긴 대검이었다.

어떻게 그런 물건이 책상 서랍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죽으로 된 칼집은 손때가 반질반질 묻어 길이 잘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주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칼집에서 대검을 꺼내 들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나쁜 거 같으니 몸으로 깨닫게 해주지. 사람은 말이야.”

앗! 하고 놀랄 사이도 없었다.

배 변호사 정이봉 그리고 구 비서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대검 자루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피하고 할 시간도 없이 그것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이봉의 귀 바로 옆에 꽂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몸으로 소름이 내달리는 것은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사장님!”

“아무도 안 죽었으면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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