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58)

“하지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냐구요!”

“지금부터 설명할 거야. 어이! 정이봉. 너 지금 무슨 생각 했어.”

하얗게 질린. 아니 새파랗게 변해 버린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정이봉이 눈만 치켜뜨며 우주인을 바라보았다.

가죽으로 된 칼집으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치던 주인은 사나운 얼굴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머리가 나쁘니까 무슨 생각인들 했겠냐마는……. 대부분 그런 경우 사람은 딱 두 가지를 생각하지. ‘죽는다.’와 ‘살고 싶다.’야.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회상? 놀고 있네. 사람도 짐승하고 똑같아. 죽기 아니면 살기인 상황에서는 명분이나 가치관 떠들면서 잘난 척할 여유 따위 없어. 그건 전부 일단 살고 난 후에 생각할 문제라고. 알아들어?”

“…….”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개떡같이 던지며 조국을 위해 피 흘렸다고? 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똥만 든 대가리로 그딴 생각 하는 것도 여유 만만할 때나 가능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단 하나도 예외 없이 내가 말한 그 두 가지. 딱 그것밖에 생각 못해. 니 동생이 바로 그 상황이라고 알아듣겠어? 니가 지금 가족이 어떠네 체면이 어떠네 따지고 계산하는 건 죽는 게 니가 아니라 니 동생이기 때문이라고. 그게 니 문제라도 입장 운운하고 진심 어쩌고 하면서 계산기 두드릴 수 있을 거 같아? 진짜 금자가 웃는다. 금자가 웃어.”

정이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이라고 딱히 그에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놔두고 가든지. 뒈진 놈을 업고 가든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 뒤 주인은 서재 방을 나가 버렸다.

삼봉은 더덕 껍질을 까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노력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더덕 위로 떨어졌다.

“왜 우니.”

“삼봉아 울지 마.”

“안 울어유.”

손을 내밀어 위로하지는 못하지만 차예진이 속상한 얼굴을 한 채 어떻게든 삼봉을 달래 보려 노력하는 것과 달리 양 여사는 가만히 한숨만 내쉬었다.

“속상하지.”

“……야.”

“가족들이 알게 되었을 때 이런 사달이 일어날 것은 미처 생각을 못한 모양이더구나.”

“야. 지 생각이 짧았구먼유.”

“그래서? 이제 형이 알게 되었으니 어쩔 생각이야?”

“모르겄시유.”

양 여사는 이례적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한결 같이 쌀쌀맞은 표정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차가운 북풍한설처럼 날카로웠던 그녀가 봄 햇살처럼 상냥하게 웃자 삼봉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한 채 멀뚱하니 양 여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생각 안 해봤구나.”

“야…….”

“정말 사장님을 좋아하는구나.”

“야?”

그녀는 아들이나 손자의 재롱에 흥겨워 하는 오십대 아줌마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여사님에서 넉넉한 동네 아낙과 같은 분위기가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서운할 만큼 차가운 그녀였다.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빠지는 거라잖아. 네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냅다 던져 버린 거로구나 싶어서 난 꽤 기분이 좋네.”

“……빠지는 거.”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사장님 편이거든. 그렇게 진심으로 사장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지.”

삼봉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었다. 의도적인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냅다 스스로를 던져 버리는 그런 것이었다. 교통사고처럼 별안간 일어나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생각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일어나는.

사랑은 빠지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우주인 같은 단순 무식 유치 찬란에게 매료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장님만 널 애 터지게 좋아하는 건 아들처럼 사장님을 키운 내 입장에서 상당히 부당한 일처럼 느껴지거든. 하지만 너도 사장님과 같다면 앞으로 난 너에게 좀 더 친절할 수 있겠구나.”

“사장님이 삼봉이를 좋아해요?”

차예진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양 여사를 보았다.

사실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지금 양 여사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양 여사는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채 말없이 삼봉을 응시하는 것으로 ‘너 역시 그리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대신했다.

삼봉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그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사장님이 뭣 때문에 얘랑 사귀기로 한 거겠어.”

“그거야…….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사장님이 보여준 행동은 절대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은 아닌걸요?”

“사랑에 빠지면 이마에 눈이 하나 더 생기는 거야?”

“물론, 그런 건 아니죠. 하지만 여사님도 생각해 보세요. 사장님은 심지어 아직도 삼봉이와 다른 상을 봐서 식사하시잖아요. 사랑하면……. 뭐든 나누고 싶은 거 아닌가요?”

양 여사는 코웃음을 쳤다.

“예진 씨 연애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예?”

“사람 얼굴 생긴 것이 다 다른 것처럼 좋아하는 마음 표현하는 것도 한결같을 수는 없는 거 아닐까? 내 눈에는 사장님이 얼마나 삼봉이를 좋아하고 있는지 보이는데 왜 다들 그게 무슨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사기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지 모르겠네?”

“아…….”

“사장님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삼봉이와 사귀겠다는 말을 해?”

“지도 그것이 참말 궁금하구먼유.”

이제 더 이상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없었지만 삼봉의 얼굴은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로 아주 가관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배 변호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 차예진은 ‘밥 때문이잖아요!’라는 말은 못하고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삼봉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코딱지와 겸상하지 않는 게 내 진심을 의심하는 유일한 증거야?”

“사장님…….”

“이야기는 끝났어?”

계단참에 서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인은 심술이 잔뜩 난 얼굴로 따졌다.

“차예진 씨. 말을 해봐. 내가 코딱지와 밥을 같이 먹으면 그 때부터는 내가 진짜로 연애하는 게 되는 거야?”

“아니. 제 이야기는…….”

“좋아. 양 여사. 추가 비용 지불할 테니까 이제부터는 코딱지 밥도……. 너 얼굴이 왜 그래.”

그제야 주인의 눈에 눈물이 범벅된 삼봉이 얼굴이 발견된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심술 사납게 콧방귀를 핑핑 껴 대던 우주인이 이제 대놓고 인상을 쓰자 삼봉은 더덕 까던 손으로 쓱 제 얼굴을 닦았다.

“별 일 아녀유.”

“야!”

“왜유.”

“매도 내가 대신 맞았고, 싸움도 내가 대신 해 줬는데 니가 왜 질질 짜고 지랄이야. 엉!”

우주인의 기준으로는 지금 삼봉이 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 말 그대로 정이봉이 마당 빗자루 휘두르는 걸 팔로 막은 것도 우주인이고, 정이봉과 핏대 세우며 지금까지 짜증을 참아 가며 상대한 것도 삼봉이 아니라 우주인이었던 것이다.

서재 방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졌는지 삼봉은 알 리가 없었다.

“나 여기 아파 뒈지겠거든. 아픈 건 난데 니가 왜 질질 짜. 죽을래?”

“아참. 괜찮어유? 어디 좀 봐유.”

더덕 껍질을 잔뜩 붙이고 있는 손으로 삼봉이 달려와 주인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발갛게 멍들 준비를 하고 있는 팔을 보며 그는 제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워메……. 이 일을 우쪄. 단단히 멍들겄구먼유. 많이 아프지유?”

“그럼 간지럽겠냐?”

심드렁하게 투덜대는 주인에게 삼봉은 이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그러게 무식허게 그걸 왜 처맞고 있어유. 아자씨 팔뚝은 뭐 쇠로 맹그렀시유? 뭣 하는 짓이래유. 지가 울 짝은성 성질 머리가 개차반이라고 말했시유. 안 했시유. 했자녀유. 금 알아서 피해야지 걸 기냥 맞고 있어유? 바보여유?”

“그냥 내버려뒀으면 너 머리 터졌어.”

“지 대가리 터지지 아자씨 대가리가 터지는 건 아니자너유. 팔 안 부러졌시유? 울 짝은성이 검도를 혀서 작대기만 하나 있으면 17대 1도 문제없단 말여유. 음마 속상해 죽겄구먼…….”

“…….”

“또 따른 데는 맞은 데 없어유? 솔직히 말혀 봐유. 야?”

“없어.”

“참말이지유?”

“니 눈에는 내가 어딜 가서 매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냐?”

“매만 맞을 거 같은 게 아니라 칼도 맞고 댕기자너유. 내가 아자씨 땜시 속상혀 죽겄시유. 알어유? 흠마……. 이 일을 워쩐댜. 아프지유?”

양 여사는 한껏 걱정을 하다 그다음으로는 속상해 죽겠다는 말 그리고 이제 곧 내가 너 때문에 못산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생긴 것으로는 빈말로도 예쁘다 하기 힘들지만 하는 짓은 참으로 예쁜 것이다.

“호 해줘.”

“야?”

“아프니까 호 해 달라고.”

“아…….”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드러 죽겠네. 좀 씻어!”

주인의 팔뚝에다 침이라도 바를 듯 가열 차게 ‘호.’를 해주던 삼봉의 미간이 구겨졌다.

“삼박사일 조난을 당해도 지금 너보다는 깨끗하겠다. 그게 뭐냐.”

“아. 더덕 까느라 흙이 묻어서 그렇잖어유. 만날 만날 씻는구먼 뭐가 드럽다고 이 야단이어유.”

“거울 좀 봐라.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리 못하지. 에이! 드러워.”

라면서 주인은 왜 삼봉의 허리를 냉큼 끌어안고 침실로 가는 것일까.

더럽다 더럽다 노래를 부르는 주인의 말에 맞춰 후렴구라도 합창하듯 ‘고만 혀유!’ 하는 삼봉의 목소리에 양 여사는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삼봉을 욕실로 몰아넣고 씻으라며 협박한 주인은 욕실 문간에 서서 삼봉이 씻는 것을 감시까지 했다.

더덕 깐 손이란 것이 쉽게 씻어지는 게 아니라 삼봉은 난감했고, 무엇보다도 까다 만 더덕은 어쩔 것인가. 저녁에 먹으려면 양념도 재 놔야 하는데 주인의 기세로는 도무지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소리 지르고 난리 부린 작은형이라도 형이 가져온 더덕은 죄가 없는데 맛없어지게 물에 담가 놓기만 했으니 그것만이라도 건져 놓고 오겠다 하는데도 안하무인이다. 남의 말은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우주인이었다.

“아 왜 못 나가게 하는 거여유 시방!”

“그렇게 드런 꼬라지를 하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그 꼬라지하고 음식 만들 거야?”

“더덕 껍데기 까다 온 거구먼유. 그냥 두면 물 먹어서 못 쓰게 되유.”

“그거 얼마나 한다고 이 난리야. 빨리 씻어!”

“낭중에 그거 맛나니까 또 맹글어 달라 그럼 지한테 혼날 꺼구먼유.”

“협박하냐?”

“지가 아자씨를 협박해서 엇따 쓰겄시유.”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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