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58)

“쳇…….”

삼봉은 때타월을 가져다 비누기를 묻혀 손에 들러붙은 더덕 진액을 박박 닦아냈다. 씻는 김에 눈물이 말라붙어 따끔거리는 얼굴도 씻고 나니 심란했던 마음까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댓시유?”

“흠……. 그나마 좀 낫네. 얼굴도 못생긴 게 얼굴에 흙 바르고 매복 나가는 줄 알았다.”

“하여간에 유별나유. 유별……. 윽!”

타월로 얼굴을 박박 닦으며 나오던 삼봉을 냉큼 떠안은 주인이 급한 일 있는 사람처럼 달려 침대 위로 뛰어들자 삼봉에 입에서는 억억거리는 비명 소리만 나왔다. 다행인 것은 삼봉이 쓰는 돌침대와 달리 우주인의 침대는 깃털 매트리스라는 것 정도일까?

주인은 삼봉을 제 배 위에 얹어 놓고서 꽉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왜 이런대유?”

“내가 죽이게 다정한 애인이잖아. 니가 기분 안 좋은 거 같아서 위로 좀 해주려고.”

“퍽이나 위로가 되는구먼유. 이러다 또 짝은성이 보는 날에는 아자씨도 지도 골로 가는 수가 있구먼유.”

“흥!”

그래도 애인 품이 싫지는 않은지 삼봉은 반항하거나 허우적대지 않았다. 한참 주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삼봉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지가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건 중 참말로 모르겄구먼유.”

“생각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막 사는 것도 괜찮아.”

“세상에 막 사는 사람이 워디 있시유.”

“나.”

“풋…….”

“비웃냐?”

“아녀유. 그랴도 아자씨가 주제 파악은 허시고 사는구나 싶어서 그랬구먼유.”

“뭐…….”

삼봉의 등을 꽉 끌어안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내려갔지만 삼봉은 딱히 그것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는 진짜 위로가 필요했고, 그런 일에 미숙한 남자가 최선을 다해 삼봉을 위로하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방 지 맴으로는 아부지고 형님이고 다 필요 없이 아자씨만 있으면 될 거 같은디유.”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유. 부모 형제도 다 모른다고 저 좋은 대로만 살 수는 없는 거자녀유. 워뜨케 설득을 해야 짝은성이 지를 이해할지 모르겄시유. 아까는 승질이 나서 냅두라고 소리 지르긴 혔는디 그럼 안 되는 거자녀유.”

“부모 형제가 무슨 상관인데.”

삼봉이 주인의 가슴에 턱을 대며 얼굴을 들었다.

“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중 아셔유?”

“아들 머슴으로 파는 부모도 부모냐?”

“또 복장 터지는 소릴 허신다. 아. 왜 그려유. 그런 거 아니란 거 알자녀유. 그라고 울 아부지가 서울 어르신이랑 내기를 안 혔으면 또 내기에서 지질 안 혔으믄 아자씨랑 지는 만나지도 못 혔구먼유.”

“그랬다면 내 신세가 이렇게 엿 되는 일은 없었겠지.”

“말 다 혔시유?”

주인은 고개를 다른 데로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어떻게 보면 꼭 삼봉이 성질내는 게 무서워 그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인이 무서워 할 일도 삼봉이 성질을 낼 일도 없었다.

“남들은…….”

“……?”

“고민을 좀 하는 거 같더라. 한국 남자들은 가족한테 많이 연연해하는 거 같으니까. 특히……. 게이들은 부모님이며 결혼해 애새끼 싸질러야 하는 거 의무로 받아들이는 거 같기도 하고.”

“내 말이유.”

기운이 빠진 듯 다시 주인의 가슴으로 삼봉이 얼굴을 묻어 버리자 주인은 사악하게 중얼거렸다. 얼굴 표정도 목소리도 음산한 것이 갈데없는 못된 남자였다.

“그런데 나한테 그런 니 사정을 이해하란 소리는 하지 마.”

“…….”

삼봉은 여상하게 주인의 말을 들어 넘겨 버렸다. 이런 상황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갖게 되는 고민을 주인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난 부모 형제도 없고, 그딴 웃기지도 않는 고민에 동참할 생각도 없으니까 니 문제는 니가 알아서 해결해. 대신 연애를 먼저 하자 그런 게 너였다는 건 똑똑히 기억해라. 이거 중간에 관두고 집에 간다 어쩐다 했다가는 니 아버지고 형들이고 가릴 거 없이 죄다 파묻어 버릴 테니까.”

“에휴…….”

“뭐야.”

삼봉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또 억지소리를 허시네유. 고만 좀 혀유. 참말 초딩도 아니고 그게 뭔 소리래유. 세상에 부모 형제 없는 사람이 워디 있시유.”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나한테 부모는 없어.”

“야?”

삼봉이 다시 주인의 가슴에 턱을 대며 얼굴을 들자 주인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이 아홉 살 때인데 난 혼자였고, 내 주변 사람들도 다 혼자였기 때문에 원래 모두가 엄마 아빠를 가진다는 건 알지도 못했다.”

“말이 돼유?”

“안될 건 또 뭐야. 어쨌든 난 그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어디 쓰는 건지도 모르니까 나한테 이해하란 말 하지 마.”

“고아……였시유?”

“그렇다고 하데.”

“…….”

지금껏 얌전히 주인의 옆구리 옆으로 늘어져 있던 삼봉의 팔이 올라와 주인의 목을 감았다. 굼싯굼싯 움직여 위로 올라온 삼봉이 주인의 목덜미 옆으로 얼굴을 묻자 주인은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어린 강아지처럼 움직이는 삼봉의 기척이 싫지는 않았다.

“사기 치는 거 아니지유?”

“뭐?”

“속상하자너유.”

“…….”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것이 가만가만 속삭이는 삼봉의 숨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주인은 알 수가 없었다.

“엄니 얼굴은 못 봤지만 지는 아부지랑 성들 사랑 과하게 받고 자랐구먼유. 근디 아자씨는 그 먼데서……. 엄니 아부지도 없이 고아로 자랐다 생각허니께 속이 쓰려 미치겄구먼유.”

“위장병 있냐?”

“월매나 쓸쓸했을 꺼여……. 월매나 외로웠을 거여…….”

주인은 자신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훌쩍이며 이야기하는 삼봉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얘가 미쳤나 싶기도 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외롭고 쓸쓸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부모의 필요성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남들은 다 부모가 있다는 것도 열다섯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 그에게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들은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원숭이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 감동이나 연민 혹은 동경이 섞인 적은 없었고, 그래야 한다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아프리카서 뭘 하고 산 거여유. 야?”

“반군.”

“……야?”

눈물로 얼룩져 또 눈에 거슬리는 얼굴을 한 채 삼봉이 고개를 들어 주인의 코앞에서 더운 숨을 내뿜었다. 그게 대단히 짜증스럽지만 주인은 삼봉의 코끝에 매달린 눈물인지 콧물인지가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고개를 돌려 남의 눈물인지 콧물을 뒤집어쓰는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전에 영화 봤지? 반군에는 어린애들이 많거든? 내가 그중 하나였지.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쏘아 죽여 봤고, 그 뒤로도 열다섯이 될 때까지 시에라 리온을 위해 싸우는 반군 소속 소년병이었거든?”

“…….”

“나 꽤 훌륭한 병사였어. 나중에는 계급도 주더라? 싸움 하나는 진짜 잘했거든. 어느 지역이든 내가 포함된 부대가 출동하면 죽사발 되는 건 시간문제였어.”

우주인은 꽤 신이 나서 말했다. 지금까지 그런 것을 물어 본 사람이 없었고, 자신 또한 딱히 말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애인이 물어보니 신나게 떠들어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삼봉의 표정은 묘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한 번은 정부군 이동 통로에 매복해 있다 정부군 부대를 몰살시키라는 지령이 떨어졌는데 말이야. 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참 잘났었거든. 일단 미남계로 적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 수류탄 까고 크레모어 터트리고 해서 전멸시켰어. 그것 때문에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도 부상으로 받았다? 사령관한테 훈장도 받았고 말이야. 또 한 번은…….”

“내가 미쳤구먼.”

“응?”

주인은 아직 할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삼봉이 발딱 일어나 앉자 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따끈따끈하고 묵직한 몸도 좋았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끌어안고 있는다는 설정 자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 그를 대단히 흥분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삼봉은 그냥 일어나 앉은 것만이 아니라 뭐라 구시렁거리면서 뽈뽈 기어 침대를 내려가는 게 아닌가.

“너 어디가.”

“아자씨한테 뭐 진지한 걸 바란 내가 잘못혔시유. 아 말이 되는 소릴 혀야지 믿어 주는 척이라도 허지유! 안 그려유? 아주 언네 앞에서는 찬물 한 잔도 못 마신다고 아자씨를 델꼬 블러드 다이아몬드 같은 영화를 본 게 다 지 잘못이구먼유. 허이구! 복장 터져. 허이구…….”

“어이…….”

“알았시유. 알았시유. 짝은성이 뭐라고 혀도 지는 아자씨 집에 꼭 들러붙어 있을 테니께 쓸데없는 소설 그만 쓰시고 한숨 주무셔유. 이따 저녁때 더덕구이 만들어 드릴께유.”

“어디가.”

“까던 더덕이나 마저 까야지유. 지가 뭔 부귀영화를 볼 거라고 아자씨랑 같이 황당무계한 소설이나 쓰고 있겄시유. 안 그려유? 에이! 참말로 뭔 생각을 허는 사람인 중 모르겄다니께. 워쩌겄어. 그것도 내 팔잔디. 아이고 아부지요…….”

주인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고, 삼봉은 왜 저런 인간에게 반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만 바라보던 우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주인은 삼봉의 말대로 한숨 자고 나서야 다시 서재로 호출 받았다.

우주인이 잠든 사이 서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구 비서는 신이 나서 서재 테이블 위에 온갖 서류와 잡지와 출력물들을 늘어놓은 채 이야기하고 있었고, 정이봉은 매우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배 변호사만이 자신의 더덕구이가 무사히 요리되고 있는지. 그 식사에 자신이 불참하게 되는 망극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지 애가 타 있을 뿐이었다.

“즉, 삼봉이를 임상 실험 대상으로 삼지는 않겠다는 것에 대해서 제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 폭스 마이어 재단에 연계되어 있지 않은 몇몇 환자들에게 대체 의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저희가 포섭한 전문가들이 폭스 마이어 증후군에 대한 진료 및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에 도출되는 결과로 만일의 사태 가장 안전한 메디컬 케어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할 것임은 정이봉 씨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향후 사장님이 보유하고 계신 재단의 지분을 이용하여 재단에서 관리하는 환자들에게도 대체 의학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일은 전반적으로 모두 삼봉 씨를 위해 진행될 예정이니까 믿을 수 있는 연구 결과는 멀지 않은 시점부터 받아 보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군요.”

“아 씨! 아직 결론도 나지 않았는데 날 부른 거야?”

아주 밉상 진상이다. 배 변호사는 애인의 가족에게 얼싸안고 키스하는 장면을 들킨 게이 중에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 인간은 우주인 하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우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외계 생물체니까 그런 것일 테지만 껍데기 하나만큼은 흠잡을 곳 없는 인간 형상이 아닌가. 지금 정이봉이 저만큼 참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가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쯤이면 한 수 접어줄 만도 하련만 우주인은 양심에 털이 숭숭 나 있는 게 분명했다.

“결론은 났습니다.”

“뭔데.”

“저는 당신이 죽이고 싶을 만큼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이봉은 천천히 일어서 우주인과 눈높이를 맞추려 했다. 워낙에 우주인의 체격이 크니 그래 봤자 올려 봐야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선 다음 천천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흐음…….”

정중한 인사를 마치고 다시 허리를 편 정이봉의 얼굴에는 비굴함도 허세도 없었다.

“하지만 제 동생 눈에 눈물이 나게 하면 그 땐 주저 없이 당신을 미워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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