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58)

“뭐 그러시든지.”

제가 바라는 대로 결론을 도출해 내었으니 우주인은 이제 너랑 볼일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서류를 다시 한 번 움켜쥐며 웃는 정이봉의 얼굴은 불길했다.

“분명 당신 입으로 당신 콧구멍 속에 있는 코딱지라고 말했어. 데려간다고 하면 이 사실을 삼봉이한테 다 불어 버릴 거라고 협박도 했어. 맞지?”

“그래. 그랬다 왜.”

“당신은 삼봉이를 잘 보살피고 돌볼 거라고도 했어. 돈도 명예도 비밀을 지킬 능력도 있다고 말했어. 그것도 맞지?”

“어쩌라고!”

“흥!”

정이봉은 아까 배 변호사로부터 받아 낸 계약 연장 서류를 꼭 거머쥔 채 서재 방을 나서려 했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정이봉의 등이 꽤나 단단하고 멋져 보였다. 비장의 히든카드를 숨기고 있는 노름꾼처럼 보였던 것이다. 배 변호사가 기대했던 것처럼 문을 연 채 뒤돌아본 정이봉이 해맑게, 그야말로 티끌 한 점 없이 해맑게 웃었다.

“당신……. 똥 밟은 거야.”

“뭐?”

“내 동생이라서 차마 이렇게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

“같은 남자로서 난 지금 당신이 무진장 불쌍해. 눈물이 날만큼 불쌍해. 어떻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냐. 안목하고는…….”

뭔가 놀림을 받은 듯한 느낌은 드는데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쾅! 하는 소리를 내며 닫히는 서재 방문을 보면서 주인은 이번에도 머리만 긁적거려야 했다.

어쩐지 형제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코딱지가 아니라 똥이었나?

음식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자 웬 여자 분이 음식을 하고 있었다. 정이봉은 정중하게 인사했고, 그녀로부터 아직은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소개를 들었다. 이 집의 다른 고용인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는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현관문을 나와 왼쪽으로 집을 끼고 돌자 작은 화로에 숯불을 피워 놓고 더덕을 굽고 있는 삼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봉은 고개도 들지 않고 골이 잔뜩 나 있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난 안 가.”

“…….”

“안 간다고 혔어. 그니께 성 혼자 가.”

“오라고도 안 해.”

“응?”

한 줌 남아 있는 햇살에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대놓고 따뜻하게 대해 준적은 없지만. 아주 가끔 그로 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삼봉은 이봉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독하고 모질어도 가족들에게는 끔찍했던 녀석이고, 공부하는 형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녀석은 이봉이 법대에 입학하자 난데없이 실업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희망했다. 말려도 소용없었고 두들겨 패도 꿈쩍을 하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고등학교를 다녀서 정작 삼봉에게는 돈 한 푼도 들이지 않았지만 이봉은 두 번이나 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빠듯한 살림에 대학 등록금 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휴학을 했을 때 이봉은 삼봉이 왜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는지 알게 되었다. 저마저 공부하겠다고 나서면 손바닥만 한 땅뙈기마저 팔아 자식들 공부에 쏟아 부으려는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다며 태연하게 웃는 그런 동생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쓰린 동생이었다.

“사인해라.”

“뭐여?”

“니 계약 연장 서류.”

“음마? 짝은성. 왜 이러는 겨?”

“니가 덮쳤다며. 술 처먹고 또 그놈에 개차반 주사가 나와서 여기 사장 놈을 니가 먼저 덮쳤다면서!”

삼봉의 얼굴이 물감이라도 부어 버린 듯 붉어지자 이봉은 모질게 눈을 흘겼다.

“건 또 워뜨케 알았는감?”

“어떻게 아는 게 대수야? 내가 사내놈이 좆대가리 간수 못 하면 인생 조진다고 말 했어 안 했어!”

“아 글씨. 내가 잘몬 혔으니께 내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거자녀.”

“그럼 책임 안 지려고 했냐?”

“아 왜 이러는 겨.”

이봉은 계약서를 삼봉의 가슴팍으로 들이밀면서 사인할 것을 강요했다.

“일이 이 지경으로까지 되었으니 나도 더 뭐라 못하겠다. 그놈이 널 덮친 거면 아주 사달을 내버리려고 했는데 니가 덮친 거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러니 남자답게 책임져.”

“짝은성?”

“대신 아버지하고 큰형한테는 입도 뻥끗하지 마. 알아들어? 아버지 앞에서 허튼 소리하다 내 손에 걸리면 너도 죽고 저 사장이란 새끼도 죽은 목숨이다 생각해. 입 조심해. 정삼봉. 이 일은 너하고 나만 아는 거다. 아버지 돌아가시는 날까지 무슨 변명을 해서라도 이 일은 비밀에 부쳐. 알겠어? 그것만 약속해.”

“허지만…….”

“줄초상 나고 싶냐?”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에 삼봉은 도리질 쳤다. 어지간했으면 삼봉의 입에서 제 형 성질 머리가 개차반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물론, 이봉의 입장에서는 삼봉이 똥이었지만 말이다.

“알았어. 알았구먼. 아부지랑 큰성한테는 입도 뻥끗 안 할 꺼여. 약속혀.”

“그럼 사인해.”

“사인?”

“해! 지금 당장.”

“그니께……. 그거시 말이여.”

“당장 해.”

막무가내로 계약서를 들이미는 이봉에게 마침내 삼봉은 짜증 비슷하게 소리쳤다.

“아 지금 펜도 없고, 인주도 없자녀. 뭘로 사인을 하란 말여. 손구락이라도 콱 물어뜯어 혈서라도 쓰란 말여?”

“좋은 생각이네. 내가 물어뜯어 줄까?”

라고 하면서도 이봉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앞에서 삼봉은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벽에다 서류를 대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자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필체로 자신의 이름과 주민 번호를 적고 자필 서명까지 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받아 든 이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밥 내놔.”

“응?”

“형이 놀러 왔는데 밥도 안 먹여 보낼 생각이었냐?”

“아녀. 아녀……. 금방 이놈을 구워서 들어갈……. 오메! 다 타 버렸자녀. 내가 성 때문에 못 산다니께. 드가 있어! 요놈 구워 가지고 들어갈 테니께. 참말 큰일 났구먼. 흐미 아까븐 거…….”

양념이 타며 올라오는 연기가 매운 것처럼 이봉은 뒤돌아서서 가만히 눈가를 훔쳐냈다.

배 변호사는 소원대로 더덕구이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념한 더덕구이가 안주인 술상도 받을 수 있었다.

웬일인지 양 여사가 선뜻 홍주 독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말을 들어보니 이제 내 술도 아닌데 아껴서 뭐하겠냐고 말한다. 말은 바른 말이었다. 그 술은 원래 우주인의 것이지 양 여사의 것은 아니었다. 양 여사는 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술의 향이 나날이 짙어지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즐거움도 깨끗이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그녀는 술상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첫눈이 오면 홍주 만드는 법과 내리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한자리 끼라는 배 변호사의 청에도 불구하고 정이봉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돌아갔다.

시즌이 끝난 이후 이렇게 술자리를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양 여사까지 화를 내지 않는 얼굴로 술자리에 낀다니 명실 공히 오늘은 이 집 식구들의 회식 날이나 진배없었다.

삼봉이 부지런히 뒷산으로 다니며 주워 온 알밤도 더덕 굽던 화로의 숯불에 구워진 채 술상에 올라왔고, 발갛게 익은 날대추와 추석 밑이라 제법 알이 실해진 사과, 배까지 차려지니 더 이상 푸짐할 수 없는 상이 차려진 것이다.

문제는.

“독 안 탔구먼유.”

“그걸 어떻게 믿어.”

“지가 애인 먹을 음석에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이러는 거에유 시방? 참말 서운한 거 알어유?”

“모르는 음식이야.”

라며 싸우는 주인 삼봉 커플에 있었다.

양 여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부터 저리 아옹다옹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좌불안석’ ‘엄마 쟤봐’인 심정이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삼봉은 참으로 겁이 없다. 물론, 우주인에 대해 아직 모르는 점이 더 많으니 지레 겁을 집어먹을 이유야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것도 짐승인데 기본적인 포스가 남다른 저 외계 생물체에게 한 치도 물러섬 없이 대들고 개기는 것을 보면 그도 보통은 넘는다 싶었던 것이다.

반찬으로 올라온 더덕구이를 의심 섞인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할 뿐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았던 우주인이 못내 서운한 듯 홍주를 딱 두 잔 걸치면서부터 시작된 투정이 얼추 한 주전자를 다 비울 지경이 되어서야 시비로 변하는 중이었다.

홍주라는 것은 워낙에 독한 술이라 물이나 과즙에 타 먹거나 아니면 눈곱만한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이다. 겨우 입술이나 적실까 싶을 만큼밖에 들어가지 않는 잔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많고, 잔이 작아도 한 주전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얼추 한 주전자 비웠으니 주사가 보통 아닌 정삼봉이 지금 살짝. 아니, 다분히 확실하게 취했음은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그러면 우주인이라도 쟤는 술 취한 개려니 한 수 접어줄 수 있는 문제인데 한 마디를 안지고 따박따박 사람 복장을 뒤집으니 싸움이 안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주인과 정삼봉이 싸우면 피해 보는 것은 언제나 주변 사람이다.

은근히 정삼봉은 둔한 구석이 있어서 여태 마당에 뭐가 묻혀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눈치 살피면서 기를 펴지 못하는 다른 이들이 고스란히 우주인의 짜증을 받아 줘야 하는 것이다.

“내가 준 거자녀. 애인이 줬으면 고맙습니다 하면서 처묵으야 할 거 아녀! 썅!”

“뭐?”

결정적인 사달은 점점 짧아지는 삼봉의 말이었다.

사실 대단히 직설적이고 뜬금없는 그의 사투리도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거기다 말까지 짧아지니 단순하고 무식한 우주인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것은 당연했다.

“기여. 안기여.”

“내가 왜 기어!”

“무식허기는……. 기냐. 안기냐. 이 말이여. 내 말이.”

“그러니까 그 기가 뭐냐고.”

대번에 주먹이 날아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주인은 제 호기심 채우는 것이 먼저인지 반 토막이 난 삼봉의 말투에 대한 시비보다는 ‘기’와 ‘안기’의 차이점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였다.

“참말로 무식혀. 유치하고 상식 음써. 근디 워쩔껴. 난 아자씨가 좋은디.”

“기가 뭐냐고!”

이제 혼잣말까지 대놓고 해 주시는 막가파 정삼봉의 앞에 안달복달 주인은 ‘기’와 ‘안기’의 차이점을 캐묻고 있었다.

“맞냐 틀리냐. 아닐까요?”

“그게 왜 기고 안기야. 뭔 소리야 그게!”

차예진 씨의 훈수에 우주인은 벼락같이 짜증을 냈다.

“맞다를 기다라고 하고 틀리다를 기가 아니다. 즉, 안기다라고 합니다. 지방에서는 흔히 쓰는 관용 어구니 외워 두시면 편하실 겁니다.”

“부정형 접두사야?”

“예.”

충청도 방언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구 비서가 차분하게 설명하자 그제서야 우주인은 매서운 눈으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삼봉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안기야!”

빙고! 무식하지만 아주 용감하신 우주인께서 응용력까지 발휘하며 유창한 사투리를 호기롭게 외쳤다. 너무도 당당한 포즈였지만 홍주 잔을 들고 있던 모두가 허벅지를 꼬집어 가면서 참아야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진 주인 삼봉 커플의 만담은 제 허벅지를 꼬집는 살신성인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네 사람의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기여?”

“그래. 안기야.”

“기여.”

“왜 그게 기야. 모르는 음식을 어떻게 먹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데 탈이라도 나면 니가 책임 질 거야? 시뻘건 게 보기에도 무섭게 생긴 걸 어떻게 먹냐고! 너 낙지볶음 먹고 피똥 싸 봤어? 그게 얼마나 죽을 맛인 줄 알아?”

“낙지볶음을 묵고 피똥을 왜 싸.”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음식인 줄 알아? 그리고 너 왜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야. 디질래?”

삼봉은 손을 내저으며 해맑게 웃었다.

“응. 알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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