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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화 (4/135)

4.

마지막 페이지에 딸린 지도를 볼 수 없단 것 또한 큰 손해였다. 넓은 부지에 지어진 문정궁은 하나의 한옥 동네이자 커다란 보물과도 다름없었다. 처소로 쓰이는 건물만 마흔한 채에 황제를 위한 전각들은 더욱 크고 화려했으며, 각각의 용도를 지닌 많은 건물이 자연과 한데 어우러졌다. 내부에 호수를 낀 공원이 있고, 정자 위에 차린 카페까지 있었다. 궁 전체를 두른 담장은 높이가 5미터, 사유가 있어 개활한 구역을 제외한 둘레가 8080미터였다.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문정궁을 새로이 건설하고 무화들을 거처하게 한 뒤에도, 이 땅을 노리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여차하면 무화들을 쫓아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일곱 번째 황제께서 즉위식을 마치자마자 이곳에 직접 거주할 것임을 알린 뒤로는 군소리가 싹 사라졌다. 제아무리 금싸라기 땅에 홀린 무뢰배라도, 황제께서 제 소유의 땅에 제가 거주하는 이상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

마흔한 번째 무화로서 잘 자리를 잡으려면, 궁의 지리를 익히고 황제 폐하가 자주 오가는 길을 익혀야 할 터였다. 그런데 양 실장의 눈앞에 자리한 청년에게선 그에 대한 이지도, 의지도 엿보이지 않았다.

양 실장은 쓴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다른 요청 사항은 없나요?”

“으음, 없는데요.”

대답은 빠르고 즉각적이었다.

그에 양 실장이 떨떠름한 수신호를 보냈다. 그녀 앞에 앉았던 무화 가운데 가장 수더분하고 고분고분한 남자를, 경호직원이 일으켜 세웠다.

“차 앞까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대한건아 한솔에서 황제의 마흔한 번째 무화 하련솔이 되어, 문정궁으로 떠나는 이를 양 실장은 빤히 지켜봤다. 다리를 다친 펭귄처럼 좌우로 발을 딛어가며 어렵사리 움직이는 뒷모습이 측은했다.

문정궁은 그 뜻부터가 ‘달 우물’이라 우리 황제께서 이제야 오실까 저제야 오실까 어린 무화들이 개굴개굴 모여든 전쟁터였다. 저들끼리 견제하고 모함하고 다투는 일이 오죽 잦았으면 상궁이라는 직함으로 양 실장이 필요할 정도였다.

하물며 일곱 번째 황제께서는 그 용모를 드러내자마자 전 세계 매스컴에 전대미문의 미남 황제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황제를 향한 무화의 사랑은 스톡홀름 증후군과 다를 바 없다는 의견이 왕왕 들려왔다. 관련해서 논문을 쓴 심리학자들이 해외에도 숱했다. 그러나 오늘, 황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누구도 무화를 인질에 빗대지 못했다. 개화병이라는 특이한 조건과 궁궐이라는 폐쇄적인 사회를 차치하고서라도, 황제는 응당 사랑받아 마땅한 남자처럼 보였다. 하루 사이에 저도 개화병에 걸렸다며 거짓 신고를 해 온 이가 수백 명이었다.

황제가 매력적이고 젊은 남자인 만큼, 무화들에게 불어올 피바람은 더욱 덩치를 키웠다. 이, 좁은 우물 속 고인 물에는 조만간에 총애를 입은 자들만이 떠오를 터였다. 그렇지 못한 탈락자들은 그들 발뒤꿈치에 눌려 익사할 게 뻔했다.

멀리, 무화를 데리러 온 밴 앞으로 하련솔을 바래다주고, 차량 뒷문까지 꼼꼼히 닫아 준 경호 직원이 잰걸음으로 돌아왔다.

“실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저대로 입궁시켜도?”

말수 적은 그가 대뜸 입을 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복지 센터에 등록하고, 자립 자금을 좀 쥐어 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사람, 무화를 주어로는 어떤 말이건 뱉는 것만으로 질책 사유였다. 하물며 무화라는 사실을 숨기고 성 밖으로 빼내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범죄였다. 그러나 양 실장은 눈썹을 꿈틀거릴 뿐 경호 직원을 혼내진 않았다. 새 무화의 모습은 과연 누구의 연민을 끌어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아서였다.

양 실장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누구’의 자리에 황제가 위치할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

“일단 두고 보자. 폐하 취향이 어떤지, 우리도 쥔 정보가 없잖아.”

그래서 양 실장은 그에게 하련솔이라는 이름을 줬다. 한도 많고 탈도 많은 문정궁에서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사계절을 잘 좀 버텨 보란 말이었다.

“가진 게 영 없긴 하지만, 성격도 긍정적인 것 같고 말투도 착하고….”

오며 가며 괜히 못된 무화의 눈에 띄어 시비 걸리지나 말라고, 머무는 곳도 맨 구석의 작은 건물로 배정했다. 양 실장 선에서 베풀 수 있는 친절은 여기까지였다.

“살 좀 찌우면 볼만할지도 모르지. 지금도 얼굴이, 좀 귀여운 거 같지 않아?”

양 실장의 말에 경호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짙은 눈썹 위를 긁적거리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보았던 불쌍한 무화의 얼굴을 떠올리려 하였으나, 잘되진 않았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키나 어깨의 너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 밴의 뒷좌석에 태워 주기까지 하고, 눈인사를 나눈 기억이 분명 있건만 그 얼굴을 벌써 잊어먹다니. 마치 유령이 옷깃을 스치며 다녀간 느낌이었다.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직원을 뒤로한 채 양 실장은 하련솔의 서류 낱장을 남색 파일에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몰랐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하련솔이 이 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후궁이 될 줄은. 그 귀여운 얼굴로 황제의 속을 박박 뒤집어 놓을 거라는 사실도.

***

하련솔의 입궁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히 이뤄졌다.

가뜩이나 문정궁에 머무르는 무화의 머릿수가 많은데, 한 명이 추가로 입궁한단 소식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진작부터 독채를 차지하며 방석에 엉덩이 좀 비빈 무화들은 눈에 불을 켰다. 더군다나 개화병의 증세로 앞을 보지 못한다 하니, 그것만으로도 황제의 동성심을 유발하기 충분할 성싶었다. 그러나 경계심으로 똘똘 뭉쳐 삼삼오오 모여든 무화들은 하련솔의 몰골을 확인하자마자 김이 빠져 등을 돌렸다.

해태 마스코트가 그려진 티셔츠를 뒤집어 입은 그에게선 아무런 기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담을 손바닥으로 짚고 더듬더듬 움직이는 태도는 조금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담 너머로 그를 기웃거리는 눈짓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성격을 확인하거나 통성명을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련솔은 인상도 희미하고, 태도도 눈에 띄질 않고, 얼굴도 기억에 남지 않는 남자였다.

심지어는 ‘솔’이라는 단순명료한 이름조차 금세 잊혔다. 그를 확인하고 돌아온 이들조차 ‘그게 누구더라’ 하게 되는 식이었다. 서로 친한 무화끼리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새로 온 무화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그를 본 이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평범해요.”

개중 가장 호기심이 왕성한 스무 살 무화가 대꾸했다. 검지를 제 턱 아래에 대고 구시렁거리듯 내뱉은 평가에, 키 큰 남자가 목을 뻗었다.

“그게 다야? 눈도 안 보인다며. 키는 커? 날씬해? 정확히 뭐,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요.”

쏟아지는 질문에 어린 무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고운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며 그녀는 ‘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말을 꾸려 내고자 기억을 암만 되짚어도, 반나절 전 확인하고 온 남자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긴 거 같은데요. 특징이 없어요. 잘 기억도 안 나요.”

“…뭐야?”

그에 무화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들의 대화 소재는 다시금 하련솔을 떠났다. 그 뒤로는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조차 없게 되었다.

“즉위식 날 개화병에 걸렸으면, 걔는 폐하 얼굴도 못 봤겠네. 그건 좀 불쌍하긴 하다.”

그렇게 동정을 산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내 무화들은 각기 저고리와 두루마기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서로 간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인터넷 기사며 뉴스 채널에 실린 황제의 사진을 공유하기 바빴다.

한국 황실의 인물은 늘 빼어난 편이었다. 그런데도 일곱 번째 황제의 외모가 집중을 받는 것은, 그 용모가 과하다 싶을 만치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이름마저 ‘이림범’으로, 그와 눈을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이름을 잊지 못했다. 그 눈빛이 정말로 범 같아서였다.

그는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배우가 되었겠다 싶은 얼굴에, 벌써부터 시구 현장이 기대되는 어깨, 달고 다니는 경호원보다 큰 키와 덩치를 자랑했다. 27년 평생 어떻게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살아온 건지 의문일 정도였다.

그토록 젊고 아름다운 황제께오서, 눈이 멀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특이점이 없는 남자를 좋아할 리 만무했다. 무화들에게 있어 하련솔은 문정궁 한 구석에 위치하게 된 나무 한 그루, 딱 그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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