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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5화 (5/135)

5.

하련솔 역시 남들에게 관심 없긴 매한가지였다. 누군가 저를 두고 동정을 하건 무시를 하건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정궁의 내로라하는 무화들은 죄 저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련솔은 누구보다 제 입지를 잘 아는 남자였다. 남은 평생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 확신까지 마친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제 방을 찾아 입궁한 첫날, 멀찍이서 들려오는 대화를 얼핏 훔쳐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여자들은 목소리가 옥구슬 굴러가는 듯했고 남자들은 군대나 갔을까 싶게 어투가 부드러웠다. 그들 모두 황제보다 나이가 어린 듯한데, 하련솔은 내년이면 서른 살이었다. 옛날 옛적에는 열둘, 열세 살 아이도 개화병을 앓으면 곧바로 입궁했더랬다. 무화치고 스물아홉이면 너무 많은 나이였다.

게다가 찢어지게 가난하기까지 해, 하련솔의 통장에 들어온 첫 품위 유지비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지나듯 곧바로 이자를 갚는 데 쓰였다. 그러다 보니 새 옷 한 벌 구매하질 못했다.

양 실장이 보낸 직원들이 반지하 원룸에서 가져다준 짐이 있긴 했다. 문제는 고장이 나 버린 전자기기들을 수리할 돈이 없단 점이었다. 옷가지 또한 침수 피해로 인해 모조리 구정물 냄새가 진하게 밴 상태였다.

그나마 건질 것이라곤 유년기부터 부적처럼 품어 온 애착 인형 하나뿐이었다. 등줄기에 지퍼가 달린 작은 주머니 인형은 깨끗이 빨아 말리고 나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색이 다 빠져 회색이 되고 박음질이 벗겨져 사방이 울룩불룩한 데다 눈알은 두 쪽 모두 탈출 직전인, 지옥에서 온 개구리의 모습이었다.

무화에게 기본 지급되는 흰 티셔츠와 개량 한복 바지 차림새로, 하련솔은 제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익숙한 촉감의 개구리 인형을 주물럭거리며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생각하기로, 자신의 매력 지수는 자그마치 0. …0이었다. 무화가 되었다 한들 대뜸 매력이란 것이 폭발하며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 리 만무했다. 지금부터 그에게 주어진 장래는 뒷방 늙은이가 될 때까지 방치당하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다.

‘꼭 이 자리를 지켜야지!’

주먹을 불끈 쥐며 하련솔은 다짐했다. 어느 못난이에게도 꼴등 무화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노라고. 죽을 때까지 눈먼 환자로서 문정궁 변두리에 처박혀 살 것이라고. 때 되면 밥 나오고, 일을 하지 않아도 생활비가 지급되고, 갑자기 불행 어린 사고를 겪을 일도, 느닷없이 길바닥으로 쫓겨날 걱정도 없이 그저 쥐 죽은 듯 사는 삶. 하련솔은 그런 삶이 좋았다.

보드라운 결이 느껴지는 마루에 그는 등허리를 바짝 붙였다. 두 팔을 길게 뻗어 더듬더듬 만져 본 바닥의 온도는 선선했다. 손등 위로 여름 볕이 닿는 감각이 생생해 솜털마저 춤을 추는 듯한데, 한편으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더듬더듬, 바닥을 기며 팔을 뻗자 폭신한 이불에 손이 닿았다. 손으로 읽어 내린 헤드보드는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침대 프레임은 아주 낮았다. 아마도 전통 한옥으로 지어 낸 궁의 경관을 망치지 않으려는 선택 같았다.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드러누워 사지를 뻗는데, 매트리스가 제법 컸다. 최소한 더블베드 사이즈인 듯했다. 황제가 이곳을 찾아올 일도, 하련솔과 정을 나눌 일도 일어날 리 없건만, 성실한 직원들은 일말의 가능성도 놓치질 않고 2인용 침대를 준 것이었다.

침대 중앙에 대자로 드러누워 하련솔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나 뜨나 깜깜하긴 똑같아서, 눈을 뜨고 있어도 어째 졸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저,

‘행복해….’

행복했다.

‘여긴 천국이야.’

방 안에 누워 햇볕을 쬘 수 있단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푹신하고 따듯한 잠자리가 제 것이라니 감동이 목 위까지 벅차올랐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꼬박꼬박 제시간에, 제 방으로 보내 준다니 개화병 바이러스에 대고 절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황제? 그게 누군지, 어떤 놈인지, 그따위 건 알 바가 아니었다. 황제는 평생 안 만나도 좋았다. 아니, 안 만나야 좋았다. 하련솔은 그의 눈에 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사랑을 받아 병을 고치겠단 욕심 자체가 없었다.

‘적당히 잘 지내서 시력을 되찾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뭐 보너스를 주는 것도 아니고….’

문정궁의 가장 구석진 별채, 조그마한 방까지 걸어오는 내내 들었던 사내 무화들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같은 남자여서 그런 건지 의도는 모르겠으나, 대놓고 하련솔의 키와 다리 길이, 옷차림을 품평했었다. 얼핏 듣기에도 질투와 견제가 심한 듯했다. 그러나 하련솔은 그들만큼 젊고, 튼튼하고, 열기 넘치진 못했다.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고 그들 눈에 들고 싶지 않았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어 좋을 게 없었다.

무화로서 인생이 가장 잘 풀리면 황후가 된다는데, 그게 더 최악이었다. 황후는 세상천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외모부터 성격, 출신, 피부에 난 점 하나까지 품평당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마흔 명의 무화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고, 국가 행사에도 참여해야 하고, 세계적으로 얼굴은 다 팔리지…, 황태자도 낳아 줘야 하지…. 너무나 귀찮고 바쁜 삶이었다. 문정궁에 머무르는 이들 중 누가 황후가 될진 모르나, 하련솔은 그 혹은 그녀를 벌써부터 동정했다.

‘쯧쯧쯧….’

애첩이 되는 것만 해도 그렇다. 어쩌다 황제가 옆구리에 끼고 걷는 사진 한 장이라도 유출되었다간 지옥일 게 뻔했다. 5,100만 명의 한국인이 그의 얼굴이며 몸매, 옷매무새를 하나하나 뜯어다가 평가할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21세기 한국에 인권이라는 걸 갖추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무화였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하련솔은 이불을 끌어다 제 몸을 덮었다. 더운 여름날,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기란 스물아홉 인생에 제일가는 사치였다.

이대로 가늘고 길고 배부르게 60년을 더 살다가, 방구석 백발노인이 되어 따듯한 침대에서 평화롭게 잠들리라… 하련솔은 결심했다.

그의 제1 목표는 제 방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함부로 궁 안을 돌아다니다가 황제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내로라하는 무화들을 죄 버려 두고 잘난 황제가 저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련솔이 염려하는 상황은 그와 반대였다. 제가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던 황제 폐하께서, 어디 가난뱅이에 눈까지 먼 무화가 세금을 축내며 궁에서 살려 하느냐고 역정을 낼까 싶어서였다.

멍청한 척, 아픈 척, 무능한 척을 하며 은둔하기란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땐 참 쉬웠다. 필수적으로 출석해야 하는 자리를 제하고는 외출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저를 빼고도 무화의 수는 마흔이나 되니, 제 빈자리가 눈에 띄지도 않을 거라 생각됐다. 열이 나서 못 간다, 눈이 아파서 못 간다, 다리가 저려서 못 간다…. 나을 길 없는 개화병은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 줄 것이었다.

나흘간, 하련솔은 목표를 훌륭히 지켜 냈다. 그는 제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버텼다.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침대에 드러누워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바닥난 체력을 비축하는, 몹시도 귀하고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밖에 멍한 정신으로 깨어 있는 때에는 두 손을 벽면에 대고 방의 구조를 익히느라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편함일랑 느끼지를 못했다. 하루 세 번 식사를, 한 번은 다과를 들고 찾아오는 시종이 있어서였다.

“솔님, 식혜 드세요. 생과방에서 받아 왔어요!”

제 이름을 초롱이라 소개한 시종은 이십 대 중반으로, 체구가 작고 말과 행동이 빠른 여자였다. 아침이면 보송보송한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내오고, 종일 매 끼니를 챙겨 주며 필요한 순간 손발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창문을 걸어 잠근 뒤 떠났다.

부지런한 초롱은 하련솔에게 있어 목숨 줄과 진배없었다.

“감사합니다.”

제 오른손에 식혜가 든 잔을 쥐어 주고, 왼손에 빨대 끝을 집어 주는 초롱을 향해 하련솔이 인사했다. 꾸벅 고개 숙이는 그의 모습에 초롱은 방싯방싯,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하기는요! 말 편하게 놓으세요! 저는요, 솔님을 모시게 되어서 참 영광이에요.”

“초롱 씨….”

감동받아 두 눈이 그렁그렁해진 채 빨대를 무는 하련솔을 내려다보며 초롱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거짓말에 능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련솔에게 건넨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문정궁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맥 없고 존재감 흐린 그의 시종이 되어, 초롱은 참 좋았다.

오늘 문정궁에서 일하는 시종은 정확히 마흔한 명으로 각 무화마다, 그들이 머무르는 방마다 각각 한 명꼴로 배정되었다. 개중 하련솔이 머무르는 작고 구석진 궁은 그야말로 금광이었다. 오죽하면 제비뽑기를 통해 ‘하련솔’ 세 글자가 쓰인 막대기를 뽑은 초롱에게 ‘나와 바꾸자’는 요청이 일곱 번 들어올 지경이었다.

‘제발 나랑 바꾸자! 얼마면 돼? 내가 바로 입금할게!’

‘초롱아, 그거 오빠 주라. 남자 무화를 네가 어떻게 케어하려고 그래? 이상한 놈이면 어쩌려고!’

‘초롱 씨…. 초롱아…? 초롱이님…!’

똑똑하고 셈이 빠른 고로, 초롱은 제 막대기를 꿋꿋이 지켜 냈다.

조선 시대였더라면, 구석진 방에 머무르는 인기 없는 무화를 모시는 일이 지옥 같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황실의 무화를 상대하자면 사정이 퍽 달라졌다. 인지도 낮고 조용한 무화를 담당한다는 건, 시종으로서 꿀만 빨면 그만이란 의미였다. 다른 무화를 전담한 이들에 비해 일은 적게 하면서 급여는 동일하게 받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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