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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7화 (7/135)

7.

그를 놀라게 한 상대는 도리어, 당황한 하련솔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굴었다. 긴 숨을 내쉬며 하련솔의 흐트러진 얼굴을 닦아 주었고, 딴딴하게 굳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많이 놀랐어요? 난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아니, 전….”

“이 앞으론 돌계단이 있어요. 굴러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조금만 더 잡아 줄게요. 괜찮죠?”

“아… 니. 아니, 저는 그쪽이 제 시종인 줄 알았어요.”

부드러운 말씨로 친절을 속삭이는 상대의 태도는 하련솔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하련솔이 느끼기로는 낯선 상대가 먼저 제 손을 가져가 초롱의 행세를 한 것 같은데, 그의 평화로운 태도는 그 직감이 모두 착각이고 오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종국에 하련솔은 제가 먼저 상대의 팔뚝을 붙들어 쥐었던가, 멋대로 따라 걸어온 게 아닐까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괜찮으니 이리 와요.”

시야가 컴컴한 탓에 상대의 표정조차 살피지 못하고, 하련솔은 비틀거리며 부축을 받았다. 180cm에 아쉽게 못 미치는 키의 하련솔도, 그의 품에 들어가니 미성숙한 크기가 됐다. 커다란 키에 기다란 팔을 가진 남자는 하련솔을 끌어안다시피 했다. 그러더니 왼발, 오른발… 속삭이며 계단을 한 칸 두 칸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련솔은 얌전히 그를 따랐다. 낯선 남자를 믿어서는 아니었다. 당장에 그를 뿌리치고 도망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있던 자리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고, 문정궁 한가운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남아 막연히 초롱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분고분 지시에 따라 발을 움직이자 과연 돌계단에 발이 닿았다.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인데도 한 칸 한 칸을 밟을 때마다 심장이 저릿했다. 발끝이 닿지 않는 순간마다 불안했다. 몸이 절벽 밑으로 훅 꺼지는 듯 착각마저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련솔은 낯선 행인의 팔뚝을 꽉 부여잡았다.

“괜찮아요. 두 칸만 더 내려가면 돼요.”

“…네. 두 칸이요.”

“자, 오른발.”

그의 말대로, 하련솔이 오른발을 내렸다.

“왼발.”

재차 왼발을 더듬더듬 뻗자 발끝이 땅에 닿았다. 안도하며 그는 두 발을 모두 평지에 내렸다. 평평한 흙바닥이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다. 긴 한숨을 내쉬며, 하련솔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위험한 계단을 지났음에도 상대가 저를 놓아주지 않고, 도리어 더욱 친근하게 끌어안다시피 하며 붙어 걷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탓에 하련솔은 그에게 가벼운 질문 하나 건네질 못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소 허탈했다.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유 없이 피식 실소하는 하련솔을 따라, 낯선 남자도 웃음소리를 흘렸다. 소나기 내리는 날 여우가 내는 것처럼 가볍고, 간지러운 소리였다.

이내 하련솔은 상대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이 묘하게 기우뚱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쪽 발이 불편한 듯했다.

‘다리를 다쳤나…? 그런데도 날 도와주는 거야?’

한 발을 절뚝거릴 뿐, 그는 하련솔에 비해 백배 천배 수월하게 움직였다. 하련솔은 금세 그를 편하게 여겼다. 초롱은 저에 비해 너무 작고 여린지라 힘껏 기댈 수 없었는데, 키도 크고 손도 큰 남자가 저를 잡아 주니 안심이 되기는 했다.

타고난 천성이 순한지라 하련솔의 기분은 쉽게 좋아졌다. 낯선 상대의 느닷없는 친절에 화가 나거나 불평을 하기는커녕, 그는 인복 하나 없는 제 인생에 이런 경험이 또 있겠나 생각하며 웃음 지었다.

순순한 맹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키 큰 사내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에요?”

“개화병 검사받으러요. 병원이 있다고 해서 그리로 가려고요.”

“아. 의료원? 조금만 더 가면 금방이네.”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손을 움켜쥐었다. 부드럽게 끌어주는 힘에 따라, 하련솔도 그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함께 걷는 내내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눈길은 하련솔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긴커녕 표정조차 확인하지 못하고서, 하련솔이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하련솔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이름이 솔이에요?”

“네. 소나무란 뜻이래요.”

“잘 어울리네.”

대화는 그것으로 뚝 끊겼다. 제 이름은 알려 주질 않는 사내의 태도에 당황해 하련솔은 의미 없이 눈을 굴렸다. 그러나 그가 구태여 통성명을 요청하는 것보다, 의료원 건물 앞에 도착하기가 더 빨랐다. 큰 손이 재차 하련솔의 어깨를 붙들어 멈추어 세웠다. 그러곤 천천히 대각선 방향으로 끌어 주었다.

“다 왔어요. 문턱으로 올라가는 계단 있으니까 조심해요. 딱 세 칸만 올라가면 돼요.”

“아, 네.”

“신발 벗고요.”

“네.”

사내의 지시에 따라, 하련솔은 신을 벗고 실내로 들어섰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코끝으로 먼저 느꼈다. 병원 특유의 새벽 냄새와 약재 냄새가 밀려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내가 있는 방향을 추측하며 하련솔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의사의 목소리를 좇아 진료실로 들어섰다.

하련솔이 사라진 뒤에도 키 큰 남자는 의료원 건물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동백나무가 내다보이는 쪽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제 왼쪽 다리를 두들기며 시간을 보냈다. 창호지가 발린 문 너머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영양 부족이시네요? 약을 좀 드리긴 할 텐데요, 개화병의 차도는 기대하지 마세요. 안경도 못 맞출 수준이라서 안과 관련해서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타인의 진료를 훔쳐 들으며,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문틈 사이로 낮은 스툴에 앉은 하련솔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 든 의사가 있는 방향에 귀를 대고 앉아, 그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해….”

사내가 홀로 중얼거렸다.

마흔한 번째 무화는 색이 없는 남자라고 했다. 인상이 흐릿하고 이목구비에는 아무런 특징이 없다고도 했다. 잊기 쉬운 얼굴에 별 볼 일 없는 몸을 가졌다고도 했다. 그런데 사내가 보기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은 시무룩한 하련솔은 빛나는 얼굴을 갖고 있었다. 인상은 선하고 곱디고왔고 이목구비는 재단하며 지어 놓은 듯 반듯했다. 커다란 눈망울은 빛이 들지 않는 게 아쉬울 만큼 예쁜 갈색이었고, 특히나 하관이 갸름하고 보기 좋았다.

황제가 보았더라면 한눈에 그를 마음에 담고도 남을 터였다. 저 예쁜 턱을 한 손에 움켜쥐고, 순순하니 좋은 목소리를 흘려보내는 입술에 입을 맞댄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리어 하련솔은 선물이었다. 마흔 명의, 유달리 특별할 것 없고 즐길 것 없는 한심한 무화들 사이에 떨어진, 황제를 위한 진정한 선물.

“흠….”

사내는 제 큰 손을 펼쳤다가 주먹으로 뭉치길 반복했다. 돌계단 앞에서 일부러 붙들어 쥐었을 때, 힘껏 수축하던 하련솔의 허리가 아직 제 손안에,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머리칼에서 풍기던 냄새조차 맡기 좋았고, 몸의 살결은 부드러웠다.

눈살을 좁히며 사내는 분합문을 흘겨보았다. 마침 작은 종이 가방을 품에 안은 하련솔이 걸어 나오는 참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는 그 옆으로 다가가 섰다.

‘거처가 어디쯤이더라? 확인 좀 해 봐야겠네. 폐하의 침전과 얼마나 가까운지….’

재차 불쑥 손을 뻗어 어깨를 쥐어도, 하련솔은 놀라기만 할 뿐 화를 내진 않았다. 잠깐 사이 익숙해졌는지, 손의 주인을 알아보는 듯 고개를 높이 들어 보였다.

“놀랐어요? 나인데.”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하련솔이 입을 벌렸다. 입술 새로 흰 앞니 두 개가 살짝 엿보였다.

“아, 아직 안 가셨어요?”

“응. 형 바래다주려고요.”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자리한 굳은살을 손끝으로 느끼며, 그와 함께 느릿느릿 걸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 걸어가던 끝에, 사내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련솔도 그를 따라 두 발을 멈춰 세웠다. 문정궁의 가장 끄트머리, ‘개구멍’이란 별명을 지닌 조그마한 독채 앞에서,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안심했다. 황제의 침전이 보이기는커녕 근방에는 오가는 길고양이 한 마리 없었다.

“자, 다 왔어요.”

한결 기분이 좋아져 사내가 웃었다. 하련솔의 손을 잡아다가 문고리에 대 주기까지 했다. 안심한 듯 하련솔도 그를 따라 웃었다. 웃는 얼굴에서 빛이 났다.

“감사합니다. 저, 이름 좀 알려 주세요.”

하련솔이 물었다. 사내는 제 허리춤에 두 손을 대고 등을 곧게 폈다. 찌뿌듯한 허리를 길게 늘이며, 그가 말했다.

“말 놔도 돼요, 형. 스물아홉 살이라면서요? 나는 혁이라고 해요. 스물여섯. 편하게 불러요.”

“아. 알았어, 혁아….”

멋쩍은 듯 제 뺨을 긁으며 하련솔이 대답했다. 그 귀여운 태도를 담는 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웃는 낯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그는 밝은 목소리를 작위적으로 냈다.

“또 봐요. 조심해서 다니고요.”

“그래. 정말 고마워.”

휙 등을 돌리며 사내는 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멀리 빠져나가는 기척을 들려주자, 어깨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픽 실소하며, 사내는 황제의 침전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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