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홀로 남은 뒤에야 하련솔은 완전히 편안해졌다. 기다란 숨을 내쉬며 쪽마루에 조심스럽게 몸을 앉혔다.
“솔님!”
이내 반가운 목소리가 벌컥 들려왔다. 초롱이 내지르는 물기 어린 외침이었다.
“솔님, 얼마나… 제가, 헉…. 찾으러 다녔, 는데, 헉…. 어떻게 된 거예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하련솔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울먹이는 초롱을 달래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에 손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하련솔이 말했다.
“잘 다녀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길을 잃어버려서, 혁이라는 남자가 도와줬어.”
“혁이? 무슨 혁이요?”
“어…. 성까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이차혁님이요? 무화 이차혁…?”
초롱의 떨리는 목소리에 하련솔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두른 얇은 두루마기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면 돌계단을 내려갈 즈음 붙들었던 옷의 감촉이, 제 두루마기와 흡사했던 것 같았다.
“응. 그런 거 같은데….”
뒤이어 초롱은 상대의 키와 목소리, 생김새를 코치코치 캐물었다. 하련솔은 키는 저보다 훨씬 컸고, 목소리는 마치 성우 같았다고 설명했다. 얼굴의 생김새까지는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초롱은 ‘아고’, ‘아고’ 소리치며 괜한 질문을 해 죄송하다고 말해 왔다.
그러곤 신이 난 듯 기운찬 목소리를 냈다.
“정말 잘됐네요. 혁님께서 도와주셨다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하세요! 그분은 황제께서 가장 자주 찾는 무화예요. 황후가 될 확률이 제일 높은 분이세요!”
“…뭐?”
듣던 중 황당한 소리에 하련솔의 눈이 커졌다. 제 귀를 의심하며, 그는 느릿느릿 되물었다.
“황제가 왜 남자를 찾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초롱이 한숨 섞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남색을 하세요.”
“남색?”
“동성애자라고요.”
“…동성애자?”
“게이라고요, 게이.”
하련솔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제가 남색을 하건 빨간색을 하건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동성을 사랑하건 이성을 사랑하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총애를 받는 상대와 제가 연루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납작 엎드려 살겠다고 나흘을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 왔건만, 첫 번째 외출에서부터 가장 예쁨받는 무화와 엮이다니…. 하련솔은 미간을 찡그렸다.
‘나중에 자기들 사이 틀어졌다고 이거… 나한테 불똥 튀기진 않겠지?’
그러다가도 피부가 평평해졌다.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어차피 그 남자도 금방 나를 잊을걸.’
단숨에 무표정해진 하련솔을 향해, 초롱은 센 콧김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두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몇 초간, 초롱은 하련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성실히 무화를 모시며, 좋은 시종으로 친구가 되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건만, 왜 조금 전 당황한 순간에는 이 남자의 얼굴조차 기억하질 못했을까?
의문의 씨앗은 아주 작게 자리 잡았다.
***
해시계가 그늘로 덮여 버린 늦은 저녁, 하련솔은 격식에 맞추어 한복을 차려입었다. 밝은색 저고리에 부드러운 바지를 입었고, 발목은 행전 리본 끈을 꼼꼼히 묶어 조였다. 도포는 소맷자락이 넓어 흰 손등을 다 뒤덮는데, 기다란 조끼 형태의 전복은 연녹색이라 흰 눈 위에 여린 나뭇잎을 얹은 듯했다. 분홍 끈으로 이루어진 세조대까지 허리에 둘러 매듭짓자, 초롱이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옷이 참 고와요, 솔님. 이 정도면 황제께서도 솔님을 기억하….”
웃는 낯으로 읊던 말이 흐지부지 끊겼다. 하련솔은 쓴웃음을 지으며 제 몸을 감싼 옷의 낯선 감촉을 느꼈다. 예쁜 옷을 입은들 황제께서 저를 기억하겠는가. 발가벗고 대머리를 깎으며 춤을 추지 않는 이상에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성싶었다.
“초롱아. 나 손수건 하나만 줄래?”
황제의 침궁으로 향하기 직전, 하련솔이 말했다. 초롱은 선뜻 제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련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줄게.”
그러곤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오늘은 그가 입궁한 지 딱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황실 법도에 따라 어떤 무화이건 황제를 마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하련솔에게 주어진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하필이면 황제 폐하께서 많고 많은 무화들 가운데,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마흔한 번째 무화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신 것이었다.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서 하련솔은 뒤뚱뒤뚱 걸었다. 오전 내내 흥분한 초롱의 요청에 따라, 황제의 침전까지 걸어가는 길을 몇 번이나 왕복했는지 몰랐다. 개화병을 앓게 된 이후 하련솔은 체력이 좋지 못했다. 한 시간 조금 못 미치게 걸었을 뿐인데, 다리가 붓고 발바닥이 퉁퉁해지고야 말았다.
초롱은 제 잘못된 열의를 사죄했지만, 하련솔의 기분은 제법 괜찮았다. 덕분에 눈이 보이는 사람인 양 저벅저벅 걸어, 혼자 힘으로도 침전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잘하고 계세요, 솔님…!”
가로수 뒤에 살금살금 붙어 쫓아오는 초롱의 응원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어차피 따라올 거면서 훈련은 왜 시킨 거야?”
“법도가 그런 걸 어떡해요.”
초롱이 아주 작게 구시렁거렸다. 그녀 말마따나, 법도에 따라 모든 무화는 제힘으로 황제를 찾아갈 수 있어야 했다. 그때마다, 도의에 따라 황제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어야 했다. 그조차도 하련솔에게는 불필요하고 성가신 법도였다. 무화가 지닌 최소한의 인권과 권리를 지켜 주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나, 하련솔에게 필요한 것은 인권이나 권리가 아니었다. 당장 그가 원하는 건 흥미로운 추리 소설의 오디오 북이었고, 달콤한 호박식혜 한 잔이었으며 홀로 누워 데굴데굴 구를 수 있는 소중한 제 침대였다.
콧김을 흥 내쉬며, 하련솔은 기다란 소매 안에 감추었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손수건에 제 하관을 대고, 점차 걸음을 늦추었다. 등 뒤에서 ‘어어’ 하는 초롱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콜록!”
하련솔이 기침했다. 아마도 침전의 문 앞을 지키고 있을, 호위 실장 들으라는 양 큰 소리였다.
“어, 흠. 콜록, 콜록…!”
호위 실장이 어디쯤 서 있을지 몰라, 하련솔은 최대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전방위로 기침했다. 컥, 컥… 목 막힌 소리를 내 주기도 잊지 않았다. 이내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린 더운 침을 입 안에 모았다.
“캬아아아악….”
그러곤 바닥에 대고 퉤 뱉는 시늉했다. 그제야 제 앞에서 저벅,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호위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콜록콜록! 하련솔은 더욱 크게 기침했다. 중도에는 정말로 헛숨을 잘못 들이켜는 바람에 목구멍이 다 아팠다. 커흐억! 켁켁! 어깨를 떨며 비틀거리는 그 앞으로 호위 실장이 바짝 다가왔다. 하련솔의 기침이 격해질수록 그의 표정은 돌처럼 단단해졌다. 나중에는 대놓고 찡그리기까지 했다.
보다 못해, 그가 먼저 무화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듣던 중 반가운 참견에 하련솔은 인상을 퍽 찌푸렸다. 한참 기침을 해 댄 탓에 그의 이마는 새빨갛게 익은 채였다.
“아…. 제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요. 근데, 컥…! 콜록! 켁! 괜찮아요, 열도 조금밖에 안 나요.”
가래 끓는 소리를 거듭 흘리며, 하련솔은 삐져나온 침을 손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뻔뻔스럽게 손수건을 허공에 대고 털자, 호위 실장이 질겁하며 제 두 발을 뒤로 물렸다.
“잠시 멈추십시오. 열을 좀 재 봐야 하겠습니다.”
호위의 말에 하련솔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침이야 얼마든지 가짜로 흉내 낼 수 있었지만, 말짱한 머리를 당장 뜨겁게 데워 올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공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하련솔이 뻔뻔하게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크흠! 전 괜찮습니다! 폐하를 뵈러 들어갈 겁니다!”
그에 호위 실장이 실소했다. 약간의 경멸이 담긴 실소였다.
“누가 당신을 걱정한답니까? 혹시 감기라도 걸리신 거면, 폐하께 병을 옮길 수도 있는 일 아니냐 이 말입니다.”
“아…. 근데요, 아저씨.”
“…….”
“저, 폐하한테 안기러 온 거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저더러 오라고 그랬대요. 이번 기회에 저, 병도 고쳐야 하고, 좀 외롭기도 하고…. 켁! 우허억! 콜록, 콜록! 어떻게, 컥…, 안 될까요? 콜록!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그러면서 하련솔이 막무가내로 발을 뻗자, 호위 실장이 식겁하며 그를 가로막았다. 그의 단단한 팔에 몸이 턱 하니 가로막혀, 하련솔은 일부러 크게 한숨 쉬었다. 그러곤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며 몇 번이고 보았던 진상 취객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아, 이거 왜 이래애? 들여보내 주세요!”
고집스럽게 그가 외쳤고,
“절대 안 됩니다. 돌아가십시오.”
호위 실장이 곧바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곤 휙 180도를 돌려, 왔던 길로 향하게끔 등까지 떠밀어 주었다.
“아아….”
하련솔은 두어 차례 다시금 뒤로 돌아, 침전에 들어가려는 척 시늉했다.
“에이, 멋진 아저씨! 그냥! 들여보내! 주세요! 네에? 눈 따악 감고! 한 번만!”
호위 실장은 그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듯, 소란 피우지 말고 제발 돌아가 달라며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혹시 술에 취하신 거냐는 질문도 다섯 번을 반복했다. 결국 하련솔은 마지못해 떠나는 척,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터덜터덜 돌아섰다.
소박맞은 양 시무룩하니 고개 숙인 채 그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