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길을 잃으신 모양인데, 저기! 저쪽으로 가시면 큰길이에요. 여긴 사람도 안 다니고 볼 것도 없습니다.”
“아닌데? 볼 거 많아.”
대답이 불쑥 돌아오매 하련솔의 눈이 흔들거렸다. 초롱이 해 준 말에 따르면 이 건물은 문정궁에서 가장 초라한 별채여서, 마흔한 번째 무화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창고로나 쓰였을 거라 했다. 헌데 낯선 불청객은 무척 즐겁다는 듯 하련솔의 근방을 이리저리 오가며, 연신 감탄사를 흘려 댔다.
“…….”
혼미한 와중에 하련솔은 그의 기척을 쫓아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부지불식간에 그 기척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제가 귀신과 대화하는 중인가 싶어, 하련솔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검은 사내는 그 얼굴을 빤히 감상했다. 하련솔이 목을 뻗을 때마다 얼굴의 각도가 변했는데, 모든 각도의 모든 모습이 예뻤다. 속눈썹의 그림자가 광대에 걸렸다가, 콧잔등을 가로지르며 길어지는 모습이 몹시 신기하고 어여뻤다.
“너.”
또 한 번 불쑥, 사내가 말했다.
“이름이 뭐지?”
이번에 하련솔은 놀라 나자빠지지 않았다. 두 발을 콕, 흙바닥 위에 처박았을 뿐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썹에 힘을 주기도 잠시, 그가 대답했다.
“하련솔입니다.”
이름이 무어냐 묻는다면 알려 줄 말은 그뿐이었다. 무화로서 그에게는 과거가 없었다. 지난날의 이름은 다 잊어야 했다. 기억 또한 묻어야 했다. 그는 이제 하련솔이었다. 지조 높은 소나무처럼 굳게 자리를 보전하면 그만인, 변두리의 무화 하련솔.
“무슨 이름이 그래?”
낮은 목소리를 반 톤 정도 끌어 올리며. 사내가 비웃음 소리를 냈다. 하련솔이 인상을 퍽 찌푸렸다.
“근데 왜 자꾸 반말이시죠? 댁은 몇 살이신데요.”
“몇 살처럼 보이는데?”
“저야 모르죠…. 안 보이거든요.”
시커먼 눈동자를 굴리며 하련솔이 대답했다. 눈앞은 온통 컴컴하기만 한데 깊고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검은 동굴 안에 든 기분이었다. 아주 커다란 짐승의 아가리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냐.”
낯선 목소리가 하련솔의 신경을 일깨웠다.
“잘 봐. 이렇게나 가까이 있잖아. 자세히 보면 보일걸.”
그 소리에 하련솔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꾹 닫혔던 입술이 아주 약간 벌어지고, 눈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코끝이 움찔거렸다.
“더….”
눈을 연거푸 깜빡거릴 때마다 시야에 희뿌연 얼룩 같은 것이 생겼다.
“더 자세히 봐.”
하련솔은 눈썹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는 흰 얼룩이 무언지 알아차렸다. 그건 제 눈앞에 아주 가까이 달라붙은 타인의 흰자위였다.
“헉…!”
화들짝 놀라, 하련솔은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내지른 주먹은 곧바로 상대의 손아귀에 쏙 들어갔다. 얼어붙은 이의 주먹을 붙잡고서, 그가 가볍게 힘을 주자 그네에 앉은 하련솔의 몸이 그를 향해 빨려 들어가듯 당겨졌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하련솔은 두 눈을 꽉 지르감았다. 정신이 온통 혼미하고 눈앞으로 빨간빛 같은 것이 튀었다. 다시 눈을 뜨자 희뿌연 빛이 번지는 게 보였다. 그 가운데에 선 사내의 인영이 검은 그림자처럼 덩어리졌다. 무리해 힘을 준 탓인지 눈이 시렸다. 눈물이 울컥 삐져나왔다.
잡히지 않은 손을 움직여, 하련솔은 생리적으로 흘린 눈물을 훔쳤다. 이내 사내가 그의 주먹을 놓아 주었다. 대신에 그는 하련솔의 얼굴을 덥석 쥐었다.
조그맣고 예쁜 턱이 그의 큰 손에 잡히고, 아름다운 얼굴이 번쩍 위로 들렸다. 길게 뻗은 하얀 목을 타고 덜 닦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몇 살?”
사내가 물었다.
하련솔은 제 눈앞에 실제로 놓인 것인지 혹은 환영인지 모를 이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어두운 숲 같은 속눈썹에 에워싸인, 검은 눈동자가 얼핏 육식 동물 같다.
“스물아홉 살… 이요.”
이내 크고 거친 손이 하련솔의 뺨에 닿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을 손금으로 닦아 주는가 싶더니, 이내 잡았던 턱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런 외진 곳에서 혼자 지내면 심심하지 않아?”
“아뇨…. 혼자 있는 건 익숙해요. 사람 많으면 오히려 그게 피곤하지.”
“그래, 그건 그렇지.”
그의 질문에 호락호락 대답하고, 그의 행동에 순순히 이끌리고 있자니 하련솔은 제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제가 아니라, 눈앞에 선 알쏭달쏭한 불청객이었다.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돼요?”
하련솔이 물었다.
“…….”
그러자 짙은 침묵이 닥쳐왔다.
한참을 가만히 머무르던 끝에, 그가 큰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어….”
하련솔이 애매하게 탄식했다. 상대에 대해 하련솔이 아는 사실이라고는 키가 아주 크다는 것, 힘이 몹시 강하다는 것, 그리고 목소리가 무척 낮고 무섭다는 것뿐이었다.
혹여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챌 법한 유명인인가 싶어,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제가 연예인은 잘 몰라요. 영화도 본 게 없어서요. …혹시 배우인가요?”
“하….”
“아니면 가수? …뮤지컬 배우? …유명한 성우?”
“지금 스무고개 하냐?”
눈이 멀어 버린 뒤 하련솔에겐 나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상대의 표정을 알 수 없게 되고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게 된 탓에, 제 표정 역시 아무렇게나 지어 보이는 식이었다. 낯선 손님이 내놓은 핀잔에 하련솔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자 사내가 콧소리를 흘렸다. 마음이 변했다는 듯,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황제의 친척이야.”
“친척이요?”
“그래, 아주 먼 방계 친척.”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말한다고 네가 알아?”
‘황족들은 다 이렇게 싸가지가 없나?’
하련솔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최선을 다해 그를 노려보려 애썼지만, 거듭 눈이 시렸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 숙이자 눈물방울이 후둑후둑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훌쩍임 없이 눈물만 쏟아 내는 하련솔의 어깨를 낯선 사내가 도닥거렸다.
“나찰사.”
그러곤 저를 소개했다. 나찰사羅刹娑는 기실 불교 용어였다. 본래 악귀였던 것이 갱생한, 호법신의 이름이었다.
불교는커녕 어느 종교에도 관심이 없는 하련솔은 그저 그렇구나 하며 고개 끄덕일 따름이었다. 황실 사람들의 이름이야, 오늘날 ‘하련솔’을 포함하여 죄 특이했으니 남의 이름이 나찰사이건 너찰사이건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황제의 방계 친척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하련솔은 한 겹 경계심을 벗었다.
“밀어 줄까.”
사내가 물었다.
“네?”
“그네 말이야.”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곤 더는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희뿌옇게 보이는 타인의 인영이 부담스러워, 하련솔은 슬금슬금 두 발을 땅에 박았다. 그네가 흔들리지 않게끔 자세를 고정하고 나니 더는 즐겁지가 않았다.
‘내 약과….’
고개 숙여,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보자기를 더듬더듬 수습했다. 흙이 붙어 더러워진 귀한 과자를 보자기 안에 집어넣어 챙기면서 마음으론 피눈물이 나는 듯했다. 반절도 채 먹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이렇게 버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개는 물에 헹구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황제의 친척과 친분을 쌓는 일보다도 오늘의 식사가 더 중요한 하련솔이었다. 찌뿌듯한 허리를 펴며 그는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록…. 크흠….”
그러곤 작위적인 기침 소리를 냈다.
“바람이 차가워지네요. 그럼 전… 이만…. 잘 구경하시고 가세요, 네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을 손짓한 뒤, 하련솔은 재빨리 움직였다. 나찰사가 잡을 새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조그마한 문을 통과해 방 안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작은 건물 안에서 시종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져 구르기라도 하셨느냐며 염려하는 목소리에, 하련솔이 무어라 중얼중얼 대꾸하는 것도 같았다.
좁은 뜰에 홀로 남아, 나찰사는 흔들리는 그네 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위를 휘 둘러보아도 변두리 별채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
“뭘 구경하라는 거야?”
말라빠진 소나무 한 그루가 덜렁 심겨 있는 흙바닥 정원에 남아, 그는 허탈한 듯 웃음 지었다. 그야말로 초라하고 오가는 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래도록 이곳을 은신처 삼아 왔다. 느닷없는 불청객에게 자리를 빼앗긴 쪽은 도리어 그였다.
황당하매 실소하며 나찰사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어여쁜 이를 본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볼품없는 뜰을 빠져나가는 내내, 홍조는 그의 두 뺨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