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흙 묻은 약과를 초롱에게 압수당한 직후, 하련솔의 별채로 의사가 찾아왔다. ‘나찰사가 보내셨다’는 말과 함께, 그는 하련솔의 손에 안약 한 병을 쥐여 주었다.
“눈에 짜 넣고서 한숨 푹 주무십시오. 그럼 증세가 한결 가라앉을 겁니다.”
한바탕 눈물을 쏟은 통에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하련솔은 의아했다.
“전엔 개화병은 치료 방법이 없다면서요? 의료원에 가도 아무것도 해 주실 게 없다고….”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아무튼 푹 쉬세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다는 양 의사는 부랴부랴 짐 가방을 챙겼다. 벌떡 일어나 별채를 떠나는 그를 붙잡으려다가, 하련솔은 활짝 열린 문틈으로 쏟아진 햇볕 탓에 또 한 번 눈물을 콸콸 쏟아야만 했다.
‘이것도 개화병 부작용인가?’
얼얼한 두 눈 위에 손바닥을 올려 두고, 그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긴긴 한숨을 내쉬며 눈물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의사의 말대로 안약을 꺼냈다. 고무 튜브를 슬쩍 눌러 속에 든 약을 두 눈에 짜 넣은 뒤 곧바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생겼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빛 번짐이 확연히 줄어든 것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내다보아도 눈이 시리지 않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호전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색으로 시커멓던 시야에, 하늘의 빛깔과 땅의 녹음이 들어온 것이었다.
고개를 들고 하련솔은 별채 처마를 살폈다. 처마 위에 놓인 새하얀 덩어리 네 개가 보였다. 게슴츠레 눈을 좁혀도 그 형태가 선명해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간에 뱁새 네 마리가 쪼르르 줄을 지어 앉아 있음을 추측할 순 있었다.
“와….”
난생처음 눈을 뜬 사람처럼 하련솔은 감탄했다.
“와…, 우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며 여태껏 손끝으로만 더듬어 온 방을 둘러보기도 잊지 않았다. 희미한 형상들을 좇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그는 만족감에 젖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풀썩, 흔들리는 매트리스 위에 파묻히자 온 시야가 시트의 빛깔대로 하얘졌다.
‘뭐야, 나찰사. 되게 좋은 사람이었네. 이게 권력의 힘인가?’
홀로 헤실헤실 미소 짓길 한참, 베갯머리에 떨어진 안약 병을 얼른 챙겨 들었다. 소중하게 두 손으로 쥐고 덩실덩실 흔들어 대다가,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싶어 얼른 제 두루마기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주 희미하게 색을 분간하는 수준이래도 좋았다. 다시 만난 색깔은 하련솔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밋밋하고 평평하던 흑백 세상에, 색이 입혀지고 등이 켜진 듯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찌나 간사한지 몰랐다. 평생 골방에 틀어박혀 늙어 죽어도 맹인이 좋다던 그인데, 색깔이 보이기 시작하자 어린아이처럼 웃음이 났다. 대뜸 찾아온 나찰사라는 불청객이 무섭고 부담스럽던 것도 전부 잊어버렸다. 그로 하여금 득을 보게 되니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살피고 싶어졌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어졌다.
‘또 놀러 오면 좋겠다!’
뺨이 동그래지도록 활짝 웃으며, 하련솔은 제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서까래의 무늬를 별처럼 바라보는 순간에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했다.
무화로서 제 운명이, 평생 소원인 무던한 삶의 궤도에서 천천히 이탈 중이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
개화병을 앓게 된 뒤로 하련솔의 일상은 구석구석 작은 부분까지 성가시고 번거로워졌다. 미열, 감기, 몸살 기운이 밥 먹듯이 찾아드는 부작용이며, 체력 저하에 따른 운동 부족과 운동 부족으로 인한 체력 저하의 악순환도 그러했지만, 가장 불편한 건 단연 시력 저하였다. 늦은 낮잠으로 오후를 꼼꼼하게 채운 탓에 깨어난 새벽, 시간을 알 수 없는 때마저도 그랬다. 네다섯 시쯤 되었으면 다시 눈을 붙일 테고, 예닐곱 시 즈음이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싶은데 시계를 볼 수가 없는 것부터 문제였다. 결국 하련솔은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붙인 채 꾸벅꾸벅 졸기를 택했다. 잠이 오면 다시 눕고, 마저 달아나면 일어날 생각이었다.
헌데 뜻밖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흐린 눈을 끔벅이며 하련솔은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러곤 창이 놓인 위치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빛이 보이지 않고 그저 껌껌하기만 한 것을 보면 초롱이 출근할 시간은 아닌데,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살금살금 아주 느리게 다가온 소리는 하련솔의 침실, 창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하련솔은 뜰에 정지한 타인의 흐름을 귀로 듣고자 했다. 아주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얇은 옷가지가 서로 쓸리는 인기척도 있었다.
누군가 저를 찾아왔음을 직감하고, 하련솔은 침대에서 허리를 일으켰다. 두 손으로 얼굴을 비벼 눈곱을 떼어 내며 다가간 창문은 꼼꼼히 잠겨 있었다. 초롱의 철저한 방범 의식에 감탄하며, 하련솔은 잠금쇠를 더듬더듬 풀어 냈다. 그리고 창문을 밀어 열었다. 그와 동시에 ‘퉁’ 소리를 내며 오른쪽 창문이 바깥의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
당황한 하련솔은 의미 없는 소리를 냈다. 반동으로 재차 닫히려던 창문을 움켜쥐고, 다시금 느릿하게 밀자 이번에는 걸리는 장애물이 없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희미한 시야 안에, 아주 검고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시력이 전해 온 둔한 정보값에 비해 느껴지는 인기척은 무척 뚜렷했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또 오신 거예요?”
반가운 마음이 묻은 목소리였다. 멀쩡한 손님이라면 오지 않을 시각, 드넓은 문정궁의 개구멍이라 불리는 변두리 별채로 하련솔을 찾아올 이는 거의 없었다. 잠결에 그가 떠올리기론 나찰사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남자뿐이었다.
하련솔의 코앞에서 누군가가 좌우로 서성거렸다. ‘그림자 덩어리’란 이름에 가까운 인영이었다. 이내 덩어리 형체가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 앞에서 하련솔은 편편했다. 창틀에 양 팔꿈치를 붙이며 팔짱을 껴 보이곤,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누군가라도 저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였다.
얼굴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상대가 무척 가까이에서 말해 왔다.
“혹시… 날 기다렸어요?”
그 음성에 하련솔의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나찰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뭇거리며 다가온 상대의 목소리엔 동굴 안에서 들리는 듯하던 울림이 없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낮지도 않았다. 대신에 말씨가 부드럽고 발음이 또박또박했다.
“…….”
당혹감에 하련솔은 바짝 얼어 버렸다. 작은 얼굴을 채웠던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그 앞에 바짝 붙어 선 상대가 ‘아’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흘렸다. 잠시간 두 남자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련솔이 여덟 번째 눈을 깜빡일 때에서야, 상대가 제 정체를 밝혔다.
“저예요, 혁이.”
혁이… 하는 이름 끝에 웃음소리가 섞였다.
“형이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그의 정체도, 방문 사유도 하련솔을 당황케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는 이차혁이 저를 찾아왔다는 게 별났다. 하필이면 야심한 밤과 이른 아침 사이의 어드매에 제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하련솔이라는 이름을 받은 지금도, 한솔이라는 이름으로 살던 과거에도 그는 쉽게 잊히는 남자였다. 누구와 특별한 인연을 쌓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누구의 기억에 남지조차 못했다. 하련솔은 제 주제를 잘 이해하고, 납득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느닷없는 친절로 통성명을 하고, 새벽녘에 제 생각이 나 절 찾아왔다는 이차혁의 존재는 뜬구름 같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안 까먹고 기억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아리송한 기분에 잠겨 하련솔이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이차혁은 홀로 생각을 정리한 듯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확실히 전보다는 좋아지신 것 같네요. 안색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그에 하련솔이 눈을 굴렸다. 희미하게나마 이차혁의 형태를 확인하고, 얼굴을 마주 보았으니 제 시력이 호전되었음을 눈치채는 게 당연했다. 개구멍 별채는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유달리 높은 편이라, 뜰에 선 이차혁보다 방 안 창문에 기대어 앉은 하련솔의 정수리가 더 높이 위치했다. 완전한 맹인이라면 정확히 상대의 얼굴을 찾아 그를 내려다보지 못했을 터였다.
혹여 오해를 얻을까 싶어 하련솔이 얼른 입을 열었다.
“의사가, 안약…. 안약을 주고 갔거든요.”
그러곤 제 잠옷 상의를 더듬거렸다. 친히 왕진해 온 의사에게 받은 소중한 안약이 그의 잠옷 속주머니에서 고운 모습을 드러냈다. 하련솔이 작은 약병을 꺼내어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이차혁이 한쪽 손을 들더니 하련솔의 귓가에 대고 흔들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하련솔의 고개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일렁거리는 손을 어리둥절하니 바라보며, 하련솔이 말했다.
“이 약 쓰고서 개화병 증세가 좀 나아졌어요. 혁이 씨…, 아니, 혁님도….”
“말 놔요, 형. 나 스물여섯이래도.”
“…….”
그러면서 이차혁이 안약을 집어 갔다. 그가 약병을 구경하게끔 하련솔은 손을 놓고 기다렸다. 작은 약병을 쥐고 흔드는 소리가 찰랑찰랑 귀를 간질였다. 상대의 표정을 살피지 못해 답답한 기분으로, 하련솔은 콧김을 세게 내쉬었다.
“혁이… 너도 의사한테 물어봐. 내 안약도 만들어 줬으니까, 혹시 모르잖아.”
“내 어디가 어떻게 아픈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이차혁이 농담하듯 되물은 말에,
“다리.”
하련솔은 즉답했다. 그러자 대뜸 사방이 고요해졌다. 코앞의 인영이 미동도 없이 굳는 것을 느끼며, 하련솔은 떨떠름하니 말을 이었다.
“…아니야? 걷는 게 조금 불편한 것 같던데.”
“맞아요.”
그제야 이차혁이 대꾸했다.
“그런데, 난 약 같은 건 필요 없어서요.”
“아. 그렇지, 참….”
하련솔의 얼굴에 멋쩍은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