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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2화 (12/135)

12.

이차혁이야 황제의 총애를 받는 무화이니 황제의 곁에서 자연히 개화병을 덜어 낼 터였다. 초롱이 들려준 부가 설명에 의하면 이차혁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은 아름다운 남자라 했다. 그를 짝사랑하는 시종들도 많았고, 일부 무화까지도 진지한 감정을 내비친다고도 했다. 무화 간에 스캔들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그를 주인공으로 할 것이란 몹쓸 소문까지 돌았다. 그야말로 문정궁의 아이돌이었다. 그런 이에게 몹쓸 동질감을 느껴 의사에게서 받은 안약 따위를 자랑하다니…. 하련솔은 대번에 무안해졌다.

“아무튼… 그래. 내 말은, 서로 건강해지면 좋잖아.”

그렇게 둘러대며 피력한 것은 저에게는 황제가 필요 없다는 사실이었다. 안약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고, 이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무화 간의 경쟁에서 발을 빼고자 했다.

하련솔의 기대와 달리, 이차혁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 주질 않았다. 돌아오는 대답조차 없었다. 컴컴한 고요 속에 하련솔은 목이 말랐다.

제 손에 들린 작은 약병을 바라보며 한참 침묵한 끝에, 이차혁이 말했다.

“다른 무화들에겐 비밀로 해요.”

“어…, 왜?”

“혼란이 생길 거예요. 약으로 낫는 무화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요. 다들 엄청나게 질투하지 않겠어요? 왜 나는 안 되는 거냐, 하면서.”

“헉….”

생각지 못한 지적에 하련솔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황제의 애정을 받고자 서로 간에 어깨를 밀쳐 대는, 감정의 소모전에 휩쓸리지 않고자 내보인 안약이었다. 한데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니 섬뜩했다. 듣고 보니 타당한 말 같기에 더더욱 무서웠다.

하련솔은 제 이마를 턱 소리 나게 짚었다. 그러곤 오만상을 구기며 한탄했다.

“그러네, 그렇겠다…. 전혀 생각 못 했어. 나 큰일 날 뻔했네.”

이차혁이 그 모습을 잠시간 구경했다. 웃음기를 죽이려 노력하며, 그는 목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네, 형. 그러니까 이 약은 비밀로 해요. 그리고….”

이내 덥석, 이차혁이 하련솔의 손을 잡았다. 낯선 손이 제 손을 아무렇게나 끌어가 주물럭거리도록 하련솔은 내버려 두었다. 이차혁은 그의 손바닥 위에 약병을 얹어 주고는, 다섯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먹을 쥐게 했다.

제 큰 손으로 하련솔의 주먹을 끌어안듯이 움켜쥐고서, 이차혁이 속삭였다.

“…중요한 것일수록 다른 사람한테 덥석 줘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하하….”

하련솔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웃음만 흘리는데, 이차혁은 분주했다. 그는 창문 앞 바닥에 내려놓았던 종이 가방을 들어, 손잡이를 하련솔의 손목에 걸어 주었다. 대뜸 느껴지는 무게감에 하련솔은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더듬더듬, 종이 가방의 형태를 가늠하는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이게 뭐야?”

그러면서 종이 가방 안을 제대로 살피려는데, 아주 가깝지 않고서야 무얼 읽어 낼 수가 없다 보니 절로 고개를 처박게 됐다. 종이 가방 속에 머리를 집어넣다시피 하는 미련한 동작에 이차혁이 웃음소리를 냈다.

“제 시종이 심부름을 나간 김에 간식거리를 사 왔더라고요. 형 먹어요.”

“비싼 거 아니야? 냄새가 비싼 간식 같은데….”

“비싼 거 맞아요. 그러니까 남 주지 마세요.”

“…….”

우물쭈물하면서도 하련솔은 받은 것을 돌려주진 않았다. 코끝을 건드리는 우유 크림 냄새가 못내 달가웠다. 조심스럽게 손을 넣고 더듬거리자니 단단한 유리병이 잡히는데, 속에 든 것이 음료인지 푸딩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하련솔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쪽에서 먼저 베푸는 친절을, 그것도 음식을 거절하기란 그의 팔자에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아끼는 이유가 있네! 엄청 착한 애구나!’

쉽게 생각하니 인사도 쉽게 나왔다.

“고마워. 잘 먹을게.”

그리고 이상한 감각이 하련솔을 살살 흔들었다. 대뜸 다가온 손길이 그의 정수리에 닿는가 싶더니,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좌로 우로 쓰다듬은 것이었다. 쓰담, 쓰담… 수 초간 이어지던 스킨십이 끝나자마자 이차혁이 돌아섰다.

제 눈 밖으로 사라지는 인영과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하련솔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대뜸 찾아와 음식을 준 행동, 그리고 제 머리를 만져 대던 손길은 작은 의심을 남겼다.

‘…개구멍에 산다고 내가 진짜 개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간식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이마를 구기기도 잠시, 하련솔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으로 왈왈 짖으며 그는 방 안으로 쏙 몸을 집어넣었다.

***

기분 좋게 출근하자마자 초롱은 비명을 꽥 질렀다. 그녀의 한가하고 평화롭고 뻔뻔한 무화께서 손발이 파랗게 질린 채 대청 위에 뻗어 있어서였다. 귓불이며 입술까지 창백해진 몰골은 밤새 독살을 당했다고 착각해도 모자랐다.

허탈하게도, 하련솔이 앓는 이유는 아침잠이 모자라서였다. 어쩌다 새벽에 눈이 떠지기에 일찍 일어났는데, 찬 공기를 쐬었더니 오한이 들었단 말이었다. 그의 시종으로서 초롱은 퇴근 전 모든 문과 창문을 단속하건만, 막상 병약한 무화께서는 구태여 바깥바람에 얼굴을 내밀었다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기운 없는 무화를 침실로 낑낑대며 옮겨 놓고 보니 하련솔의 손이 달달 떨렸다. 눈사람처럼 흰 손끝에 핏기가 돌도록 주물러 주며 초롱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직 가을도 찾아오지 않은 여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온돌 난방까지 때 주었다. 그제야 하련솔이 눈을 붙였다.

초롱은 잠든 무화의 안색을 한참 살폈다. 이마와 뺨을 적신 땀을 닦아 줄 때쯤 그녀의 마음에 앉은 걱정은 탄식으로 빛을 바꿨다. 그러잖아도 존재감이 없는 하련솔인데, 그러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으니 그는 평생 황제의 은혜를 입지 못할 터였다. 고쳐 말해 평생 이렇게 아플 거란 의미였다.

‘벌써 추위를 타서야…. 겨울은 어떻게 버티지?’

크게 눈에 띄는 점 하나 없는 무화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초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곤 의료원을 찾아가 해열제와 비타민 사탕을 받았고, 돌아오는 길엔 세답방에 들렀다.

붉고 푸른 빛의 단청을 지닌 세답방은 쉽게 말해 빨래방이었다. 멋들어지는 기둥 사이로 국산 브랜드 드럼 세탁기와 건조기가 층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초롱은 겨울 이불을 하나를 받아다가, 건조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묵은 먼지가 싹 빠지고 따끈따끈하게 데워지게끔 기기를 작동시켰다. 작은 액정 위로 남은 건조 시간, ‘30분’이 표시됐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품 안의 사탕 봉지를 고쳐 안으며, 초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화가 잠에서 깰까 걱정됐다.

‘아플 때 혼자 일어나면 기분 나쁠 텐데….’

그러고 보면 하련솔은 참 투정 없는 무화였다. 그는 제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저를 다른 무화와 비교하지 않았으며, 저에게 주어지지 않는 황실의 그 무얼 탐하지도 않았다. 처음 한 주간 초롱은 그래서 그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구김살이 없고 그저 덤덤하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변두리 보릿자루 신세에 만족하는 하련솔이 초롱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처럼 순순하고 착한 무화에게는 조금 더, 좋은 일이 있어야 한다고 초롱은 믿었다.

‘빨리 돌아가라, 빨리….’

데굴데굴, 건조기 속을 구르는 이불을 노려보며 초롱은 애를 태웠다.

그러나 같은 시각, 그녀의 무화는 홀로 있지 않았다. 개구멍이라 불리는 조그만 건물 침실에 누운 그의 곁에 손님이 자리했다. 찌뿌듯한 몸살 기운과 홧홧하니 타는 듯한 열 기운, 두개골을 쪼개 놓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뜬 순간, 하련솔은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희미한 형태를 마주 봤다.

“…….”

상대가 누구인지 확신하질 못해, 그는 그저 침묵했다. 저릿저릿한 손을 들어 제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키자니 버거운 숨이 절로 새어 나갔다. 한참 숨을 삭인 뒤에야 대나무 헤드보드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그제야 정체불명의 손님이 목소리를 냈다.

“좀 살 만한가 봐?”

마른 목구멍을 침으로 축이며, 하련솔이 피식 웃었다. 동굴 안의 짐승이 말하는 듯 울림 있는 목소리가 무섭도록 낮아서였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힘껏 노려보자,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의 복장도 어느 정도 살필 수가 있었다. 상의는 흰 셔츠에 하의는 검은 바지인데, 외투로 두른 것은 기다란 것이 두루마기 같았다. 어깨에서 시작해 팔뚝 부근까지 얼룩 같은 빛이 보였다. 아마도 화려한 자수가 많이 놓인 모양이었다. 키가 무척 큰 탓에 천장이 정수리에 닿기 직전인지라, 그의 몸에 맞춘 두루마기는 어지간한 이불만큼 길어 보였다. 나찰사였다.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사까지 보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쉰 소리 섞인 목소리로 하련솔이 대꾸했다. 그에 나찰사가 눈썹을 움찔거렸다. 빛을 못 본 양지 식물처럼 시들시들하기에, 저는 비아냥을 담아 말을 건넸건만 하련솔은 웃어 보이니 당혹스러웠다. 그러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 못마땅하니 내민 대거리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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