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3화 (13/135)

13.

비실비실한 무화가 흰 목덜미가 보이도록 꾸벅거리매, 나찰사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명령했다.

“존대하지 마. 부담스럽다.”

“예? 왜요?”

하련솔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상대의 표정이 아닌 분위기를 살폈다.

‘설마….’

아무 말 없이 잠잠한 나찰사를 지켜보길 수 초, 하련솔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빠져나온 것은 퉁명스러운 음성이었다.

“너… 나보다 어리냐?”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찰사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몸을 앉혔다. 엉덩이가 뜨끈해지도록 펄펄 끓는 온돌을 느끼며 그는 손을 뻗었다. 하련솔의 이마를 적신 땀이 그의 손바닥에 옮겨 붙었다.

“허!”

쯧쯧, 혀를 차며 나찰사가 말했다.

“뇌를 아주 끓여 먹을 작정이야? 의료원은 뒀다 뭐 해?”

쏟아지는 꾸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련솔은 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열이 나고 손발이 저려 그런지 생각에도 마비가 온 듯했다. 나찰사의 손에 이마를 붙이고서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일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질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이 차가워서 기분 좋았다.

더운 콧김을 내쉬며 하련솔은 상대의 손바닥에 얼굴을 푹 기댔다. ‘어쭈’ 하고는 저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또한 듣기 좋았다.

“…시원하다….”

그러고 보면 제 처지가 참 무료했다. 문정궁에 입궁한 이래 크게 아프지 않았던 이유는 개화병이 나아서가 아니었다. 외출 한번 하질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잘 먹고 잘 쉬며 얌전히 지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무탈하게 잘 지내자면 평생 침대와 한 몸이어야 했다. 여름 새벽의 시원한 공기를 쐬는 일조차 금물이었다.

문득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하련솔을 채웠다. 이 심심한 삶에, 종종 저를 찾아오는 불청객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적당한 관계를 허허실실로 유지한다 한들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연합을 맺건 척을 지건 불편하기만 한 무화도 아니고, 제 지반을 우르르 쾅쾅 흔들어 놓을 황제도 아닌, 방계 황족을 딱 한 명 알고 지내어서 문제 되진 않을 것 같았다. 나찰사의 손길은 딱 그만큼 좋았다.

“몸이 아프면, 황제라도 찾아가면 될 일 아냐?”

하련솔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나찰사가 물었다. 삽시간에 젖어 버린 그의 손 밑으로 희고 둥그런 이마가 드러났다.

“황제를…? 내가 어떻게 대뜸 찾아가…. 만나 뵌 적도 없는데.”

“편지도 쓰고, 안부도 전하고, 오찬 자리에 출석하면 되지. 황제가 뭐 별건가?”

나찰사가 당연하다는 듯 일러 주는 말들은 하련솔이 듣기에 죄 허무맹랑했다. 때문에 피식 웃음을 흘릴 뿐 따로 대꾸하지 않았다.

하련솔의 반응에 자극받은 듯, 나찰사가 그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콕콕 건드렸다.

“왜? 그것도 하기 싫어? 황제가 널 보면, 아주 한눈에 홀딱 빠져서 쫓아다닐까 봐 그래?”

“…뭐?”

“아주 자신만만하신가 봐.”

만일 하련솔이 개화병 환자만 아니었더라도 그의 말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을 터였다. 말투만 비아냥거릴 뿐, 무어 즐거운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웃고 있는 나찰사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말이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나찰사의 표정을 살피기는커녕 이목구비조차 읽어 내릴 줄 몰랐다. 들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그는 무진 당황했다. 황제의 먼 친척인 나찰사가 보기에, 무화로서 제 태도가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나 싶어서였다.

하련솔은 멍하니 기대고 있던 머리를 곧바로 떼어 냈다. 편안하던 얼굴에 주눅 든 기색이 스몄다. 당혹감에 진땀 흘리며, 중얼중얼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좀 징그러워서 그래.”

“뭐가?”

나찰사는 시트에 대고 제 손바닥을 슥슥 문질렀다. 손금을 적신 식은땀을 모두 닦아 내고는, 재차 하련솔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홀린 듯 그의 손아귀에 머리를 맡기며 하련솔이 구시렁거렸다.

“황제 폐하가… 그러니까 스물여섯 살… 이라며? 그럼 나보다 세 살이나 더 어린데….”

“…스물일곱 살인데.”

“두 살이나 세 살이나….”

“스물일곱 살이라니까.”

“그래, 뭐…. 아무튼 어린 동생한테, 나 좀 덜 아프자고 알랑방귀를 뀌라고? 미쳤냐, 남자가 돼서 염치가 있지.”

이런 말까지는 구태여 뱉을 필요가 없다는 걸, 하련솔도 이성으론 알았다. 그런데 나찰사의, 손이 문제였다. 그 커다랗고 탄탄하고 시원한 손이 하련솔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잠깐이나마 얼떨떨하니 돌아왔던 정신이 다시 집을 나가 버렸다.

그 바람에 중얼중얼 제 속에 든 말을 다 게워 냈다.

“황제한테는 어차피 내가 필요 없잖아. 예쁜 무화가 엄청 많다고들 그러던데….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남자를 만나?”

“왜.”

나찰사의 대답은 코웃음을 치듯 가벼웠다.

“황제는 남자 좋아하는데.”

“…….”

두 번째,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이야기에 하련솔이 어깨를 움츠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그는 주위를 살피는 시늉했다. 그러곤 입술을 비죽거리며 물었다.

“…그거 진짜야? 그런 이야길 막 해도 되는 거야?”

“다 아는 얘긴데, 막 안 하면 뭐가 달라져? 황제는 남자 좋아해. 첫사랑도 남자였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이번에 침묵은 나찰사의 몫이었다. 바통을 건네받은 듯 그는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그러곤 한 박자 늦은 답을 내놓았다.

“매일 침전으로 찾아드는 무화가 전부 남자잖아? 이차혁도 그렇고.”

“혁이…, 아, 아니. 그분은 엄청난 미인이라고들, 그러던데….”

“내가 보기엔 형도 상판이 심상찮아.”

불쑥 찾아든 말에 하련솔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썹 사이에 선을 만들며 그는 두 눈을 게슴츠레 떠 보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찰사가 저를 놀린다고 생각됐다.

“야…. 내가 너보다 형인 거 맞나 본데, 시비 걸지 마.”

“시비? 내가 언제?”

“아까부터 황제가 어쩌고 내 상판이 저쩌고, 그만 좀 놀려.”

말끝에 깊은 한숨이 따라붙었다. 전보다 가벼워진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하련솔은 침대에 풀썩 몸을 눕혔다. 땀에 젖은 이불을 재차 끌어당겨 올리며 얼굴까지 덮어 버리자, 나찰사가 잽싸게 그의 이불을 빼앗아 내렸다.

“내 말은….”

눈을 뜨면, 하련솔은 대뜸 코앞으로 다가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짐승의 것 같던 까만 눈동자가 전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알이 느릿느릿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가 싶더니,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이 제일 예쁘단 소리야. 어느 무화들보다 더.”

그 말이 어찌나 가까운지, 음절 사이 사이에 섞인 숨결이 하련솔의 인중을 간질였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법도 잊은 채 하련솔은 얼어붙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젖은 시트에 등을 완전히 파묻고서 떨리는 목소리를 흘리는 게 전부였다.

“…너 미쳤냐?”

그러자 나찰사가 웃었다. 소리 내어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하련솔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길이 열을 재는 듯, 안색을 살피는 듯하기에 하련솔은 앓아누운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굴었다.

이내 나찰사가 ‘음’ 하고는 만족스러운 침음성을 냈다.

“이제 정말 살 만해졌네.”

그의 말이 맞았다. 하련솔은 제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열기가 가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덜덜 떨리던 손과 발도 진정된 지 오래였다. 서늘하게 손톱 밑을 맴돌던 한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몸살 기운이 맴돌던 몸이 물기를 짜낸 솜 베개처럼 가벼워졌다.

“응….”

대답도 신음도 아닌 모호한 소리를 내며 하련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뺨에 붙은 나찰사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을 올려 하련솔의 퉁퉁 부은 눈꺼풀 위에 대는가 싶더니, 살살 내려 두 눈을 감게 하는 식이었다. 하련솔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기분 좋아.’

나른하게 쏟아지는 잠기운에 육신을 내맡기며, 하련솔은 미소 지었다.

삽시간에 곯아떨어진 그의 얼굴을 나찰사는 한참이나 더 붙들고 있었다. 커다란 상체를 깊이 숙이고, 집중력을 온통 하련솔에게 쏟아붓다시피 했다. 만일 제삼자가 둘 있어 그의 태도를 보았더라면 서로 다른 말을 했을 터였다. 혹자는 제 손아귀로 굴러 들어온 이의 눈과 코와 입술을 뇌리에 새기는가 보다 할 것이었고, 다른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이와 견주어 비교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할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이를, 집요하게 기억해 내는 중이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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