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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4화 (14/135)

14.

짙은 냄새가 하련솔의 잠을 깨웠다. 짐승의 장기 냄새 같기도 하고, 말린 나무 껍데기에서 풍기는 냄새 같기도 했으며, 펄펄 끓는 물에 천을 삶은 냄새 같기도 했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향기에 콧잔등이 절로 구겨졌다.

베개에 뒤통수를 푹 파묻고서 하련솔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개화병에 걸린 이후로 모든 기상이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잠을 푹 자건 못 자건, 낮잠을 잤건 밤잠을 잤건 간에 정신을 차리고 이부자리를 벗어나기가 무척 버거웠다. 모든 장기가 콩알만큼 작아지고 기능이 반절로 줄어든 느낌마저 들었다.

한참을 끙끙대며 앓던 끝에 하련솔이 눈을 떴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는 그러나 이채가 서리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한참 뭉갠 탓에 잠옷도 구깃구깃했다. 퉁퉁 부은 눈가를 주먹으로 문질러 닦아 내며, 그는 제 아담한 방을 가득 채운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초롱아….”

잠에서 깬 저를 찾아올 유일한 이, 시종의 이름을 부르며 하련솔이 이불 밖으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졸음을 덜 벗어난 손으로는 잠옷 목둘레를 긁적거렸다.

컴컴한 시야에 옅은 빛이 서서히 스며들어왔다. 둔한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살펴본 근방은 온통 늦은 오후의 빛깔로 어슴푸레한데, 열린 문을 통해 기어 온 빛은 하얀색이었다. 그밖에 분간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람은 없었다.

“지금 몇 시야?”

중얼거리는 그의 곁으로 발소리가 다가왔다. 짙은 향기도 덩달아 존재감을 키웠다.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추켜들고서 하련솔은 말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련솔의 두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표정도 대번에 새초롬하니 냉랭해졌다. 이내 그가 불퉁하게 물었다.

“…너냐?”

그러자 하하… 낮은 웃음소리가 방을 채웠다. 검은 인영이 낮은 침대 옆으로 바짝 다가오는가 싶더니 키를 줄였다. 눈먼 무화의 옆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푹 숙인 것이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몰래 약 좀 먹이려 했더니.”

나찰사가 물었다. 예상했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들리매 너무 우쭐대지 않고자, 하련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초롱이는 방에 들어오기 전에 꼭 말을 걸어 주거든. 나 놀라지 말라고.”

“지금 날 혼내는 거야?”

곧바로 돌아온 투정은 하련솔을 웃음 짓게 했다. 픽 새는 듯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그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 안 가득 스민 냄새가 이제는 코앞에서 풍기는 듯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야…? 무슨 약 냄새가 이래?”

“한약 한 첩 지어 왔어. 자, 마셔.”

불쑥 다가온 손이 하련솔의 어깨를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막무가내로 닥쳐온 손길에 하련솔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불쾌해서가 아니라 어지러워서 별수 없었다. 두 손을 허공에 놓고 허우적거리며 그는 두 눈을 콱 감았다. 머릿속이 핑글 돌고 토기가 치밀었다.

“흐어….”

마른 숨을 거칠게 내뱉자, 나찰사가 당황한 듯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는 전보다 부드러워진 태도로 하련솔의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도자기 그릇을 하나 안겨 주었다.

빈혈 기운에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하련솔은 황당했다. 손에 들린 그릇의 온도가 따끈하고, 무게가 묵직한 것이 정말 한약이 담긴 듯했다. 스물아홉 평생에 한약은 처음이었다.

“나를 여든 살쯤 된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무안한 마음에 괜스레 꺼낸 농담은 진심 어린 질문으로 이어졌다.

“…정확히 뭐로 만든 약인데? 무슨 돌도 넣고 녹용도 넣고 그런다던데 진짜인가…? 제대로 된 한약은 엄청 비싸지 않아? 나 먹으라고 줘도 되는 거야?”

“비싼 거 맞아. 근데 너 먹으라고 지어 온 거니까 마셔.”

나찰사는 겸손 떠는 법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직설적이었다. 주춤거리며 손을 물리려는 하련솔을 붙잡는 방법 역시 잘 알았다.

“개화병에 좋은 약이야.”

“그래?”

개화병에 좋다니, 일어나자마자 어지럼증에 시달리던 차 솔깃한 이야기였다. 멍든 복숭아처럼 찌푸렸던 얼굴에 생기와 호기심이 일자, 나찰사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바람 새는 숨소리를 섞어 가며 그는 아이 다루듯 하련솔을 달랬다.

“그래, 그러니까 남기지 말고 다 마시자.”

응원에 힘입어 하련솔은 조심스럽게 그릇 위에 입술을 붙였다. 그러곤 느릿느릿 그릇을 기울여, 입 안으로 밀려드는 액체를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한 모금 두 모금 삼킬 때마다 그릇이 더욱 세게 기울어지더니 이내 조그만 얼굴이 전부 가려졌다. 나찰사는 목을 뻗어 가며 진한 한약을 꾸역꾸역 삼키는 하련솔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그릇 끝에 고인 한 방울까지 핥아 삼키자마자, 하련솔이 얼굴을 팍 구겼다. 쩝, 쩝… 입맛을 다실 때마다 약재 냄새가 풍겼다. 찝찝하다 싶던 표정이 바닷물 먹은 고양이처럼 구겨지는 걸 보면 뒷맛이 무척 쓴 모양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나찰사는 제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청포도가 그려진 포장지를 벗겨 사탕 알갱이를 손에 쥐고, 내밀었다. 그래도 하련솔은 선뜻 입을 열질 않았다. 그에 나찰사는 아주 잠시간 의아해하다가, 아차 하며 제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코앞의 사탕도 못 보는 이를 위해, 그는 아예 하련솔의 입술에 사탕을 갖다 붙여 주었다. 그러자 하련솔이 냉큼 입을 열었다.

“써….”

연녹색 사탕이 그의 입 안에서 이리저리 바삐 굴러다녔다. 혓바닥은 물론이고 왼 볼 오른 볼 할 것 없이 한약이 닿은 부위를 전부 설탕으로 코팅하려는 듯했다. 그 모습이 잠자기 전 식량을 채비하는 햄스터 같아, 나찰사가 큭큭 웃음 지었다.

제게 쓴 약을 먹여 놓고 좋아하는 소리가 얄미워, 하련솔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손을 이리저리 허공을 가를 뿐 도통 나찰사를 찾아내질 못했다. 눈썹을 으쓱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찰사는 일부러 그 주먹에 제 팔뚝을 가져다 대 주었다.

“아야.”

들으라는 듯 소리 내자 퉁퉁퉁… 두들기듯 서너 번 더 주먹이 와 닿았다. 펀치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게 약해 빠진 손이었다.

“무슨 놈의 무화가 이리 거칠어?”

다섯 대째 날아든 주먹을 막고자, 나찰사가 하련솔의 손목을 붙들어 쥐었다. 그러면서 그는 제 상체를 바짝 기울여 하련솔을 뒤덮다시피 했다. 솜털이 다 보이도록 가까이 얼굴을 대고, 팔 흔들기도 운동이라고 숨을 헐떡이는 하련솔의 입술을 빤히 관찰했다. 베개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눕다시피 기울어진 하련솔은 그러나, 그의 표정을 읽어 낼 줄 몰랐다. 새카만 눈동자에 서린 빛은 어떤지, 그 안에 담긴 제 모습은 어떠한지 조금도 몰랐다. 그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천진난만한 웃음을 거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후’ 소리 나게 입바람을 불었다. 훅 끼쳐 온 약재 향기에 나찰사가 눈을 끔벅였다.

“…….”

할 말을 잊은 남자를 코앞에 두고, 하련솔이 종알거렸다.

“너, 형 놀리려고 똥물 퍼 온 거 아니야? 무슨 약이 이렇게 써.”

“싫으면 다 가져갈까?”

“아니,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그러곤 꾸물거리며 침대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감 있게 손을 뻗어 바닥을 짚는가 싶더니, 그는 나찰사가 챙겨 온 약재를 찾고자 했다. 어두운 와중에도 어렴풋이 형태가 읽히는지 제법 정확하게 종이 가방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찰사는 그런 하련솔을 도와주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련솔이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실망했다. 바닥 한편에 놓인 약재 보따리 앞으로 곧바로 향하는가 싶던 하련솔은 금세 경로를 이탈해, 벽면에 놓인 사각형의 궤에 가 닿았다. 어느 무화에게나 간직하고픈 귀한 것이 생기게 마련인지라, 보물을 간직하란 의미에서 지급한 보록寶盝이었다. 은테를 두르고 사슴을 장식한 모양새며 궤의 작은 크기가 다른 무화들 것에 비해 소탈했다.

기대에 차 상자 위를 매만지는가 싶던 하련솔이 풀 죽은 소리를 냈다.

“내 비싼 약, 어디 있어?”

“자.”

그를 따라 나찰사가 무릎으로 기었다. 보록 위에 놓인 하련솔의 손을 잡고, 제가 가져다 놓은 약재 보따리로 끌고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놀랐다. 순순히 끌려오는 하련솔의 몸이 너무 가볍고 약해서였다. 체구부터 차이가 크니 어느 정도는 별수 없다지만, 하련솔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유별나게 미미했다. 거의 영혼이 없다는 느낌마저 들어 신기했다.

“오오…. 이거 유통기한 언제까지야? 냉장 보관 해야 하나?”

부드러운 보따리 천 안에 손을 넣고 이리저리 휘젓던 하련솔이 우뚝 멈췄다. 허공에 고개를 든 채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얼어 있다가, 부스럭 소리와 함께 씩 미소 지었다.

“여기 붕어빵 든 거 같은데….”

그에 나찰사가 입을 벌렸다.

“…귀신이네. 눈 안 보인다는 거 거짓말 아냐?”

종이 포장지의 감촉만으로 내용물의 정체를 판별해 내고, 하련솔은 무척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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