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6화 (16/135)

16.

그 바람에 하련솔은 무척 당황했다. 그는 바닥에 둔 손을 느릿느릿 움직여, 초롱이 두고 간 쟁반 모서리를 찾았다. 매일 성실하게 음식의 종류와 위치를 설명해 주던 시종이 대뜸 태만하니 그로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차가운 유리병에 닿으려는 하련솔의 손을 나찰사가 가로막았다.

“기다려. 따라 줄게.”

병의 마개를 열고 차 조금을 유리잔에 따르는 것쯤이야, 나찰사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냉침하여 우려낸 녹차를 유리잔에 따르고, 종지에 담아온 꿀 두 스푼을 더했다. 그리고 티스푼으로 슬렁슬렁 저어주자 유리와 얼음이 만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가 멋진 카페 음료를 만드는 동안 하련솔은 앉은뱅이 탁자 위를 더듬어 남은 붕어빵이 하나뿐임을 확인했다. 냉큼 그것을 집어 드는가 싶더니, 반으로 쪼개어 붕어의 입이 붙은 윗부분을 나찰사에게 건네주었다.

대뜸 통통하고 따듯한 붕어빵이 손에 들어오매 나찰사는 눈을 끔벅거렸다. 팥 앙금으로 가득 채워진 절단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형, 혹시… 궁 밖에서 지낼 때 말이야. 나를 만난 적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조심스럽게 건넨 질문에 비해 대답은 무척 빨랐다. 제가 말해 놓고도 제가 민망하다는 듯, 하련솔은 제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훑었다. 그러면서 거듭 변명했다.

“너는 황제의 친척이잖아. 내가 황실 사람을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무작정 확신하는 투의 목소리에 나찰사가 눈을 좁혔다. 그러곤 시력 나쁜 무화가 제 얼굴을 살필 수 있게, 무척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보여 주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봐.”

숨결이 인중에 닿도록 거리를 좁혀 놓자, 하련솔의 눈동자가 일렁일렁 흔들거렸다. 나찰사는 그가 모자란 시력으로 제 두 눈을 번갈아 살피고 있음을 알았다.

“…이래도 모르겠어? 정말 몰라?”

그렇게 질문하면서도 나찰사는 자신이 어떤 답을 바라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당혹스러운 듯 쭈뼛거리는 하련솔에게 쏠려 있었다.

한참을 어리바리하며 나찰사의 눈길에서 벗어날 방도를 꾀하다, 하련솔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무얼 결심한 듯, 매우 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야…. 나는 황제 폐하의 무화잖아. 평생 폐하만 보고 살기로 다짐하고 들어온 몸이야. 내가 널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너, 나랑 이러는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돌아온 거절의 멘트에, 나찰사는 머릿속이 띵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잠시 생각하다, 이내 볼우물과 함께 그 생각마저 접어 버렸다.

“…풉!”

하련솔에겐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냐’는 말이 전형적인 플러팅 멘트로 들린 모양이었다. 그러니 대단한 유혹을 당하는 줄로 착각할 법했다.

나찰사로서는 크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는 저를 거절하는 하련솔을 귀엽게 여겼다. 실력 없는 연극배우처럼, 모든 대사를 하나의 톤으로 읊는 모습은 아주 귀엽다 못해 이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하하하!”

참다못해 나찰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목 긁는 소리가 섞인,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웃음이었다.

“왜…, 왜 웃어?”

당황한 듯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그가 진지할수록 나찰사의 웃음은 더욱 커졌다. 삐죽 눈물까지 나도록 크게, 그는 오랫동안 웃었다.

“웃지 마, 난 황제 폐하의 남자라고!”

발끈한 듯, 하련솔이 바락 외쳤다.

근육이 바짝 땅기는 배를 움켜쥐며, 자신을 나찰사라 소개한 사내가 눈을 좁혔다. 까만 눈동자에 마흔한 번째 무화가 담겼다.

‘그 황제가 나다, 인마.’

어떠한 운명의 장난으로 이렇게나 재미있는 무화가 제 궁에 굴러 들어왔는지, 천천히 알아낼 참이었다.

눈 가리고 야옹

청기와가 달린 거대한 전각의 용도는 다름 아닌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정원에서 수국이 허리를 펴고, 통로에서는 허공에 매달린 고사리가 풍성한 팔을 늘어뜨리기로 소문난 이 전각은 문정궁에서 가장 크고, 두 번째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첫 번째로 아름다운 건물은 ‘교태전’인데, 공교롭게도 경복궁 안에 자리했던 침전을 헐어 버리던 날 문정궁에 새 침전이 완공되었기에 본래 경복궁에서 쓰던 침소 이름을 옮겨다 붙인 것이었다. 본래 ‘교태전’이라 함은 황제의 비가 쓰는 침전인지라, 오늘날까지도 그 용도에 따르느라 문정궁의 교태전은 주인이 없었다. 건물 보존을 위하여 몇몇 관리자를 제외한 외부인의 방문 역시 허용되지 않는 보물이었다.

대신에 외부에서 인사가 찾아오거든 언제고 두 팔 벌려 문을 여는 곳이 이곳,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만일 문정궁 내부에서 사고가 발생하거든 모든 무화와 직원들을 수용하고도 남을, 커다란 크기의 이 전각은 구조가 꽤 특이했다. 직사각형 건물 네 채가 직각으로 이어지며 건물 외곽선으로 사각형을 그리는지라, 문정궁 안에 또 다른 궁궐이 놓인 듯했다.

개중 정문이 붙은 건물이 가장 작았는데, 양측으로 경비 처소가 딸린 높다란 문을 지나 들어서면 또다시 길쭉길쭉한 건물이 각각 양측에 자리했다. 건물을 울타리 삼은 중앙 공간에는 정원이 놓였는데, 한가운데에 눈과 비, 땡볕을 피하는 용도로 지붕을 얹은 산책로가 직선으로 놓였다. 볕이 닿으면 더욱 푸르러 보이는 청기와가 자아낸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걷노라면 절로 걸음걸이에도 박자가 생겼다. 그렇게 그늘 길을 따라 걸으면 본체에 다다르는데, 이곳이 해외 인사가 방문할 때에 쓰이는 공식 집무실이었다.

그러나 젊은 황제, 이림범은 전대 황제와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세계적으로 미남 황제로 이름을 날린 후에도 그는 외부에 제 모습을 노출하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개방된 집무실을 쓰는 일도 적었다. 대신에, 그는 왼편에 위치한 기다란 행각의 방을 주로 사용했다. 여덟 개의 책장이 진작 자리한 탓에 방은 이미 포화 상태였는데, 그곳에 책상이 놓였고 의자가 놓였다. 창호지 발린 창을 통해 스며들어 온 전통 문양의 그림자를 뒤집어쓰며, 오피스용 의자에 앉아 하루 열 시간이 넘게 자리를 보전했다.

만일 이 나라의 행정에 무관심한 외국인이 오늘 이곳의 풍경을 본다면, 집무실의 주인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딱 그만큼, 이림범은 일을 잘했다. 그는 모든 사안을 망설임 없이 선택하고, 해결했다. 적응 기간 따윈 불필요해 보였다. 그야말로 날 때부터 황제여 온 남자 같았다.

그런 그에게도 차일피일 미루는 일이 있기는 했다. 딱 하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가피 스님이 오셨습니다.”

비서가 전해 온 말에,

“돌아가라 해라.”

황제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에 비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 문을 닫고 나갔다. 선선한 에어컨과 공기 청정기 바람을 쐬다 대뜸 야외로 나서자니 늦여름 더위가 무진 찜통이었다. 젊은 남자라도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는 날인데, 청기와가 자아낸 그늘 길을 내버려 두고 땡볕 아래에 선 노승을 내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스스로를 ‘가피 스님’이라 칭한 노승은 어째 소매 통이 큰 전통 승의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어 손에 든 휴대폰도 모두 낡은 구식이었다. 구부정하니 허리를 숙이며 정원에 핀 수국 사진을 찍는 모습도 평화로운 한편 딱해 보이긴 매한가지였다. 전대 황제로부터 회주會主라 불리며 긴 시간 존경받아 온 인물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애써 덤덤한 척 노력하며, 비서는 가피 스님에게 황제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주름이 자잘해지도록 미소를 지으며 한 가지를 청해 왔다. 황제께 꼭 전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것만 들려드리고 떠나면 안 되겠냔 말이었다.

벌써 4주째였다. 월요일마다 찾아와 무턱대고 ‘황제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하고 꾸벅 인사를 올리더니, 인내심으로 줄다리기하듯 반나절을 거뜬히 버티는 노승이었다. 하필 전대 황제가 그 스님을 무척이나 예우하여 문정궁에 드나들 자격마저 안긴지라, 문전박대로 쫓아내자니 비서도 마음이 약해진 채였다.

잠시간 고민하다 그는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황제를 위해 일하는 비서로서 그의 결정에 토를 달거나 번복을 요청하기란 금물이었다. 그래도 들은 말을 전하는 것쯤은,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비서는 생각했다. 때문에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 꼭 전해 드릴 말씀이 있다고, 그것만 들려드리고 떠나겠다 하십니다.”

이번에, 젊은 황제는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뜻 긍정을 내비쳤다.

“들어오라 해.”

비서는 기쁜 마음으로 노승을 모셔왔다. 주름 많고 비쩍 마른, 나이가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승이 고개 숙인 채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그는 커다란 책상을 채운 책과 서류철, 컴퓨터, 그리고 중앙에 자리한 젊은 황제 이림범을 순서대로 살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피 스님이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황제가 제 옷가지를 한 벌 두 벌 벗어 던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황금색 두루마기를 벗었고 다음으로 붉은 내의의 허리끈을 풀었다. 바지는 물론이며 속옷까지 거침없이 벗어, 발로 걷어차다시피 하며 구석으로 밀어 내기까지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