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노승이 책상 앞에 다다랐을 무렵 황제는 완전히 나신이었다. 어깨가 쩍 벌어졌고 가슴 중앙에서 시작된 근육의 흐름이 내 천자를 그리듯 복부로 흐르는, 그야말로 흠결 없이 훌륭한 몸이었다. 배꼽 아래 편편한 살 위로 구불구불한 핏대 그림자가 지는데, 얄팍하게 시작된 그림자가 사타구니에 다다라 부쩍 어둑해졌다. 유독 크고 긴 그림자가 그의 허벅다리에 그어졌다. 크고 단단한 허벅지는 근육이 자아낸 선으로 울퉁불퉁했다.
석상처럼 우뚝 선 거대한 몸 위로 창호지를 통과한 햇볕이 쏟아졌다. 밝은 빛과 창틀이 그려놓은 문양이 문신처럼 그의 몸 절반을 뒤덮었다. 남은 볕은 긴 카펫이 되어 바닥을 타고 쏟아졌다.
이미 완벽한 육신을 더욱 완벽하게 포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얼굴이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에 ‘범’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포식자의 눈, 매서운 어둠을 자아내는 콧대와 자로 잰 듯한 입술에 이르기까지, 그는 완벽한 남자였고 결함 없는 황제였다.
성큼, 이림범이 걸음을 움직였다. 그에 노승의 몸이 약하게 주춤거렸다. 놀란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젊은 황제는 늙은 승의 코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섰다. 그는 큰 키에 운동선수 버금가는 몸매를 자랑하고 노승은 늙을 대로 늙어 체구는 작고 팔다리는 비쩍 말랐기에,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황제가 콧김을 세게 내쉬면 노승은 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스님의 법명에서 가피加被는 은혜를 뜻한다지?”
검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깜빡이지조차 않고, 황제가 물었다.
“이 중생을 위해 스님께서 무슨 은혜를 베풀 수가 있지?”
“…….”
“응?”
질문에 침묵하는 이는 노승뿐만이 아니었다. 기꺼이 스님을 이 방 안에 들인 비서 역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적절한 답을 생각해 내기는커녕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조차 없었다. 산을 타고 노는 호랑이가 그러하듯이 당당하게 벌거벗은 이림범에겐 부끄러움이 없었다. 수치심은 그 완벽한 몸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하찮음을 깨닫는 타인의 몫이었다.
“스님. 나의 무얼 고쳐 주실 수 있는데?”
재차 젊은 황제가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노승의 곁에 아주 바짝 붙어 섰다. 자칫하다가는 맨몸으로 부딪칠 기세였다.
비서가 아연실색하며 목소리를 냈다.
“폐, 폐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신의 황제가 그를 홱 바라보았다. 뒤이어 전해 온 말은 녹음기를 재생한 듯 평화로웠다.
“오늘까지 수고했어, 박 비서. 양 실장한테 들렀다가 퇴근해.”
“…예? 폐하, 그게 무슨….”
“나가는 길에 우리 스님 좀 모셔다드려.”
들은 말을 소화시키기도 전에 비서는 바삐 움직여야 했다. 황제가 뿜어내는 비인간적인 기백에 짓눌린 탓이었다. 그는 후다닥 노승의 곁으로 다가가, 늙은이의 팔짱을 끼고 그를 끌고 나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피 스님 역시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말 없는 스님을 끌고 청기와 그늘 아래를 걷는 내내 비서는 불안감에 혼미했다. 내일부터는 황제의 집무실로 출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고자’, ‘내시’라는 구시대적 별칭을 얻어도 그는 제 일이 좋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그의 일을 좋아할 사람은 차고 넘쳤다. 황제의 비서가 되기 위해 뚫고 지나온 엄청난 경쟁률을 생각하자니 마음 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한편, 모두를 겁주는 방식으로 쫓아내어 황제는 집무실에 홀로 남았다. 눈치 없는 비서를 곧바로 쫓아내길 잘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걸칠 옷 한 조각 새로 꺼내 주지도, 주워 주지도 않고 곧이곧대로 퇴장해 버린 것을 보면 그랬다.
그가 집무실로 돌아오거든 이번 일을 빌미로 농담을 건네야겠다고, 이림범은 생각했다. 새 황제의 성격을 아는 양채림 실장이라면, 상황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황제의 뜻을 파악하고 적당히 비서를 겁줄 터였다. 퇴사 전 절차라며 기밀 유지 서류에 서명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집무실로 돌아가 용서를 구해보라며 엉덩이를 찰 터였다.
“후우….”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이림범은 고개를 내저었다. 잘못한 일 없는 비서에게 제가 애꿎은 화풀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지친 몸을 풀썩 의자에 주저앉혔다. 갑자기 커다란 체중이 가해지자 의자 바퀴가 헛돌며 그의 나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손을 들어, 그는 제 어깨를 주물렀다. 중지 끝에 흉터가 걸렸다.
대뜸 지쳐 버린 듯, 이림범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피로감과 현실 감각이 대번에 밀려들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가피 스님. 그라면 이림범의 몸에 남은 유일한 결함이 무언지 곧바로 이해했을 터였다. 바로 조금 전 그가 몸을 돌리기만 했더라면, 어깻죽지부터 등허리에 이르기까지 죽죽 그인 수십 개의 흉터 줄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림범의 몸에 새겨진 모든 흉터들은 ‘은혜로움’을 법명으로 내건 노승이 새겨 놓은 것이었으므로.
‘…….’
이림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통이 밀려들고 입 안에서 소금의 짠맛이 느껴졌다. 두 손으로 머리통을 움켜쥐어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절간에 놓인 작은 돌탑, 컴컴한 방의 모서리, 나무뿌리가 순차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점멸하듯 깜빡거리는 환상을 떨치려 그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환영의 끝에 그의 머릿속 창문이 벌컥 열렸다. 괴담 속 도깨비를 찾으러 온, 용감한 소년이 어린 황자의 잠을 깨웠다. 시커먼 방 안으로 빼꼼 제 머리를 내밀며, 소년은 보조개가 폭 패도록 웃음 짓는다.
‘네가 도깨비야?’
기억 속의 소년이 그리 물었다. 이림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눈꺼풀 안에 새겨진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너는 그냥 사람이잖아.’
문득 개구멍이 생각난다. 손바닥만 한 건물에 숨어 지내는 마흔한 번째 무화의 얼굴이 생각난다. 새로 새겨진 일상이 낡은 기억을 덮어 놓았다.
‘하련솔을 보러 갈까….’
세상 모든 게 다 싫고 귀찮다는 듯 굴면서도, 하련솔은 밝고 긍정적인 남자였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늘 무얼 먹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이림범은 기분이 나아졌다. 뒤늦게 웃음이 났다.
며칠 전에는 마흔한 번째 무화의 침소에 함께 자리한 황제를 알아보고, 조그만 시종이 어찌나 식겁을 하던지…. 나오는 길에 재차 불러다가 단단히 입막음을 당부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조금 더 오래 하련솔을 속이고 싶었다. 즉석에서 지어낸 가짜 이름, ‘나찰사’라는 황가 친척으로 몇 달은 더 지내고팠다.
‘오늘은 무얼 먹여 볼까.’
낯선 남자 앞에서 세상에 없는 이를 연기함으로써, 이림범은 해방감을 느꼈다. 하련솔의 곁에 있는 게 좋았다. 하련솔의 곁에만 있으면, 그는 그 자신이 아닐 수 있었다.
***
그러나 언제고, 황제가 가장 자주 찾는 무화는 이차혁이다. 그는 오늘날 문정궁을 채운 무화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개화병 환자였다. 발병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공항에서 맞았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유학길에 오르고자 비행기에 제 두 발로 탑승했으나, 이륙 전 비상용 들것에 누워 옮겨져야 했다. 갑작스럽게 하반신 마비가 온 탓이었다.
개화병 진단을 받자마자 그는 문정궁에서 살기를 선택했다. 6년에 걸쳐 하나둘 새로운 개화병 환자가 입궁할 때마다 이차혁은 형, 혹은 오빠 역할을 자처했고 모두 그를 잘 따랐다. 무화의 수가 마흔하고도 하나가 된 오늘까지도 대다수 무화가 이차혁을 존중했다. 만일 무화 가운데 대표자를 뽑아야 한다면 모두들 입을 모아 이차혁을 지목할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상하관계의 의미가 흐려졌다곤 하나 짬밥이 지닌 힘은 여전했다. 폐쇄적인 무화 집단에서는 저보다 아는 것 많은 선배를 올려 치는 한편 제 자리를 위협하러 온 신입을 경계하는 기류가 특히나 강했다.
물론 선배 노릇 하며 알을 박자면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기량이 필요했다. 이차혁의 경우 외모가 가장 큰 무기였다. 그는 무화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사내이면서, 또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미인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개화병의 증세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수준이니, 누구도 이차혁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무진 부러워할 따름이었다.
‘폐하께서 황자 시절부터 자주 찾았었대. 즉위식 날 밤에도 둘이서 오붓하게 술을 마셨다던데?’
‘혁님이 교태전으로 침소를 옮기고 나면, 지금 처소로는 누가 들어가게 되지?’
‘거기, 나? 내가 들어가기로 되어 있어.’
‘넌 헛소리 좀 하지 마….’
쑥덕거리는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이차혁의 처소로 이어졌다. 무화들은 각기 지급된 부동산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폐쇄적인 무화 사회에서는 처소의 크기가 곧 그 무화의 입지로 통했다. 개중 가장 멋진 처소를 지닌 이는 단연 이차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