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차혁의 처소는 개별 정원까지 딸린 디귿형 구조의 한옥채였다. 좌측으로 서재 공간과 너른 마루가 주어졌고 우측에는 침실, 한가운데엔 거실이 자리했다. 여느 무화들과 달리 그의 처소에는 세탁실은 물론이고 큰 부엌, 깔끔한 헬스 룸까지 딸려 있어 그야말로 완벽한 독채였다.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옹원이며 세탁방으로 이용되는 세답방은 물론이고, 궁중 살림을 도맡은 어느 처소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이차혁은 오래도록 친하게 지닌 무화일지라도 제 처소에 쉽게 들이질 않았다. 어린 무화들은 그의 처소 근방을 오갈 때마다 담장 너머를 기웃거렸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침 묻힌 손가락으로 푹 뚫으면 구멍이 나는 창호지 문과 달리 이차혁의 처소 창문은 모조리 불투명한 유리로 설치됐다. 때문에 누구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 점을 놓고 질투를 할지언정 크게 불만을 제시하는 이는 없었다. 이차혁의 사생활은 곧 황제의 사생활이니, 그의 처소가 잘 지켜져야 그곳에 자주 발붙이는 황제가 편안할 수 있었으므로.
오늘도 그의 처소로 황제가 찾아왔다. 정장 차림새에 옥대를 변형한 벨트를 둘렀는데, 허리 장식에 옥구슬을 꿰어 놓아 걸음걸음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울렸다. 오가는 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더욱 잘 지켜보라는 듯 여유롭게 걷는 황제의 등 뒤로 한 명의 경호 직원과 두 명의 시종이 함께했다. 시종들의 손에는 아름다운 단상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이차혁을 찾을 때마다 황제는 늘 선물과 함께했다. 그의 선물에는 온통 깊은 애정과 뜻이 담겨 있었다. 둥근 옷깃의 단상은 봉숭아색이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특히나 넓은 소매 끝에 새겨진 작은 나뭇가지와 황금알 자수가 예뻤다. 조만간에 오조룡보를 달고 봉황문을 새긴 옷을 주겠노라 말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화들은 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저렇게나 환하고 흔들림 없는 총애라니 부러움에 속이 탔다. 조만간 이차혁이 머리를 기르고 족두리를 차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처소 담장을 지나 현관문을 넘어서자마자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거실로 직행했다. 그러곤 너른 소파에 풀썩 몸을 앉히고,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말 없는 시종들이 가져온 선물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빠져나갔다. 경호 직원 역시 허리를 꾸벅 숙인 인사를 남긴 뒤 자리를 비웠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간에 눈짓을 나눴다. 듣던 소문이 사실인가 보다 했다. 이차혁의 처소 내부는 과연 황후 자리를 향한 야망이 느껴지도록 화려하고 값비싼 장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은과 금과 옥으로 가득한 멋진 거실에 황제를 내버려 둔 채, 처소의 주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황제도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 듯 가져온 태블릿PC를 꺼냈다. 당연하다는 양 발치에 놓인 충전기를 잡아당겨 제 기기에 꽂기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두 다리를 스툴에 휙 걸쳐 놓고, 편안한 자세로 태블릿PC 액정을 두들겨 댔다.
액정을 채운 것은 공식 석상에 입고 나갈 의상의 최종 후보군이었다. 각각의 사진마다 브랜드명과 디자이너의 이름, 의상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와 값어치가 쓰여 있었다. 황제의 손짓 한 번으로 선택받은 의상의 디자이너와 그러지 못한 자의 희비가 엇갈렸다.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대단한 무화, 이차혁은 십여 분이 흐른 뒤에야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맨투맨 티셔츠에 보슬보슬한 수면 바지 차림으로, 목둘레에 수건을 끼운 채였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가 다가오자, 황제는 따로 챙겨 온 갈색 서류 봉투를 소파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기껏 찾아와 놓고는 업무에 여념 없는 황제를 개밥의 도토리 보듯 하기로는 이차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제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황제가 던져 준 서류 봉투를 더 반가워했다. 얼른 집어 들고는 잽싸게 안마 의자에 가 앉았다. 제 종아리 길이에 맞추어진 자리에 두 다리를 단단히 끼워 놓고, 하체 마사지를 시작하자 작은 소음과 함께 기기가 움직거렸다.
“야, 좀. 시끄러워.”
황제가 말했고,
“저기요, 폐하. 이거 5권 원고 맞아?”
이차혁이 딴소리했다. 서류 봉투에서 꺼내 든 따끈따끈한 원고지의 첫 페이지, 첫 문단을 읽어내리던 참이었다.
“주인공 이름이 다른데? 잘못 받아 온 거 아냐?”
“일단 읽어 보고 말해. 작가가 직접 보낸 건데 잘못 줬을 리가 있냐?”
그에 이차혁이 의심의 눈초리로 황제를 흘겨보았다. 불만 가득하던 그의 얼굴은 A4 용지를 세 장째 넘기면서 살살 풀렸다. 익숙한 이름의 탐정이 사건 현장에 난입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재밌어졌다.
처소에 개별 서재를 만들어 둘 정도로 이차혁은 글을 좋아했다. 개중에서도 반전을 지닌 추리극을 좋아해서, 신작이 출시되기까지 차분하게 기다리지조차 못할 정도였다. 얼굴 마주할 때마다 심심해 죽겠다고 우는소리 하는 이차혁을 위해서 황제는 제 집무실로 해당 작가의 신작 초고를 받아 왔다. 그로서는 띠지에 두를 추천 문구 한 줄 갈겨 주면 그만인 거래였으나, 이차혁의 입장에서는 남은 한 달을 즐겁게 버틸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폐하, 요즘 바쁘시다면서 여기저기 많이 다니는 거 같다?”
이차혁이 구시렁구시렁 말을 꺼냈다. 아무런 격식도 차리지 않고 여과 없이 건넨 질문이었다. 못 들은 척, 황제가 눈을 내리깔고 태블릿PC 화면을 손끝으로 밀어 넘겨도 개의치 않고 목소리를 키웠다.
“폐하?”
“…….”
“형.”
“…….”
“형. 범이 형!”
“아, 왜.”
황제, 이림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한 살 터울의 동생인 이차혁이 ‘형’, ‘범이 형’ 하며 말을 걸어 올 때면 빨리 대답하는 게 서로에게 이로웠다. 무시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해줄 때까지 형, 범이 형, 범버러범범… 노래를 불러 대기 때문이었다.
“요즘 개구멍에 자주 들른다며.”
뒤이어 이차혁이 꺼낸 말에 이림범의 고개가 휙 움직였다. 처소에 들어온 지 한참 만에 그는 이차혁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러곤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누가 그래?”
근래 제 행보를 지켜보는 이가 따로 있었는지, 이림범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개구멍’에 들를 때면 경호 직원도 떼어 놓고 인적 드문 지름길을 통했는데, 어쩌다 소문이 났는지 미심쩍었다.
이림범의 날 선 반응에 이차혁이 웃었다.
“정말인가 보네.”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어.”
“사실 거짓말이야. 내 추측이 맞았네.”
반 톤 높인 목소리로 가볍게 건넨 대꾸에 이림범은 콧김을 내쉬었다. 짙은 눈썹 사이에 생긴 구김은 가실 줄을 몰랐다. 대뜸 꺼낸 개구멍 이야기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날것 그대로 감춤 없이 내보이는 이림범의 반응은 이차혁에게 많은 힌트를 건네주었다. 원고 용지 끄트머리로 턱을 긁으며 이차혁은 눈을 굴렸다. 이렇게 될 줄을 그는 진작 알고 있었다. 하련솔의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야말로 이림범이 보게 된다면 지체 없이 마음에 들일, 진짜 총애를 받는 무화가 될 것임을.
이차혁은 새벽녘 창틀에 팔꿈치를 댄 하련솔을 떠올렸다. 부스스한 머리칼이며 반쯤 뜬 두 눈에 졸음을 가득 매달고서, 하련솔은 이차혁이 아닌 다른 누군가 저를 찾아왔길 기대했었다. 그런데 편안하게 미소 짓던 태도며 가볍기 짝이 없던 말투를 보면, 그 상대가 황제는 아닌 듯했다.
‘…혹은 황제임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거나.’
그, 순해 빠진 동안의 무화는 작은 병 하나를 소중히 품고 있었다. 개화병 증세를 낫게 해 주는 약이라며, 저에게 정보를 공유하려는 양 그것을 기쁘게 내밀어 보였었다. 자잘한 상처와 흉터, 멍울이 달린 손은 작았고 그 손바닥에 놓인 약병에는 흔해 빠진 식염수가 들어 있었다.
그 병을 본 순간 이차혁은 알았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하련솔을 속이고 남몰래 그 눈을 낫게 할 인물이 황제, 이림범밖엔 없다는 것을.
한데 문제의 그 이림범은 며칠 건너 한 번 꼴로 저를 찾아오면서도, 하련솔의 이름일랑 히읗 하나 뱉질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까지 비밀이라는 게 없었는데 말이었다.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이차혁은 소파 위의 이림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옷 잘 입는 황제’라는 수식어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뉴스에도 심심찮게 언급되는 이림범의 복장은 전대 황제들과 크게 다르거나 특별하진 않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옷을 입혀도 제 피부처럼 소화해 내는 잘난 옷걸이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 잘빠진 얼굴을 달고 무뚝뚝하게 일에만 전념하고 있으니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 침묵이 하련솔과 그의 만남이 단발성이 아님을 반증하기 때문이었다.
혹여 문정궁을 오가는 다른 무화들에게 소문이 났을까 염려하는 기색으로 보아, 그는 하련솔이 몹시도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아끼지 않으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애먼 소문이 돌아 하련솔이 질투의 대상이 되고, 피해를 입게 될까 염려하는 기운이 열렬했다.
“내가 먼저 찾아냈는데…. 폐하랑 더 친해진 것 같네.”
안마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으며, 이차혁이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