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19화 (19/135)

19.

그러자 한숨 섞인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걔가 뭐 땅에 떨어진 돈인 줄 알아?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게.”

“어쩐 일로 다른 무화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그….”

이내 두 남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 때문이었다. 이림범은 태블릿PC를 높이 들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고, 이차혁은 현관문 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고, 단정한 복장으로 예의를 갖춘 시종 둘이 다과상을 내왔다.

시종들은 황제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 볼을 붉히며 물러났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이차혁이 한숨 쉬었다. 이림범은 찬 얼음을 가득 띄운 아메리카노를 입에 털어 넣었다.

“하….”

값비싼 찻잎이며 전통주로 수라간을 채운 황제가 한겨울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만을 고집한단 사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빳빳한 종이 위 활자를 툭툭 건드리며, 이차혁이 눈을 굴렸다. 하다 만 이야기가 그의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는 그런 종류의 기침을 참아 내는 사람이 못 되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옛날 생각이 나서야? 그 형이… 많이 닮은 것 같아서?”

“아니.”

그렇게 질문할 줄을 진작 예상했다는 듯, 매정한 목소리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전혀 닮지 않았어.”

유리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 이림범의 얼굴은 성난 사람 같았다. 이차혁은 안마 의자 등받이에 재차 몸을 파묻었다. 덩달아 무표정해진 얼굴로 그는 목소리만을 밝게 냈다.

“그렇게 부정할 거면… 누구와 닮았다는 거냐고 물었어야죠, 폐하.”

대상을 빼먹고 물은 말에 즉각 부정했으니, 사실상 그렇다고 동의한 것과 진배없었다. 저도 제 실수를 깨달았는지 이림범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차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았다.

처음 하련솔을 보았을 때, 이차혁은 아마도 이림범이 떠올렸을 사람과 같은 이를 생각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하련솔의 걸음걸이며 말라빠진 목덜미에 시선을 사로잡혔을 때, 어째서인지 오래전에 보았던 이가 떠올랐었다.

“이은재는 죽었어.”

이림범이 말했다. 입안에 잘못 들어온 돌을 뱉어 내는 듯 차가운 태도였다. 이차혁이 그에 눈살을 팍 찌푸렸다.

“은재 형한테 ‘이은재’가 뭐야, ‘이은재’가….”

그러곤 심란한 얼굴로 종이 더미를 내려놓았다. 무릎 위로 떨어진 용지들이 안마 의자의 진동에 따라 덜덜 떨리다, 낱장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약간의 불쾌감과 짙은 그리움에 사로잡혀 이차혁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림범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차혁의 말이 맞았다. 그는 하련솔이라는 낯선 무화를 통해 죽은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하련솔을 지켜보며 그와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때면 어째선지 옛날의 인연을 찾게 되었다. 제 기억을 들여다보게 되고, 과거를 추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이은재와는 생판 다른 남자였다. 외모만 보더라도 그랬다.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이림범에게 기억의 책장이 있다면 이은재는 서랍 가장 구석진 자리에 머무르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어린 날 이림범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여름 볕에 마구 그을린 피부는 까무잡잡한 편이었고, 계곡 가장 깊은 곳까지 헤엄을 쳐 왕복할 만큼 운동 신경이 빼어났다. 튼튼하고 건강한 데다 쾌활해서, 이림범은 그를 무척 든든한 형으로 여겼다.

당시 이은재는 동네 모든 아이의 우상이었고 친구였다. 대장 노릇 하길 좋아하면서도 다정하게 남을 잘 챙기는 성격 덕분이었다. 이림범을 쫓아 대뜸 찾아온 이차혁도 선뜻 놀이에 끼워줄 정도였다. 그러나 이은재가 가장 아끼고 귀여워하는 동생은 단연 이림범이었다. 유년기, 이림범은 그의 등에 업혀 산을 올랐고, 그의 허리를 껴안고 계곡 얕은 물에 발장구를 쳤다. 여름이 가시던 날에는 대나무로 지은 사다리를 가져다가 절벽에 놓인 비밀 기지에 올려 주기까지 하던, 이은재는 가족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이미 오래전, 화마에 휩쓸려 땅에 묻힌 이이기도 했다.

전대 황제이신 아버지가 위독하단 소식을 듣기 전까지 이림범은 해외 이곳저곳을 유랑하듯 살았다. 유학길에 올라 많은 것을 배웠고 여러 친구를 사귀었다. 평범한 생활을 죄 청산하고 황제가 되기 위해 귀국한 날에, 그는 아버지의 병석이 아닌 유년기를 보내었던 시골 마을을 찾아갔다. 이은재의 묘지에 가 간만에 인사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예전의 시골 풍경은 어디에도 남아 있질 않았다. 마을 전체가 재개발로 들썩거리는지라 수십 채의 건물들에 공실 표식이 마구잡이로 붙어 있었고, 그나마 익숙한 건물조차 철거를 앞둔 상태였다. 이은재의 묘지가 놓인 뒷산 주변에는 고속도로가 생겼다. 쌔앵쌔앵 차가 오가는 소리 때문에 시체도 벌떡 일어날 성싶었다.

그 모친의 묘와 나란히 자리한, 이은재의 묘는 작고 낮았다. 그마저도 따로 찾아오는 친지가 없는지 잡초로 뒤덮여 엉망진창이었다. 이림범은 반나절에 걸쳐 그 묘를 정돈해 주었고, 화병을 놓고 생화를 꽂아 두었다. 작은 묘비 앞에 참외 하나를 깎아 주기도 했다. 그러곤 늦은 밤까지 묘지를 노려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무덤 위로 벌떡 일어나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하련솔은 이은재가 아니었다. 이은재일 수가 없었다. 이은재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지금의 이림범, 혹은 이차혁만큼은 키가 컸을 터였다. 붕어빵 한입에 궁상을 떠는 가난뱅이 무화가 아니라,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여자 친구를 수도 없이 사귀어 온 쟁쟁한 도련님으로 컸을 터였다. 이림범이 기억하기로 당시 이은재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 외동아들이었다. 시골 동네의 부지 절반이 이은재네 아버지 소유였더랬다.

그가 하련솔에게서 이은재를 보는 이유는 사소하고 단순했다. 그저, 이제는 황제의 몸으로 이곳 문정궁에 정 붙일 데를 찾고자 함이었고, 하필 하련솔의 나이가 이은재가 살아 있었더라면 당도했을 나이라, 그것만으로도 그리움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은재 형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랬을까, 저랬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착각을 품은 게 틀림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성격에 비슷한 부분이 미세하게 있기는 했다.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다가 계속해서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나, 고작 두 살 차이에 불과한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그게 전부였다.

“…….”

문득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차혁의 다리를 주무르던 안마 의자가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주기적인 소음이 그치자 이차혁도 어색함을 느끼는 듯 자세를 뒤척거렸다. 발목 아래로 쏟아져 내린 귀한 원고를 내려다보며, 이차혁이 말했다.

“너무 좋아하지 마.”

의심의 여지 없이 경고였다.

“우리 약속한 거 잊지 마.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무화는 나야.”

툭툭 뱉어져 나온 목소리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엔 고요한 기류만이 남았다. 황제는 대답 대신 침묵하길 택했고, 무화는 그를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아무튼, 선물 고마워.”

길게 뻗은 눈썹을 으쓱 들어 보이며 이차혁이 말했다. 그의 눈짓이 봉숭아색 단상에 가 꽂혔다. 조금도 이차혁의 취향이 반영되지 않은, 보여주기식 의복이었다.

긴 한숨을 쉬며 이림범은 태블릿PC 화면을 꺼 버렸다.

여러 의미에서 이차혁은 단점 하나 없이 완벽한 무화였다. 겉보기에 황제와 잘 어울리는 한 쌍임은 물론이고, 황제를 놓고 시기나 질투를 품는 법이 없었다. 총애받는 무화로서 그는 날카로운 말에 긁히지 않고 은근한 눈짓이며 공작들에 아랑곳조차 하지 않으며 맡은바 제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면서도 황제의 성미를 잘 알기에, 필요한 조언을 적재적소에 건네주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이차혁의 조언이 옳다는 걸 이림범은 알았다. 그의 말마따나 하련솔을 좋아해선 안 됐다. 만에 하나 좋아하게 되었더라도, 그럴수록 더욱 밀어 내야 했다. 무화들 간에 치정 싸움이 시작되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추잡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림범은 뼈저리게 잘 알았다.

그러니 하련솔은 멀리해야 했다. 약과며 붕어빵이며, 간식 한 입에 흐뭇하니 미소 짓는 그를 그 자리에 보전하자면, 저와는 엮이지 않게 멀리 버려 두어야 했다.

긴 한숨과 함께 이림범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는 쉬운 결정을 내렸다. 더는 하련솔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와 엮이거나 그에게 빠질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하련솔은 이림범이 그리워해 온, 그 시절의 그 소년이 아니다.

무엇이건 도의대로, 규칙대로, 계획대로 해야 했다. 방패 하나 갖지 못한 무일푼의 무화를 제 세계에 끼워 넣는 것은 황제로서 그의 몫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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