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20화 (20/135)

20.

‘됐고 다 집어치우라고 해. 내가 황젠데, 왜 남의 눈치를 봐야 하지?’

늦은 밤, 침전에 앉아 이림범은 이를 갈았다. 이차혁의 경고와 과거의 기억, 그리고 하련솔의 잔상이 번갈아 머릿속을 채우는 통에 잠이 오질 않았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그는 제 주먹에 이마를 기대었다.

문득 머릿속을 채우는, 하련솔은 두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린 피부에서 풍기던 살 내음이며 무방비하게 뻗어 있던 마른 팔과 하얀 다리를 생각하면, 이림범은 아랫배가 무거워지고 손가락이 간질간질했다. 한편 아무렇잖게 내뱉는 가벼운 농담이며 어린아이처럼 콧잔등을 구기던 미소, 그 특유의 재치를 생각하면 심장이 가뿐해지고 머릿속이 해맑아졌다.

그러다가도 입천장이 씁쓸해졌다.

‘개화병은 왜 그리 심하게 앓아서는….’

마흔한 명의 무화 가운데 하나. 딱 하나다. 황제, 이림범의 마음에 들어온 무화가 딱 하나, 하련솔뿐이었다. 바꾸어 말해 그를 잘 참아 내고 제 것으로 품지 않는 것만으로도 문정궁에 일어날 사고와 소란을 죄 막아 낼 수 있단 의미였다.

그런데 하련솔이 많이 아팠다. 하련솔 본인은 제 증세를 별것 아닌 양 치부하였지만, 이림범이 보기에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가뜩이나 피부가 얇고 핏기라곤 없는 놈이, 체구도 여리여리하고 머리도 조그마해서 문짝만 한 덩치의 이림범이 느끼기엔 저와 다른 종족 같았다. 몸매는 또 어떤가, 도대체 밥이라는 걸 제대로 먹은 적이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라서는 근육이 붙을 살이라곤 한 줌 없었다.

문정궁에 와서는 제 나름대로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모양인데, 맛도 영양도 풍부한 음식을 목구멍에 퍼붓다시피 하건만 도통 살이 붙질 않으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림범이 거듭 개구멍을 찾은 데에는 그 몰골이 안겨 준 가여운 인상도 한몫 톡톡히 했다. 종종 찾아가 손발을 만져 주고 괜히 몸을 붙여 주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건강을 되찾겠거니 기대했었다. 이차혁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무화들이 그리했기 때문이었다. 개중 절반은 이림범과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개화병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런데 하련솔은 달랐다. 그 빌어먹을 눈에 도통 빛이 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무화 보다 자주 황제를 만나는 주제에 여전히 빈약했다. 오죽하면 자리에서 일으켜 앉혀 준 것만으로도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헛구역질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비실비실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발병이 늦어 그런 거야.’

쯧… 이림범이 소리 내어 혀를 찼다. 그 소리에 침전 한편에 선 시종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언제고 풀썩 잠자리에 들던 황제께서 야심한 시각까지 미간에 주름을 만드니, 크게 탐탁잖은 문제라도 생겼는지 가슴이 떨렸다.

남이사 그러거나 말거나 이림범은 끙끙 고뇌했다. 만일 하련솔이 다른 무화들과 같이, 보다 어린 나이에 개화병에 걸렸더라면 이처럼 증세에 허덕이진 않았을 텐데, 마지막 무화로 입궁한 그는 스물아홉이었다. 신체의 흐름이 뒤바뀌고 속이 뒤집히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 그러니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한 번 안으면 싹 나을 텐데.’

문득 생각이 그리 뻗쳤다.

그놈의 개구멍, 인적은 물론이고 오가는 고양이 울음소리 하나 없는 조그만 방에 놓인 더블베드 사이즈 침대가 떠올랐다. 그 너른 자리의 반절은 사실상 제 몫이었다. 황제가 찾아오거든 언제든 한탕 뒹굴라고 마련된 자리에서, 황제의 무화로 자리매김한 사내를 하룻밤 안는 일이야 제 의무이자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제가 하룻밤 옷고름을 풀어 주면 하련솔의 몸도 건강해질 것이고, 어쩌면 시력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실은 이림범도 자세히는 모른다. 이론적으로 그러저러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을 뿐, 그는 아직 어느 무화와도 몸을 섞어 보지 않았다. 무화가 아닌 그 누구와도 잠자리를 가져 본 적 없었다. 그를 유혹하는 치들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동하지를 않았다. 다른 이의 나신을 보고 그에게 제 몸을 보일 생각을 하면 속이 역겨웠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래왔다.

“…….”

하련솔의 흰 목덜미. 이림범은 잠시간 그것만을 생각했다. 보일 듯 말 듯 햇살 속에 형태를 드러내던 솜털을 생각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을 생각했다. 그 파리한 목에 열기가 오르고, 창백한 피부가 홍조로 뒤덮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니 하련솔이 보고 싶었다. 구태여 총애를 내리겠노라고 떠벌떠벌 알리지 않아도 그를 만날 방법이 있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는 황제로서 하련솔을 만나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흉부에 힘이 실렸다. 목소리를 낮게 깔며,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입궁한 무화의 얼굴 한 번 못 보았군.”

일부러 딱딱하게 목소리를 내자,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에 이림범은 마음이 뿌듯했다. 무화가 되어 지아비인 황제에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일은 불충이니, 당장 불러다 인사를 올리게 하겠노라는 말을 기대했다.

그러나 시종은 뜻밖의 말을 전해 왔다.

“이미 한 주 전에 인사를 올리라 침전으로 부른 줄로 기억합니다, 폐하. 금주 알현을 요청하는 무화의 수가 많습니다. 명단을 드릴 테니, 그들 중 한 명을 부르는 쪽으로… 재고해 보심이 어떠실까요?”

이림범의 미간에 깊은 홈이 파였다. 솔직히 말해 그는 첫 문장 이후의 말은 똑바로 듣지 않았다.

“언제 하련솔을 내 침전에 들였다는 거지?”

불쑥 다가온 질문이 날카로웠다. 시종이 흠칫 뺨을 떨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젊은 황제께서는 무섭도록 똑똑한 사내여서, 일면식 없는 무화의 이름 석 자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구나 싶었다.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리며, 시종이 설명했다.

“그게… 그 무화가 침전에 들지는 못하였습니다. 기침을 심하게 하고, 열이 펄펄 끓어 문밖에서 돌려보낸 줄로 압니다.”

“뭐?”

이림범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시종이 흠칫 놀라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여도, 그는 아무런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했다. ‘꽥’ 소리를 내며 나자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황당한 이야길 들은 탓에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시종의 말인즉슨 하련솔이 늦은 밤, 아픈 몸을 끌고 기껏 찾아왔건만 저는 소식을 듣지도, 안내를 받지도 못했다는 의미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밤 찾아드는 무화의 이름이며 나이, 성격을 안내받기가 한 주 만에 지겨워져, 구태여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한 게 다름 아닌 이림범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형이 왔으면 알렸어야지!’

개구멍의 작은 방에서 유유자적 낮잠을 자는, 하련솔이 제 발로 침전을 찾을 적에는 황제를 만나 병세를 고치고자 소원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 마른 몸으로 기침을 하고, 조그만 머리가 펄펄 끓도록 열병을 앓는 이를 가차 없이 돌려보냈다니 듣던 중 끔찍한 이야기였다. 입궁한 이래 처음으로 황제를 뵙겠다고 찾아온 무화를 소박 맞혔다는 뜻인데, 저는 그러라고 명령한 기억이 없었다.

필시, 인지도 낮고 집안 없는 무화랍시고 어느 세력이 그를 핍박했을 터였다. 하련솔이 워낙에 예쁜 얼굴과 훌륭한 미소를 가진 사내 무화라, 다른 무화들이 황제로부터 그를 떨어뜨려 놓고자 수작을 부렸는지도 몰랐다. 사주를 받아 하련솔을 면박 준 직원의 면상이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제멋대로 황제의 무화를 돌려보냈단 말이지? 개화병을 앓는 이라면 더더욱 내 침전에 들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낮은 소리로 일러 놓는 말에 시종이 쭈뼛쭈뼛 대답했다.

“당시 호위를 서던 직원이 경황이 없어…. 황제 폐하께 감기를 옮길까 염려되어 그리한 줄로 압니다. 무화를 돌려보낸 직후 폐하께 알려드렸습니다만… ‘잘됐다. 편히 자겠다. 불 끄고 나가 봐라’ 하셨습니다….”

“…….”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이림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치 빠른 시종은 험상궂게 돌변한 황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가 물었다.

“오늘 밤 침전에 들라 할까요?”

그와 동시에 이림범에게 이성이 돌아왔다. 머리 안에 빛이 드는 느낌에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곤 곧바로 제 실수를 깨달았다.

이렇게나 진지하게, 화를 내며 캐물어선 안 됐다. 무화 하련솔을 돌려보낸 일을 놓고 황제께서 성질을 부렸다더라… 시종들 사이에 곧바로 소문이 돌 터였다. 그런데 그 직후, 하련솔을 콕 집어다가 제 침전으로 오라 부르고, 밤새도록 곁에 두면 더더욱 소문이 날 게 아닌가? 여태껏 그가 직접 호명한 무화는 이차혁이 유일하기에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아니, 됐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를 내며 이림범은 태연한 척 연기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도 잠은 좀 편히 자야지. …불 끄고 나가 봐라.”

여상스러운 말에 시종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침전의 불을 끄고, 도망치듯 그가 퇴장했다. 두 손을 제 배 위에 겹쳐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이림범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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