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기침하고 열병을 앓았었다고? 대체 언제 그랬다는 거지? 혹시 밤마다 그렇게 아픈 건 아니겠지…?’
문득 이림범의 머릿속 하련솔이 모습을 바꾸었다. 몹시도 처량하고 가여운 형색으로 그는 쥐톨만 한 쪽방에 웅크리고 앉아 콜록콜록 기침했다. 열이 끓는 머리에 물수건을 대고, 아픔에 뒤척거리며 밤새 잠을 설칠지도 몰랐다….
무거워진 마음에 이림범은 인상을 퍽 구겼다. 그의 침전은 몹시 넓고 쾌적했다. 온돌바닥은 따끈따끈했고, 이불은 구름처럼 푹신푹신했다. 무엇보다도 침상이 매우 큼직했다. 옆자리에 하련솔을 눕혀 놓고, 손을 잡고 자기 딱 좋았다. 손만 잡고 자더라도 참 좋을 터였다.
‘미치겠네.’
결국 이림범은 걱정과 근심으로 잠을 설쳤다. 두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잇던 끝에, 그는 가까스로 좋은 일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의 생일이 곧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니, 문정궁 내부에서 대대적인 생일연이 열릴 터였다. 무화가 된 도리로 하련솔도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이었다. 야무진 시종이 예쁜 옷을 구해다 입혀놓으면 얼마나 깜찍할까. 그런들 제 옆자리에 앉힐 수도 없고 제 얼굴을 보여 줄 수도 없겠지만, 한 자리에 머무르다 보면 하련솔도 몸이 가뿐해질 터였다. 뱁새를 좋아하고 간식거리를 사랑하는 하련솔이었다. 햇살 아래 산책하고, 맛난 식사로 배를 채우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 게 뻔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보고팠다. 오며 가며 힐끔거리는 게 전부라도 좋으니 그가 보고 싶었다.
‘혹시 내 목소리를 바로 알아들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포장된 호기심이었다. ‘나찰사’는 황제의 먼 친척이니, 목소리가 똑같다고 의심을 해오더라도 쉽게 변명할 수 있을 터였다. 서로 혈육 관계이니 목소리도 비슷한 게 아니겠냐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기대감이 걱정을 이겼다. 개구멍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나찰사가 황제 이림범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하련솔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몹시 궁금하고 또 흥미로워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공연은 연극보다는 뮤지컬로 바꾸라고 해야겠어. 그럼 형이 보며 즐기진 못해도 노래를 들을 순 있을 테니까.’
젊은 황제는 낯선 즐거움을 느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제 생일을 기다려 본 일이 없었건만, 그날이 몹시도 기대되었다.
***
올여름 기온은 평년보다 0.5도 높았다. 폭풍처럼 쏟아지던 장맛비는 짧게 흐지부지 그쳤고, 그를 대체하려는 양 자잘한 비 소식이 잦았다. 낮이면 덥고 습한 공기 탓에 야외 활동 규제를 내릴 정도였고, 밤이면 열대야가 지독했다. 폭염 발생에 따라 온열 질환자는 늘었지만, 사망자의 수는 전년 대비 줄어들었다. 따져 보면 이림범 덕분이었다.
그의 즉위식 날에도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더랬다. 그날 빗속 황제의 모습이 생방송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 노출됐고, 수많은 동영상과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다. 특히나 면류관의 옥구슬 끝에 고인 빗방울을 검지로 털어 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해외 매거진에 소개되면서 ‘올해 가장 비싸게 팔린 사진’이란 타이틀을 얻었다. 이림범에게 쏟아진 관심은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 이야기와 함께했다. 그에 궂은 장마와 더위에 대비하고자, 재난 안전 대책 본부가 가동된 것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비서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림범은 태블릿PC를 툭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림범 효과’ 다섯 글자가 큰 폰트로 쓰인 기사문이 몇 초간 액정을 채우다가, 이내 블랙 미러로 덮였다.
“폐하를 복을 가져온 황제라 부른다네요. 여론이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전대 황제 대비 지지율도 굉장히 높습니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비서의 목소리는 밝은데, 당사자인 이림범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는 기쁠 만한 소식에도 조금도 미소 짓질 않았다. 조각상처럼 뚜렷한 얼굴 위에 걸친 표정은 무덤덤하다 못해 냉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연찮게 얻어걸린, 이 정도 행운일랑 그의 일생엔 특별한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는 몹시 운이 좋은 남자였다.
따지자면 유년기는 불운한 축에 속했다. 황후였던 어머니는 마음이 너무 여려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이었고, 애절한 순애보를 지닌 아버지는 그녀가 아닌 다른 무화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이림범은 그들 틈바구니에 제 영혼이 딱 맞게 껴 있다고 느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도 믿었다. 냉담한 아버지와 신경이 쇠약해진 어머니 사이에 그림자인 척 무릎 꿇고 앉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술래는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그들이 실패한 사랑의 유적인 저를 발견하지 않게 하는 것만이 그 시절 이림범의 목표였다. 그들 눈에 잘못 띄어 신경을 거슬렀다가는 모든 불행의 원흉이 저라는 말을 듣고 모함을 받고 매질당하고 꾸중에 시달리고 멀리, 가피 스님에게 보내어질 테니까…. 어린 날, 그는 불행했다.
그러나 13살의 초가을부터 모든 게 변했다. 그 무렵, 이림범은 신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는 어떤 종교도 깊이 믿지 않는 남자였으나, 어떤 모습을 했건 간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께서 불운 속을 나뒹구는 절 발견하고는, ‘얘 왜 이러고 있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이제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누락된 행운을 한 번에 돌려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믿음을 가져야만 이해가 될 정도로, 그의 삶은 불현듯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뜸 가족을 비롯해 남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했고, 관심과 사랑과 존중을 금세 얻어 냈다.
지옥 같던 궁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뒤에 인생은 더욱 쉽게 풀렸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면서도 ‘싫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손쉽게 얻어 내는 호의는 황자라는 신분을 드러내면 더했고, 감추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고 나니 삶에 무서울 게 없었다. 그는 진짜 지옥이 어떤 모습인지, 진짜 공포가 어떤 형태로 피부 위에 스미는지 이미 알았다. 어린 날의 상처는 그를 딱딱한 사내로 변화시켰다. 그는 매사에 감정적으로 매달리거나 움츠러드는 법이 없었다. 누구 앞에서건 시큰둥하고 냉소적이기만 했다.
그는 성취라는 것을 즐기는 방법을 모르는 채 자랐다. 낯선 타지에 편안하게 자리 잡아 좋은 평가와 애정을 받으면서도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기뻐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그의 인생은 멋진 궤도를 그리며 상승했다. 그는 무엇이건 빨리 습득했고, 똑똑한 두뇌는 물론이며 빼어난 운동 신경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 제 능력을 테스트할 기회가 시의적절하게 주어졌고, 그때마다 실수는커녕 되레 럭키 펀치로 득점을 따냈으며,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이 연거푸 생겼다.
한번 이림범을 마주한 사람은 평생 그를 잊지 못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잊기 힘든 몸매, 선망과 호의를 쉽게 얻어 내는 성격을 멋대로 펼치며 그는 하늘을 나는 듯한 삶을 살았다. 황제라는 자리에 앉는 일조차 쉽기만 했다.
즉위 이후로도 좋은 일이 술술 생겼다. 외교적으로도 마침 안정적인 상황인 데다, 이림범은 존재 자체만으로 모두가 바라 온 훌륭하고 건강한 마스코트였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 역시 그를 특별한 존재로 다루었다. 젊고, 건실하고, 유능하고 아름다운 황제를 모두가 초콜릿처럼 소비했다.
‘그럼 뭘 해? 날씨 하나 조종 못 하는데.’
짙은 물 냄새 풍기는 창문 앞에서, 이림범은 심드렁했다. 불만스러운 눈길에 담기는 문정궁 풍경은 온통 비에 젖어 축축했다.물기를 머금어 더욱 푸르러 보이는 단청도, 창틀에 닿도록 키를 키운 수국도 아름다웠다. 다소 묽다 싶게 백색이던 꽃잎이 어느새 붉은빛으로 풍성했다.
모든 생명은 꺼지기 직전에 극한의 기운을 뿜어내는데, 유독 식물이 그러했다.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한 주도 못 가 시들 꽃의 마지막 발악이 보기 좋았다.
이림범은 물방울을 머금은 수국을 아주 빤히 내려다봤다. 작은 잎사귀마다 빗물이 고여, 꽃의 머리 자체가 둥근 물 구슬처럼 보였다.
‘형이 보면 예쁘다고 좋아하려나….’
손끝으로 톡 건드리자 물방울이 한데 뭉치며 주르륵 일렬로 떨어졌다. 개구멍의 삭막하고 작은 뜰과 그 주인을 떠올리며, 이림범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를 바라보며 비서가 슬그머니 몸을 비켰다. 황실 전속 사진 기사가 얼른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문정궁 곳곳을 배경으로 황실 공식 사이트에 기재된 사진마다 국민의 관심도가 매우 높았다. 전대 황제도 훈훈하다는 평을 받긴 하였으나 이처럼 젊은 층의 사랑을 받진 못했다. 앞으로 다달이 찍어 낸 사진들은 월말에 12장을 추려 내후년 캘린더를 만드는 데에 쓰일 예정이었다.
새로운 캘린더가 완성되거든 8월 29일, 오늘 날짜는 황제의 생일날로 기록될 터였다. 요즈음은 만수성절이란 표현까진 쓰지 않는 추세지만, 일곱 번째 황제를 향한 관심도를 생각하면 옛말이 부활하고도 남을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