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토록 혜성 같은 황제의 생일날, 하필 날씨가 궂었다. 흐리멍덩한 구름을 올려다보는 이림범의 눈길도 시들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생일연’이지, 올해는 그 규모를 대폭 축소해 문정궁 내부에서 집안 행사를 지내기로 했다. 그마저도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인해 점심의 야외 행사를 취소하고 저녁 식사부터 치르기로 일정을 변경했다. 그래도 이 집안의 후궁이 마흔한 명이라, 참여 명단을 살피자면 별수 없이 성대한 감이 있기는 했다.
덕분에 문정궁의 직원 전체가 분주했다. 황제는 물론이고 무화들의 입맛과 신념, 알레르기에 주의하며 만찬을 차리고자 수라간에서 일하는 셰프와 파티셰가 전부 출근했다. 궐내 소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은 오케스트라를 대동한 뮤지컬이었는데, 황제는 그들에게 특이한 주문 하나를 내려 둔 상태였다. 극이 시작되기 전에 주연 배우들 모두 큰 소리로 자신의 역할을 소개하고 외모와 옷차림을 설명하라는 요청이었다.
그리한들 이번 생일연은 전대 황제의 그것에 비해 소박한 수준이었다. 창문 밖을 살피는 황제께서 시큰둥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비서는 느릿느릿 추측했다.
“즉위하시고서 첫 생신이신데, 지난해 생일연과 비교하자면 워낙 단출한 듯합니다. 특별히 추가할 것은 따로 없을까요?”
기분을 풀어 주고자 조심스럽게 질문하자마자, 이림범은 난데없이 성질을 부렸다.
“내 아버지야 오늘내일하던 지병 걸린 늙은이였으니 생일이 축하할 일이었겠지. 내 첫 생일연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같은 질문을 당일까지 반복하는 거지? 앞으로 생일연이든 생일 파티든 육십 번도 더 할 텐데, 무얼 그리 힘주냔 말이야.”
경고처럼 떨어져 내린 긴긴 힐난에 비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날카롭게 들리는지, 차라리 닥치라는 욕을 짧게 듣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습니다’ 말하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괜히 한마디 더 거들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몰랐다.
‘어우…. 저 성질머리를 내가 무슨 수로 풀어? 입이나 다물고 중간이나 가야지….’
비서의 생각이 옳았다. 황제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우중충한 하늘과 하련솔, 두 존재로 가득했다.
비가 오지 않아 야외 행사를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한들, 하련솔이 참여할 수 있는 놀이는 없었다. 승마도 양궁도 사생 대회도 맹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종목이었다. 그래도 한과며 매실차를 입에 달고 정자에 앉은 모습을 보고 싶긴 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좁은 방 안에만 처박혀 있어, 바깥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이림범의 시선이 창문 너머 바닥에 꽂혔다. 잔디가 깔리고 고운 흙이 깔리고 돌길이 깔린 온 사방 어디에도 눈먼 이를 위한 장치는 없었다. 하다못해 길거리만 나가 보아도 노란 점자 블록이 횡단보도마다 놓였는데, 문정궁에는 그 수가 무척 적었다. 애초에 행인을 생각지 않고 지은 궁인지라 교통약자법을 턱걸이하듯 지킨 결과였다.
“이러니 처박혀서 나오질 못하는 거지.”
큰 어깨를 떡 벌리고선 뒷짐을 진 채, 노인처럼 혼잣말하는 그의 뒤로 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폐하, 이동하시지요.”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림범이 흔쾌히 대꾸했다. 아침 회의 이후로 1분에 한 번씩 손목시계만 바라보았으면서 능청이었다.
용 꼬리처럼 기다랗게 줄지은 하수인을 등 뒤에 달고, 이림범은 여유롭게 움직였다. 무화들을 모두 모아 놓은 전각까지는 그의 걸음으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든 호위며 뒤를 따르는 시종들은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지만, 이림범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조명 불빛이 따듯한 전각 앞에 도착해 이림범은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가볍게 털었다. 전각의 문이 활짝 열리고, 성큼성큼 들어서자 줄지어 앉은 무화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전원 입을 딱 다물더니 얼른 고개 숙였다. 금방이라도 합창하며 인사를 할 기세이기에, 이림범은 손짓 한 번으로 모든 말을 거절했다.
대신에, 그는 가장 안쪽에 마련된 제 자리로 걸어가며 식탁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양채림 실장이 어느 정도 지정하긴 했겠지만, 저들끼리 섞여 앉은 순서가 서열순서겠거니 생각됐다. 황제의 자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차혁이 자리하는 식이었다.
황제가 직접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자 몇몇 무화들은 얼굴을 붉혔고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긴장한 듯 창백해졌다. 그들 모두가 저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이림범은 쉽게 느꼈다.
어떤 상황에서건, 어느 세대에서건 무화는 황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병증이 지뢰인 그들에겐 황제의 곁만이 안전지대다. 이 넓은 문정궁 내부에 함께 주거하기만 해도 상태가 미미하게 호전되어, 죽지 않겠다 싶을 정도는 되지 않던가. 큰 전각에 함께 모여 앉으면 그보다 더 나아질 터였다.
무화들의 입장에서야, 세 번째 요청을 해 침전으로 찾아든 밤에도 발을 쳐 놓고 잠든 숨소리만 들려주던 황제였다. 그런 그가 자신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고,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얼굴을 살피며 시선을 마주치니 상기되는 게 당연했다. 여태껏 매몰찬 태도를 보여온 황제의 내면은 어쩌면 다정다감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몇몇 어린 무화들은 들뜨기도 했다.
정작 이림범은 숨은그림찾기 하는 심정이었다.
‘뭐야. 어디 있지?’
한 발 두 발, 무화들 틈을 지나며 일일이 얼굴을 살피는데, 하련솔이 보이지 않았다. 변두리 개구멍에 지내는 무화이니 구석 자리에 있겠거니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입지가 제법 좋아진 모양이지.’
하기야 그 귀여운 이목구비에 예쁜 턱, 정 많은 성격으로 꼴등 무화라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됐다. 저벅저벅 상석으로 향할수록 이림범은 기분이 좋아졌다. 만찬을 앞에 놓고, 커다란 눈으로 허공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하련솔을 만날 차례였다.
이내 그의 두 발이 제 자리에 닿았다.
“…….”
김이 폴폴 오르는 너른 반상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있어야 할 이를 찾지 못한 탓에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그는 지침대로 움직였다. 크고 튼튼한 제 의자에 몸을 앉히고, 무표정한 얼굴을 들었다. 그러곤 조금 전 꼼꼼히 확인했던 무화들의 면면을 다시 살폈다.
“…폐하.”
말없이 침묵을 길게 늘이는 그를, 옆자리의 이차혁이 아주 작은 소리로 불렀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저를 보는 그를 확인하고, 이림범은 한 차례 헛기침했다.
“다들 시장할 텐데, 식사들 하지.”
그러곤 듣기 좋은 인사말을 죄 생략하고 가타부타 수저를 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와 대화를 섞어 보겠다고, 학익진이라도 펼치는 양 황제의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무화들은 어리둥절했다. 서로 간에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다가, 황제를 따라 젓가락을 들 뿐이었다.
이내 수많은 무화들이 황제의 그림자가 됐다. 황제의 젓가락이 쌀밥에 닿으면 저들도 밥을 떠먹고, 민어구이 옆구리를 뒤적이면 저들도 슬그머니 생선 살을 집는 식이었다. 개중에서도 채식주의자 무화는 애꿎은 쌀밥만 한 톨 두 톨 씹을 뿐이었다.
무화들의 하는 양을 알고, 이림범은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일제히 전각 내부를 울렸다.
“좀.”
이림범이 크게 말했다.
“편하게들 먹자고. 뭐 눈칫밥 먹고 체할 일 있나?”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무화들이 단체로 우물쭈물 식기를 쥐고 망설이기에, 이림범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리고 제 옆자리의 이차혁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숨 같은 콧김을 쉬며 이차혁이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국 한 숟갈을 떠 보란 듯 입에 넣었다. 그제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무화들이 하나둘 자유로운 식사를 시작했다.
속으로 한숨을 삭이며 이림범은 생각 없이 젓가락을 집었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숨이 막히는 건 도리어 그였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떡갈비를 뜯긴 했지만,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이 만찬이 모두 누구 좋자고 차린 음식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큼, 크흠….”
나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제를 향해, 이차혁이 거듭 눈치를 보내왔다. 그래도 이림범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을 들어 어느 누구를 살피지도 않았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사람 같았다.
황제가 이마를 찡그리자,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양채림 실장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양 상궁.”
실장이라는 직함 대신, 그녀를 상궁이라 칭하는 이는 이림범이 유일했다. 황제가 우울한 음성으로 저를 부름에 양 실장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고 그녀는 기립한 상태임에도 키의 높낮이에 차이가 작아, 크게 허리를 숙일 필요가 없었다.
슬그머니 기울인 양 실장의 귓가에 대고 이림범이 속삭였다.
“무화들 머릿수가 부족하지 않나? 어떻게 된 거지?”
양 실장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곤 힐끔 전각 내부를 훑어보고, 다시금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리둥절한 기색이 눈빛에서 묻어났다. ‘그걸 어떻게 알아챈 건지 신기하다’하는 듯한 태도에 이림범은 심기가 상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련솔의 빈자리를 못 느낄까? 그처럼 눈에 띄는 외모의 무화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한데 일 잘하는 양 실장이 버벅거리는 모양새가 영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