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23화 (23/135)

23.

침묵 끝에, 그녀는 한 차례 목을 가다듬었다.

“…예, 하련솔이라는 무화 하나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알아. 그런데 왜 안 온 거냐고.”

“점심에 전달한 공지를 듣고… 필수로 참석하진 않아도 된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왜?”

당황스럽기로는 양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알기로, 하련솔은 그 이름을 따라 잘 지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긴커녕 무화들 사이에 섞이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소나무처럼 버티는 식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니었다. 싸움이나 마찰이 발생하자면 접촉이 있어야 하는데, 하련솔은 궐내 누구와도 만남을 갖지 않았다. 그의 성실한 시종, 초롱을 불러다 직접 들은 이야기니 틀림없었다.

그토록 조용한 무화의 존재를 바쁜 황제가 어찌 알고, 일일이 저를 불러다가 확인을 하는가 싶어 양 실장은 아리송했다. 그래도 황제가 직접 물을 때는 사실대로 고해야만 했다.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양 실장이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워낙 쇠약한지라, 오늘은 몸이 좋지 못하답니다.”

“허….”

이림범으로선 펄쩍 뛸 일이었다. 아니, 그럴수록 더 기어 나와서 내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니야? …하는 대거리가 치밀었지만 애써 삼켰다. 마음 같아선 성질을 바락 부리고 그놈의 개구멍에 처박혀 있을 하련솔을 불러내고 싶었지만, 당장은 질문 하나를 꺼내는 일도 삼가야 했다. 사방으로 보는 눈이 많았다.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림범은 손을 휘 내저었다. 그러자 양 실장이 안심한 듯 물러났다.

해사하게 밝혀 놓은 전각 내부가 더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심기가 상하고 나니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꼴 보기 싫고, 차려진 식사도 영 변변찮게 느껴졌다. 그래야 한다는 이유에서 수저를 움직여 음식을 먹기는 하는데, 딱히 맛도 느껴지지 않고 재미도 없었다. 용기를 내 말을 걸어오는 몇몇 무화들을 상대하느라 호응하는 목 울림을 낼 뿐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만찬이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림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달리 수다를 떨 것도 없고 후식을 즐길 마음도 없었다. 천천히들 식사하고 극장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탈주하듯 움직였다. 그리고 터덜터덜 극장으로 향했다.

문정궁 내 소극장의 2층에는 두 관객만을 위한 전용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림범의 옆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착석하는 무화는 이차혁이었다.

“폐하. 뭐가 그리 탐탁지 않으십니까?”

이차혁이 물었다. 이림범은 저를 따라 나온 그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건네줄 만한 내면의 이야기도 따로 없었다. 그저 좌석에 달린 팔 받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제 주먹에 턱을 기댔다. 그러곤 한숨 같은 콧소리를 냈다.

이차혁은 잠시간 그런 이림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제자리에 등을 풀썩 기대자 극장 내부에 적막이 가라앉았다. 무화들이 객석을 채울 때까지 그들은 가만히 침묵했다. 이내 전등이 서서히 꺼졌다.

껌껌해진 무대 위에 조명등이 켜지고 배우들이 줄지어 섰다. 주연 배우 다섯 명이 나란히 붙어서, 제가 맡은 역할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푸른 철릭을 입은 무관입니다. 키가 크고 몸은 말랐습니다. 손에는 환도를 들었고, 넓고 납작한 허리띠를 둘렀습니다. 머리에 쓴 붉은 갓에는 호랑이 수염 네 개를 꽂았습니다.”

“시복을 입은 신하입니다. 시복은 토홍색 연마로 지었고, 가슴에는 흉배를 달지 않았습니다. 둥그렇고 검은 사모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연출의 일환이겠거니 하며 관객 모두 조용히 그 모습을 구경했다. 하나같이 시력에 문제없는 이들이라, 배역의 외모 소개는 사실상 불필요했다. 조금은 지루하다는 듯, 자기소개가 다섯 명째에 접어들자 몇몇 무화가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바꿨다.

무대와 객석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이림범은 짜증스러운 얼굴을 구겼다. 물끄러미 무대를 바라보던 이차혁이 시선만 틀어 황제와 저 사이에 놓인 팔걸이를 훔쳐봤다. 덩그러니 놓인 이림범의 손끝이 그 위를 툭, 툭, 툭… 산만하게 엇박자로 두들기고 있었다.

애초에 이림범은 제 생일을 크게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오늘도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사소한 즐거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상이 죄 하련솔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련솔이 부재하니 모든 게 단숨에 지루해졌다.

소정의 목표는 만찬 자리에 앉아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는 하련솔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그가 한자리에 앉은 제 목소리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여느 무화들 사이에 섞여 황제 폐하의 기쁜 날을 축하하노라고 인사하는, 하련솔 앞에서 근엄한 척 연기하고 싶었다. 제 정체를 의심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기대됐고, 당황할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고 점잖게 질문하고 싶었다. 여태껏 속여서 미안하다고, 모두 좋아하는 마음에 벌인 장난이었다고 달래 주고도 싶었다.

‘…언제?’

긴긴 외모 소개를 마치고, 공연이 시작됐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그럴 수 있지?’

목청 좋은 배우의 노랫소리가 소극장을 울렸다. 심드렁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다가, 이림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그러자 묵직한 힘이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이차혁이었다.

“어딜 가십니까?”

옷소매에 매달린 이차혁의 손을 내려다보다, 이림범은 그를 떼어 냈다. 마저 즐기라는 의미를 담아 무대를 턱짓하고는 손쉽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금 그를 쫓고자 이차혁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른 좌석에서 일어서자마자 그는 머뭇거리며 다시 착석했다. 그러곤 검지를 뻗어 자신의 왼쪽 다리를 세게 찔렀다. 아프지 않았다. 감각이 전혀 없었다.

“…….”

이내 이차혁은 고개를 들고 무대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무대 위를 배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무대에 집중한 무화들의 뒤통수가 하나같이 어리고 젊었다. 그들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이차혁은 제 왼쪽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어둠 안에서 그의 콧잔등에 주름이 지고 이마가 일그러졌다. 낯빛이 삽시간에 검게 가라앉았다. 근래 들어 황제와의 만남이 부쩍 줄었다. 침전으로 불러 나란히 잠자리에 드는 일은 지난 열흘간 없었고, 제 침소로 찾아와 별일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일주일째 없었다.

‘일주일….’

손가락을 꼽으며 그는 제 몸에 자리 잡은 끔찍한 병이 자신을 주저앉혀 놓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차가운 식은땀이 목을 적셨다.

문득 비행기가 생각났다. 비행유 냄새를 맡으며 제자리에 나자빠진 순간, 그를 내려다보던 수 많은 승객들의 얼굴이 뇌리에 조각처럼 새겨져 있었다. 마구잡이로 저를 일으키려던 손이 안겨 주던 공포감, 건드리지 말고 눕혀 두라고 다급하게 외치던 의사, 허둥지둥 비상용 침대를 펼치는 동안 탑승이 미뤄지매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풍기던 낯선 사람들….

이제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질 않다. 아마도 평생 타인과 섞여 비행기에 오를 일은 없을 터였다. 해외로 나갈 일이 생긴다 한들 황제와 함께일 테니 그의 전용기를 타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갑갑한 심경은 그날의 기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관없는 줄 이성으로 알면서도, 이차혁의 감정은 다른 말을 했다. 그는 두 번 다시 누구에게도 제 병증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에 앉아 미라가 될 때까지 말라 죽을지언정, 볼썽사납게 절뚝거리며 퇴장하는 모습일랑 어떤 무화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는 2층의 구석 통로를 확인했다. 예상한 것과 같이 양채림 실장이 작은 무전기를 손에 쥔 채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이차혁은 차분히 기다렸다. 마침내 양 실장이 고개를 휙 들었다.

이차혁이 슬그머니 웃으며 좌석 팔 받침대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검지와 중지를 올리고 걷는 시늉을 보여 주었다. 가타부타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양 실장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은 무전기의 채널을 만져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이차혁이 할 일은 그게 전부였다. 이제 십여 분쯤 지나고 나면, 인적 드문 뒷문 앞에 직원들이 휠체어를 세워 둘 것이었다.

뮤지컬은 한창 즐거운 분위기로 이어졌다. 가만히 무대를 응시하는 이차혁의 무표정한 얼굴에 밝은 조명 빛이 번졌다. 그는 아주 조금의 노출도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몸을 뒤로 빼내었다.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어 앉자, 그림자가 그를 안아 주었다.

***

소극장 밖은 온통 어두웠다. 이른 저녁임에도 먹구름과 빗방울이 해를 모두 가려 놓아 밤이나 다름없었다. 껌껌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황제 곁으로, 비서가 바삐 다가왔다. 왼쪽에 붙어 선 비서가 장우산을 활짝 펼치자, 오른쪽으로 대나무 삿갓을 쓴 호위 실장이 따라붙었다. 황제는 그를 힐끔 쳐다본 뒤 바닥을 손가락질했고, 비서의 손에 들린 장우산을 낚아채듯 들고는 저 홀로 걷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며 뒤를 따르려던 비서는 이내 ‘쓰읍’ 하는 숨 들이켜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빗길 위에 덩그러니 남아, 그와 호위 실장은 서로의 얼굴과 황제의 뒷모습을 번갈아 살폈다. 개중 황제의 등은 곧바로 보이지 않게 됐다.

은은한 등불이 밝히는 돌길을 황제는 홀로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그는 제 손목시계를 계속 살폈다. 황실을 위해 특별 제작된 시계 안에는 때에 맞추어 피었다 지길 반복하는 무궁화가 들었는데, 저녁 시간에 맞추어 봉오리를 서서히 다물던 참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기까지 2시간 10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개구멍에 다녀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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