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내 터벅터벅, 제 발소리만이 이림범의 귀에 닿았다. 사방의 풍경이 점차 고요하고 허전해졌다. 제아무리 구석 자리 개구멍을 찾아가는 길이라 한들, 야심한 시간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인적 드문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 시종을 비롯한 직원들 모두 한데 모여 식사를 즐기기 바쁜 덕분이었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유별난 무화를 모시는 성실하고 젊은 시종이 빗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개구멍 처소 앞에 앉아, 초롱은 디딤돌에 대고 장화에 찬 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엉덩이를 댄 쪽마루에는 작은 쟁반이 놓였는데, 그 위를 덮은 밥상보가 빗방울로 흥건했다.
작은 야외 등이 쪽마루를 비출 뿐 처소 안은 그저 컴컴했다. 작은 창고에 달린 실창에서나 빛이 나올 뿐, 정작 처소의 주인인 무화가 지내는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질 않았다. 옅은 불빛이 아른아른 비쳤다가 사라지는 게 전부였다.
이림범이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자 초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곤 허둥지둥 허리 숙여 인사했는데, 공손하니 몸짓만 보일 뿐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시종에게 높은 점수를 주며 이림범은 커다란 장우산을 그녀에게 건넸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초롱이 그 우산을 건네받았다. 접어 치우라는 것인지 대신 들고 있으라는 것인지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할 따름인데, 대뜸 들이닥친 황제는 저 먼 길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초롱이 입 모양으로 ‘네?’ 하고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황제는 장난기 많은 꼬마처럼 훌쩍 쪽마루에 뛰어오르더니, 비에 젖은 외투를 훌훌 벗어 바닥에 내려놓곤 문짝 앞에 귀를 댔다.
그러자 여러 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련솔의 음성은 아니었다. 언뜻 라디오나 텔레비전 소리 같았다.
이내 이림범은 시종이 챙겨 온 작은 쟁반을 덥석 들었다. 그리고 무화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탁’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빗길 속에 홀로 남은 초롱은 제 몸집에 비해 커다란 우산을 기둥처럼 껴안고서, 멍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무화의 침소에 무턱대고 침입하자마자 이림범은 방 안을 먼저 살폈다. 전등을 꺼 놓아 컴컴한 방 한편에 하련솔이 있었다. 등받이와 둥근 쿠션이 달린 앉은뱅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어깨엔 겨울 이불을 둘렀고 발 앞에는 조그만 밥상을 둔 채였다. 왼손으로 그릇을 쥐고 오른손엔 숟가락을 들었는데, 상을 채운 음식이 전부 이림범의 눈에 익었다. 그의 손에 잡힌 밥그릇엔 쌀밥과 구운버섯, 떡갈비가 한 장 들었다. 네모난 접시 위에는 민어구이가 놓였는데, 시종이 생선 살을 전부 발라 주었는지 뼈는 없고 흰 살만 가득했다. 그리고 도시락 그릇 네 칸에 나물 네 종류, 종지 안에 김치가 전부였다.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무화를 위해 음식이 일부 전달된 듯한데, 이림범이 보기엔 턱없이 모자란 식사였다.
방의 주인인 하련솔은 손님이 온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무릎 위의 태블릿PC 화면을 어찌나 빤히 들여다보는지, 금방이라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화면 안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읊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느라, 하련솔은 외부인이 내는 소리를 조금도 듣질 못했다.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흐린 실루엣이라도 보기 위해 애쓸 뿐이었다.
목소리를 힘껏 낮추고서, 이림범이 대뜸 외쳤다.
“뭐 그리 바쁘다고, 무화가 되어선 지아비의 생일연에 코빼기도 안 비쳐?”
“어어?”
그러자 하련솔이 번쩍 고개를 추켜들었다. 깜짝 놀란 듯 어깨를 퉁기더니,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이림범은 제 계획은 어찌 됐건 물거품이 되었겠거니 생각했다. 하련솔이 곧바로 웃어 보인 것이었다. 변조한 목소리의 주인을 쉽게 알아채고, 그는 반가운 듯 얼굴을 밝게 폈다. 남의 속도 모르고서 즐거운 기색이었다.
표정을 살필 줄을 알아야 눈치를 볼 텐데, 문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웬일로 여길 다 왔어? …아, 황제 폐하 생일이라서 입궁한 거야?”
나찰사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하련솔이 추측했다. 괜스레 마음이 뜨끔해, 이림범은 목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그래. 맞아.”
“근데 왜 여기로 왔어? 폐하께서 뭐라고 안 해?”
“황제가 그렇게 속 좁은 놈인 줄 알아?”
쯧쯧쯧… 혀를 차며 이림범은 제 머리칼에 튄 빗방울을 털어 냈다. 그러곤 방 안 풍경을 휘 내려다보았다. 불이란 불은 다 꺼 놓고는, 혼자 식사 중인 모습이 영 궁상맞아 보였다.
“그러는 형은 왜 만찬 자리에 안 나온 거야?”
그렇게 묻자, 하련솔이 주춤거렸다. 하얀 손끝이 태블릿PC 모서리에 닿았다. 만질만질 애먼 액정을 쓰다듬으며 그가 대꾸했다.
“곧 이혼할 차례라서 이거 보려고….”
“뭐?”
일순 이림범의 등줄기에 소름이 올랐다. 이혼을 하겠다니? 황제를 버리고 궁에서 나가 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수십 가지 가정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러나 하련솔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태블릿PC를 들어 보일 따름이었다. 화면 안에서 정장을 입은 두 남녀가 서로를 노려보며 다투고 있었다. 침 튀기며 대사를 뱉는 여배우의 얼굴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지금은 50대의 중년 배우가 되었는데, 화면 속 모습은 그저 파릇파릇했다. 그만큼 오래된 옛날 드라마였다.
“이리 와, 앉아. 막 재밌어지려고 하던 참이야.”
한 박자 늦게 이림범은 제가 착각했음을 알았다. 이혼을 한다는 게 제가 하겠단 말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일어날 일인 모양이었다. 허탈감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대체 언제 적 드라마를 지금 보고 있어?”
“엄마랑 같이 보던 드라마인데, 마지막까지 다 보질 못했거든.”
“왜?”
“방영일 전에 돌아가셔서.”
군말 없이 이림범은 하련솔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가져온 쟁반은 반상 한편에 올려 두었다. 밥상보를 거두자 작은 산을 이룬 한과와 식혜가 드러났다. 부지런한 초롱이 야무지게 얻어 온 모양이었다.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그는 하련솔과 같이 작은 빛이 나오는 화면을 나란히 응시했다. 정해진 대본대로 움직이는 배우들은 무척 바빠 보였다. 그 모습을 한가로이 구경하며, 이림범이 재차 말문을 열었다.
“나도 엄마 없어.”
“…어?”
“그래도 황제의 생일연엔 갔지. 그게 출석 안 할 이유는 안 된다는 뜻이야.”
“뭐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애가 어디 있어?”
이번에 실소하는 이는 하련솔이었다. 제가 실언을 했나 하고 이림범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뜬금없는 이야기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너는 참 특이해’… 들릴 듯 말 듯 속삭이곤 말았다.
태블릿PC를 제 무릎 위에 똑바로 받쳐 두고, 하련솔은 반상 위로 팔을 뻗었다. 그러곤 조금 전 달그락 소리를 내며 추가된 메뉴를 찾아 이곳저곳을 더듬거렸다. 그에 이림범이 곧장 그의 손에 한과를 쥐여 주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련솔은 손에 들린 것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이림범은 하련솔을 죽이기 위해서는 조약돌 하나와 독약만 있으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돌에 독을 묻혀 내민다 해도 넙죽 입에 넣고도 남을 테니 말이었다.
“맛있어?”
코웃음을 섞어 건넨 말에,
“응! 진짜 맛있다. 너도 좀 먹어.”
바삭바삭 과자 부스러지는 소리를 섞어 하련솔이 즉답했다. 그러곤 재차 긴 대사가 터져 나오는 드라마에 이목을 집중했다.
그의 말대로, 이림범이 손 뻗어 과자를 집었다. 만찬 자리에서는 입맛이 없어 쳐다도 보지 않았던, 분홍빛 유과가 유독 통통해 보였다. 장소가 변했다고 같은 과자의 맛이 달라지진 않았을 텐데, 어째선지 더 입에 넣고 싶은 외형이었다.
한 입, 앞니로 끊어 베어 물자 입 안이 온통 달콤해졌다.
‘달다….’
그제야 이림범은 수라간 셰프들의 솜씨를 인정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 유과는 지나치게 맛있었다. 한입에 넣고 두어 번 씹으면 입 안에서 녹아 금세 사라져 버렸다.
달달한 입맛을 쩝 다시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어깨에 제 몸을 툭 기댔다. 완전히 기대었다간 깔려 질식할까 봐, 적당히 팔뚝을 맞대고 관자놀이만 기대었다. 묵직한 체중을 느낀 듯 하련솔이 입꼬리를 올렸다. 별반 말없이, 그는 옛날 드라마를 봤다. 이림범은 아주 빤히 그의 옆얼굴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련솔의 얼굴에 혈색이 더 도는 것도 같고, 맛난 음식을 가득 먹어서인지 표정도 더 큰 행복에 풍족한데, 뺨은 여전히 수척해 보였다. 아리송한 기분이 되어 이림범이 물었다.
“형은 씨름 선수만큼 많이 먹는데, 왜 살이 안 쪄?”
“칭찬이야, 욕이야?”
“손도 작고, 키도 작고. 그동안 안 크고 뭐 했어?”
“시비 걸지 마.”
그러곤 하련솔이 태블릿PC의 방향을 살짝 틀어 보였다. 무척 몰입한 듯 입을 벌리고 시청에 열중하는 하련솔과 달리, 이림범은 드라마에는 흥미가 없었다. 귀한 시간을 쪼개어 찾아왔건만 드라마 삼매경인 하련솔이 야속할 정도였다.
풀이 죽고 마음이 심드렁해져, 이림범은 천천히 그에게 기댔던 고개를 떼어 냈다. 그러곤 한숨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적당히 숨을 좀 돌리고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제는 하련솔이 그에게 제 머리를 기대어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