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타인의 머리 무게가 이토록 기분 좋게 느껴질 줄을, 이림범은 몰랐었다. 무어에 홀린 사람처럼 이렇게 충동적으로 개구멍을 찾아온 스스로가 이상하게 생각됐다. 하련솔의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종일의 심술이 싹 풀리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유년기 이림범은 늘 화가 나 있었고, 심술 많고 겁도 많은 소년이었다. 버려지다시피 깡촌 절간에 보내진 뒤 그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갖은 감정과 고통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을 때마다 그는 계곡을 따라 산길을 내달렸다. 저를 달래 줄 이를 무작정 찾아 쏜살처럼 내달리고 또 달렸다.
“너 이렇게 나랑 있어도 돼? 황제가 너 찾겠다.”
옛날 생각에 잠긴 이림범의 손에 하련솔의 손이 닿았다. 손끝이 참 차갑고 딱딱했다. 어울리지 않게 굳은살이 꼼꼼히도 박인 손을, 이림범은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무화는 너잖아.”
“에이, 무화는 무슨….”
나름대로는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건넨 소리인데, 하련솔은 곧바로 웃었다. 무척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헤실거리는 웃음이 오래 유지됐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평소보다 높게 들렸다.
“어차피 내가 없는 줄 아무도 모를 거야.”
자각이 없어도 너무 없는 소리에 이림범이 코웃음을 쳤다. 하련솔의 그런 점이 우습다면 우습고, 귀엽다면 귀여웠다.
상대가 제 매력을 헤아리는 중인 줄 꿈에도 모르고서, 하련솔은 나른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별일 없이, 좋지도 싫지도 않게 사는 거… 생각보다 어려워. 나 그냥 그렇게 지내려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아도 좋아.”
그에 비해 이림범의 반박은 재빠르고 또박또박했다.
“형이 무슨 일흔 노인이라도 돼? 얼굴만 보면 대학생처럼 생겨서는. 그냥 대학생도 아냐, 신입생 같아.”
“나 대학 다녀 본 적 없는데.”
끝에 싱글싱글 웃는 이는 하련솔이었다. 어느덧 세 개로 개수가 확 줄어든 과자를 마저 집어 먹으며 그는 즐거운 듯 굴었다. 그러다가도 드라마에 푹 빠져 침묵했다.
멍하니 입술을 벌린 무화의 옆얼굴을 빤히 보다가, 이림범은 고개를 휙 들었다. 낮은 천장과 불 꺼진 전등이 한눈에 올려다보였다. 온통 어둡고 습한 방의 공기와 어울리지 않게, 바닥에는 온돌을 땠는지 온기가 감돌았다. 하련솔의 다리를 감싼 이불 역시 두툼한 겨울용 재질이었다.
“어디 아파서 못 나온 건 아니고?”
가만히 눈 굴리다 이림범이 물었다.
“아냐, 그런 거….”
하련솔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멋쩍은 듯 이불을 끌어 올려, 제 목 위까지 덮어 버렸다. 지면에 아직 여름 볕이 남은 듯 더운 저녁인데, 하련솔은 홀로 겨울을 나는 듯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 그가 이어 말했다.
“원래 비 오는 날은 기운이 안 나.”
“왜?”
“그냥, 어…. 원래 물을 무서워해.”
“아아….”
그 순간 이림범은 제 눈에 씐 일말의 의심마저 모두 걷히는 걸 느꼈다. 하련솔에게서 수색이라도 하려는 양 찾아보던 죽은 이의 흔적이 모두 떠났다. 더는 그에게서 남을 훔쳐볼 여지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은재 형이 아니야.’
이은재와 하련솔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린 날, 계곡물을 무서워하던 이림범을 달래며 그에게 수영을 알려 준 이가 바로 이은재이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그의 별명이 물고기였고 인어였다. 그는 그만큼 물을 좋아했다. 비 오는 날에도 살창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으며 ‘놀자, 놀자’ 이림범을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완벽히 다른 사람임을 인지하고 나면 제 감정이 사라지매 허탈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가 않았다. 저만의 생각에 빠져 침묵하는 황제의 어깨에 기대어 종알종알 수다를 이어 나가는 하련솔은 그저 하련솔이었다.
“밖에 비 오는지 눈 오는지 모르고서 집에서만 지내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평화로운 말을 이어 나가는 얼굴이 보송보송하니 귀여운 것도 여전했다.
혹자는 그를 두고 기력 없고 패기 없는 남자라 할 것이었다. 이림범이 만나 온, 남을 재단하길 좋아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분명 그럴 터였다. 하지만 하련솔을 보면, 그는 그저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많이 지친 사람이었고, 꽤나 착한 사람이었다. 물이 무섭고 비가 싫다니, 그 점마저 매력으로 느껴지매, 이림범은 이제 하련솔이 특별히 사랑스러운 건지 제 감정이 유별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상념에 빠져 이림범은 가만히 몸을 굳혔다. 제 어깨에 기대어 붙은 하련솔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무표정했다. 그러나 평소보다 높게 낸 목소리는 웃고 있는 사람처럼 다정했다.
“형. 내가 수영하는 법 알려 줄까?”
그러자 하련솔이 즉답했다.
“사양할게. 물놀이는 질색이야, 나는….”
어차피 갈 일이 없긴 하지만, 만에 하나 간다 한들 눈이 멀었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기운 빠지는 이야기를 멈추고자, 이림범이 말을 돌렸다.
“약은 잘 마시고 있어?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응. 나 지팡이도 받았어. 3단으로 접혀서 아주 편해. 궁 안에는 부족한 게 정말 하나도 없는 거 같아. 뭐든지 다 있어.”
제아무리 하련솔이 하는 말이래도, 그건 참 듣기에 이상한 소리였다. 황제인 이림범이 보기에 이곳은 부족한 것투성이에 무척 폐쇄적이고, 또 그만큼 답답한 장소였다. 그런데 개구멍에 틀어박혀 지내는, 마흔하고도 한 번째 무화가 그 풍족함에 감동하다니 참 이상했다.
그들 사이가 가까운 탓에, 이림범이 내쉰 작은 한숨이 하련솔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이내 빗소리가 어두컴컴한 방 안에 스몄다. 태블릿PC의 직사각형 화면 속에선 인물들이 대본대로 움직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련솔의 숨소리가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이림범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지나치게 그에게 매료되어, 숨결 한 조각까지도 천둥처럼 받아들인단 의미였으므로.
그러고 보면 참 희한했다. 내도록 하련솔의 얼굴만을 바라보는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질리지도 않았다. 하련솔은 볼수록 어여쁜 남자였다.
‘이 정도면 절세미인이라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마저 떠오르는데 문득,
“알았어.”
하련솔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눈 두어 번 깜빡이는 사이 그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몰입한 이림범이 내쉬는 숨결이 그의 이마에 곧바로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재차 흔들거렸다.
얼굴에 꽂히는 시선을 느낀 사람처럼 하련솔은 부끄러워했다. 멋쩍은 듯 재차,
“…알았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만 쳐다보라는 말을 돌려 했다. 그래도 이림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련솔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눈썹을 아주 약간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휙 들었다. 그러곤 이림범의 얼굴을 마주했는데, 눈동자는 미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아 상대의 관자놀이 부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얼굴 뚫리겠다, 그만 쳐다봐.”
답지 않게 기세 좋은 태도였다. 그렇게 행동하면 나찰사라는 이름을 가진 착한 동생이 얼른 물러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명료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련솔의 시선 위치에 맞추어 고개를 슬쩍 내리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고 스스로 느끼고자 했다.
그리고 이림범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도대체 어떻게 이제까지 조용히 살아온 거지? 왜 아무도 형을 몰라본 거야?”
“무슨 헛소리야, 진짜.”
이림범이 보다 명쾌하게 고쳐 말했다.
“남자가 돼서 이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가난하게 지낼 수 있었느냔 말이야.”
“…….”
그대로, 하련솔이 입을 벌린 채 동작을 멈췄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인데, 멀어 버린 눈동자는 바삐 좌우로 흔들거렸다. 제 태도를 읽어 내려, 표정을 읽어 내려 애쓰는 무화의 두 뺨을 이림범이 부드럽게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조금이나마 저를 살펴볼 수 있게끔 각도를 맞추었다.
“형.”
그대로 코끝이 닿도록 얼굴을 맞대자, 약한 숨결이 이림범의 인중을 적셨다. 손바닥을 통해 하련솔의 뺨이 단숨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파서 열이 났을 리는 없었다, 이림범은 그 열을 식혀 주는 황제이므로. 그러니 그가 얼굴 붉히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싶었다. 당황하고 불쾌해서인지, 부끄럽고 수줍어서인지, 혹은 그저 놀랐을 뿐인지. 그의 눈빛을 읽고 싶었다. 저, 텅 빈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면 그의 모든 걸 읽을 수 있을 터였다. 갈증이 났다.
하련솔이 어색한 웃음소리를 작위적으로 흘렸다.
“하하…, 이러고 있으니까 꼭….”
이림범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하련솔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의자 등받이를 따라 허리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듯 그가 뒤로, 뒤로 물러날수록 이림범은 더욱 집요하게 그 입술을 쫓았다. 손안에 쥔 두 뺨은 따듯하고 보드라워 놓고 싶지 않았고, 제 입술에 꾹 짓눌린 입술의 감촉은 비교할 데 없이 좋았다.
혈기를 못 이겨, 이림범은 윗입술이 눌리다 못해 윗니가 얼얼하도록 연이어 세게 입을 맞췄다. 당황한 하련솔이 내쉰 콧김이 주는 간지러운 느낌마저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 반쯤 눕다시피 하며 바닥에 나자빠진 하련솔의 입 위로, 그저 쪼는 듯한 입맞춤을 새기고 또 새겼다. 보드랍고 하얀 뺨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던 손도 더욱 적극적으로 자리를 찾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하련솔의 볼과 턱은 물론이고 귓등까지 집어삼킬 것처럼 움켜쥐었다.
쪽, 쪽… 밀접한 살결이 내는 소리가 서너 회를 넘기자 하련솔이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붉어진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