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헉….”
새는 듯한 숨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이림범은 그의 입술 새로 혀를 내밀었다. 보드라운 살덩이가 밀려들더니 꾹 다물린 앞니를 핥는 느낌에 하련솔은 몸서리를 쳤다. 꽥 소리를 지르고픈 심정을 담아 그는 손을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뻗은 손바닥이 이림범의 어깨를 밀쳤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흠칫 놀라, 이림범이 제 고개를 뒤로 물렸다. 눈앞에 가까이 놓인 하련솔의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눈동자에는 약한 빛이 들었는데, 시력이 나아져서인지 눈물로 젖어서인지 불분명했다. 더운 숨을 크게 내쉬며, 하련솔은 제 얼굴을 감싼 두 손까지도 힘주어 뿌리쳤다.
모두 앞이 잘 보이질 않는 탓이었다. 이림범의 당황한 표정을 알 수 없기에, 어리숙하게 물러서는 태도 역시 읽어 내지 못하기에, 하련솔은 크게 허둥지둥했다. 제가 처한 상황은 알 수가 없건만, 입술 위엔 낯선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구잡이로 상대를 떼어 내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다 하련솔은 제풀에 제가 나자빠졌다. 바닥에 상체를 찧는 순간 ‘쿵’ 소리가 났다.
“윽….”
볼품없이 쓰러진 그를 향해 이림범이 즉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접촉은 하련솔을 더욱 놀라게 할 뿐이었다. 어깨를 잡히자 화들짝 몸을 움츠리며, 하련솔은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그, 만, 그만….”
무너진 그를 일으켜 앉혀 주고자 이림범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하련솔은 끝내 화를 냈다.
“그만해!”
그러곤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때리기보단 밀쳐 낼 요량으로 내지른 손이 이림범의 턱에 맞았다.
“…헉….”
상처 입은 이는 그러나 얼굴을 맞은 이림범이 아니었다. 주먹에 밀려드는 얼얼한 감각에 하련솔은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무척 방어적인 태도로 그는 얼른 제 두 손을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혼란에 빠진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흔들거렸다.
“왜…. …왜 이러는 거야?”
하련솔이 물었고,
“뭘?”
이림범이 즉각 되물었다. 그러자 하련솔의 눈썹이 퍽 구겨졌다.
“아… 니, 지금, 네가 나한테…. 나한테 왜….”
몇 번을 몰아쉬어도 그의 성난 숨은 진정되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팔라지기만 했다. 크게 놀란 탓에 다시금 몸이 아파 왔다. 목덜미가 돌처럼 굳는 듯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등허리로 차가운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는 더는 춥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더웠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대한 당혹감, 제 육신을 멋대로 만져 대는 태도에 의한 성화,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쳤다는 죄책감이 하련솔을 부끄럽게 했다.
그에 비해 이림범은 덤덤했다. 손등으로 맞은 쪽 턱을 쓸며 그는 묵묵히 고개 숙였다. 무릎을 반쯤 꿇고 앉아, 저로 인해 무너진 무화를 가만히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러곤 당장 떠오르는 대답을 뱉었다.
“내가 그러고 싶었나 보지.”
“뭐?”
“내가 형을 좋아해서, 그래서 그랬나 봐.”
“뭐…?”
예측성 답을 내놓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채웠다. 그래도 별수 없는 진심이었다. 이림범은 제 행동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대뜸 처박은 입맞춤일랑 명확한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벌인 짓이었다. 어쩌면, 저를 둘러싼 누구의 그 무엇도 선물이 되어 주지 못하는 생일날에, 기분 좋은 일 하나쯤 일으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이 저를 거절할 것이라곤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저를 받아 주리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이 난데없는 냉담함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하련솔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풍성한 머리칼이 죄 흐트러지고 반듯하던 이마에 구김이 진 채,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뻔뻔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던하던 사람이 입맞춤 한 번에 울상이 됐다.
이내 어두운 방 안 가득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림범으로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아리송한 침묵이었다. 어깨가 절로 무거워지고 속이 끈에 조인 듯 답답해졌다. 그는 한 번도 상대의 말을 간절히 기다려 본 적 없었다. 보통 그가 누군가와 엮일 때, 기다림은 오롯이 상대의 몫이었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명패 없이도 그는 언제나 환영받는 남자였다. 과장 한 숟갈 보탬 없이 장담하건대 세상 모두가 이림범을 사랑했다. 이림범에게 무엇 하나 주지 못해 안달을 냈고, 이림범이 건네는 사소한 관심 한 조각에 목을 맸다. 그러니 하련솔도 당연히 저를 좋아해야 했다. 황제라는 신분을 감추고 만나더라도, 그는 저를 좋아하고 저에게 빠져야만 했다. 입을 맞추었다 해서 인상을 굳히고 저를 밀어 내선 안 됐다.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으로,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지를 고민해선 안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련솔은…. 첫 만남에 그랬듯이 언제고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치는 불청객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하련솔은….
그 착한 성미와 다정한 목소리로 용기 내어,
“그만 돌아가 줘.”
힘겨운 축객령을 내려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제야 이림범은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상냥하고, 연약하고, 착한 이가 내뱉는 냉정은 더할 수 없이 센 것이었다. 성질 나쁜 이가 침을 뱉건, 무뚝뚝한 이가 돌아서건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런 치들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하련솔의 무표정을 이길 순 없을 것이다.
하련솔은 아주 미세한 반응만으로 이림범의 정신세계를 찢어 놓았다.
“형.”
그렇게 하련솔을 부르자마자 이림범은 제 목소리의 메아리에 당황했다. 구걸하는 이처럼 간절한 음성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것이었다.
난생처음 맞은 퇴짜에 뺨이 얼얼했다.
“형. 화났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서 이림범이 물었다. 그답지 않게 어수룩한 척, 말끝을 늘이며 애교부리듯 건넨 말이었다. 그래도 하련솔은 단호했다. 묵묵히 고개를 내젓더니,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불을 잡아 쥐었다.
“미안한데… 혼자 좀 쉬고 싶어. 그만 가 줘.”
이림범에게 남은 것이라곤 수치심뿐이었다. 목덜미를 시뻘겋게 붉히며,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련을 못 버렸다. 애써 목소리를 내어 ‘형’ 하고 불러 보았더니, 하련솔은 마음이 약해진 듯 입술 끝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잘 자.”
어른스럽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그 다정한 태도는 이림범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어린 천둥벌거숭이로 느끼게 했다. 더 버텨 봐야 고집쟁이 어린애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 이림범을 일으켜 세웠다. 협박이 아닌 뭉근한 분위기를 못 이겨 그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잠시간 침묵하다, 문고리를 밀었다.
여름밤의 축축하고 선선한 공기, 쏟아지는 빗소리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래도 하련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표정을 감춘 그의 정수리가, 떠나는 이를 잡을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더는 그의 밤을 방해할 수 없어, 이림범은 순순히 퇴장했다. 구부정하게 허리 숙인 채 좁은 쪽마루에 서, 바람이 새지 않게 단단히 문을 닫고 몇 초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불 꺼진 처소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자책인지 실망인지를 하며 그는 벗어 두었던 구두를 신었다. 그러자 작은 창고의 판문이 열리더니 시종이 얼굴을 내밀었다. 떠나는 손님의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곧바로 쪼르르 달려 나온 시종의 손에 각을 맞춰 접어 놓은 장우산이 들려 있었다. 이림범은 제 우산을 심드렁히 돌려받았다. 그러곤 우산 펴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꽉 묶인 것을 몽둥이인 양 덜렁 쥔 채 걷기 시작했다. 당황한 시종이 저를 미친놈 보듯 하건 말건 상관없었다. 응당 있어야 할 곳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떠나올 때와 달리 황제의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추적추적 떨어진 빗방울이 그의 어깨를 적셨다. 문정궁의 주인이 된 이래 처음으로 맞는 후회였다.
***
어느덧 하련솔은 햇볕이 잠을 깨우는 아침에 익숙해졌다. 그는 그것을 ‘비싼 기상’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껏 살아오며 익히기로, 제 방에 들이기로 햇볕만큼 비싼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고시원에서 생활할 때는 창문의 유무에 따라 방값이 변했고, 원룸촌 반지하에 숨어들듯이 몸을 눕힐 때면 정오가 아니고서야 방에 드는 빛이 없었다. 새벽과 저녁을 분간하며 살자면 웃돈이 필요했다.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탓에 ‘한솔’은 감옥보다 못한 방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하련솔로서 자리한 문정궁은 달랐다. 이곳은 같은 서울 안에 자리했다곤 믿을 수 없게 색다른 세상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피부 위를 데우는 볕이 그의 잠을 깨웠고, 어슴푸레한 저녁이면 다정한 기운이 온 사방에 감돌았다. 새벽녘이면 나무와 담장 곳곳을 누비는 바람이 풍금 소리를 흉내 내는데, 그 소리에 잠에서 깰 때면 솜털이 삐죽 서곤 했다. 창문을 열어 두면 풀 내음이, 닫아 두면 한옥 자체에서 풍기는 뭉근한 나무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기상에 값을 매기자면 매우 비쌌다. 아침부터 야밤에 이르기까지 하련솔은 제가 누리는 모든 것에 값을 매겼고 그것들에 감사했다. 다른 무화들이 들었더라면 지지리 궁상이라 웃었겠지만 하련솔은 진지했다. 문정궁에 온 이래 그는 기분 나쁜 아침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록이 오늘 깨졌다.
“후우….”
침상 위에 누워 그는 우울하게 기상했다. 잠을 설친 탓에 어젯밤의 속상한 기분이 오늘까지 이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