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기분은 울적하기 짝이 없건만, 시력은 전날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매일 새로운 효과를 기대하며 한약을 먹고 두 눈에 안약을 짜 넣기는 하였지만, 이처럼 호전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을 반짝 뜨자마자 천장의 서까래 줄이 명확하게 여섯 개 보였다.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들보의 존재도 그제야 알았다.
“…….”
그래도 하련솔은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의사를 통해 안약을 가져다주게 한 일이며 한약을 지어 온 정성의 주인이 그를 착잡하게 했다. 지나간 저녁을 기점으로 더는 순전히 좋은 동생이 아니게 된 이, 나찰사였다.
늦은 저녁 일어난 일 때문에 하련솔은 잠을 설쳤다. 두 눈 감고 밤새도록 뒤척이며 그는 제 기억을 천 번 만 번 되새겼다.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현실성 없는 일을 복기하자니 망망대해에 놓인 심정이었다.
기억 속에서조차 나찰사의 모습은 감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귓가를 맴돌던 낮고 진중한 목소리, 제 머리를 받아 주던 듬직한 어깨의 온도, 입술에 와 닿던 말랑한 피부의 감촉이 당장 함께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터질 것처럼 뛰어 대던 심장도 그 순간을 회상할 때마다 다시금 갈비뼈를 두들겨 댔다.
“하아….”
침상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하련솔은 보록을 찾았다. 방 한편에 고이 놓인 보록을 열자 눈알 빠진 개구리 인형이 그를 반겼다. 낡은 인형을 제 배 위에 앉히며, 그는 다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오래된 습관을 반복하자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감각이 안겨 주는 감정을 치워 두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련솔은 머리를 굴렸다. 우선, 나찰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그 의도가 궁금했다. 허둥지둥 ‘왜’ 하고 물음을 던지긴 하였지만, 나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문에 하련솔은 그의 의도나 감정을 무어라고도 속단할 수 없었다.
나찰사가 황제의 친척이라는 것도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면 하련솔은 그와 황제가 친척이라는 평면적인 사실만 알 뿐이지, 보다 구체적으로 그들 사이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없었다. 이렇게나 문정궁을 자주 드나드는 걸 보면 사이좋은 가족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미스테리에 대해선 나찰사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런 질문도 건네지 않고 말의 물꼬도 트지 않은 건 하련솔이었다. 황제와 나찰사가 지닌 구체적인 관계나 그들 집안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비밀이 생길 테고, 그렇게 되면 황제와도 연결 고리가 생길 텐데 하련솔은 그게 싫었다. 무의식중에도 황제와는 아주 조금의 접점을 만들지 않고자 행동했다. 때문에 긴밀한 집안 이야기는 죄 차치하고, 가벼운 신변잡기 이야기나 나누었다.
돌이켜 보니 그게 실수였다. 곰곰이 떠올려 보면 볼수록, 하련솔은 나찰사에 대해 아는 정보가 적었다. 꼭 저처럼 인적 드문 개구멍이며 할 일 없이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던 나태한 성격, 우쭐대듯 말하면서도 제 자랑을 하기보다는 하련솔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하던 말버릇, 시시콜콜하게 건네 오던 썰렁한 농담이며 다부지고 딱딱한 손의 감촉,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커다랗게 ‘하하’ 웃어 젖히던 소리나 알뿐이었다. 그건 인간 나찰사였다. 그 또한 긴밀하고 따듯한 정보이긴 하였으나,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경력이나 출신은 못 되었다.
그러고 보면 피차일반이었다. 하련솔 역시 그에게 저의 과거 이야기나 부모님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으므로.
‘그럼 걔는 도대체 내 뭘 알고 그런 거야?’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 친척 형제의 후궁에게 입을 맞춘단 말인가?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말이었다.
물론 그와 함께 있으면 재밌고, 즐겁기는 했다. 하련솔의 삶에 나찰사의 방문은 유일한 낙과도 진배없었다. 하지만 나찰사의 입장은 다를 것이었다. 하련솔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해 볼 때, 커다란 덩치와 강인한 손,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나찰사에겐 저 외에도 다른 친구가 많을 것 같았다. 어디 친구만 많겠는가. 부모도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테고, 애인도 제가 원하는 이를 사귈 테고, 당연히 돈도 많을 거였다.
‘…설마 그 녀석, 내 상상 친구는 아니겠지?’
차라리 그편이 더 말이 되지 싶었다. 그렇게 잘난 녀석이 왜 저에게 입을 맞춘 건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하련솔도 자존감 있는 남자였다. 그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어제를 돌아보면 가난 속을 허덕이는 가시밭길뿐이라지만, 생존하기 위해 펼쳐 온 노력만으로도 그의 지난날은 의미를 지녔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 하나 있다면, 그가 참 귀엽고, 예쁘고, 멋있는 아들이란 점이었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노력해서 속삭이던 말들은 언제까지나, 세상 무엇보다 강하게 하련솔을 붙잡아 주었다. 덕분에 누구 앞에서 예의를 차려 허리 굽힐지언정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일 없이 잘 살아왔다.
그래도 성애라는 감정을 갖고 입을 맞추자면, 서로 간에 살피게 되는 객관적인 지표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하련솔은 저에게 그만큼의 성적 매력이 있다곤 생각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대뜸 닥쳐왔던 입술 박치기의 근간이 무언지 궁금했다.
‘내가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건데.’
면박을 주며 나찰사를 쫓아낸 일이 마음에 자꾸만 걸렸다. 개구리 인형을 주물럭거려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한데 컨디션은 왜 이리 좋은 건지, 팔다리가 가뿐하고 호흡도 편안한 것이 구름 위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손가락 끝에 인형 등줄기의 지퍼가 닿았다. 손톱으로 툭, 툭… 지퍼를 건드리며 상념에 잠긴 그를, 밝은 목소리가 일깨웠다.
“솔 님, 초롱입니다. 일어나셨죠? 들어갑니다!”
“응.”
대답하기가 무섭게 복합문이 벌컥 열리고, 연두색 저고리가 훅 시선을 끌었다. 검정 바지에 하얀 버선발로 초롱은 침실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 바람에 하련솔은 깜짝 놀랐다. 초롱의 얼굴을 보기가 그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증기 어린 유리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뿌옇고 흐릿하게 보일 따름이라도,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올수록 인상이 뚜렷해졌다.
활짝 웃음 짓는 초롱은 입이 크고 치아가 환했고, 눈매가 곡선으로 휘어진 게 꼭 만화 속 캐릭터 같았다. 침상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은뱅이 식탁을 척척 펴고 가져온 쟁반을 올려놓으니, 야무진 손끝까지 볼 수 있었다.
순전한 감탄을 섞어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생겼구나, 너.”
“왜 시비예요?”
뜬금없는 말에 초롱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아버지와 오빠들로 이루어진 다섯 식구 가운데 막내딸로 자라 온 초롱이었다. 셋째 오빠에게 이런저런 놀림을 많이 받아 온 탓에, 누가 됐건 저를 놀린다고 생각되면 대거리가 절로 나왔다.
눈먼 무화를 향해 툴툴 말을 뱉어 놓고, 초롱은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잠깐만요. 어? 어…?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내 초롱의 두 무릎이 털썩 바닥에 무너졌다. 하련솔의 얼굴 앞까지 냉큼 기어가, 그녀는 오른손을 좌우로 붕붕 흔들었다. 하련솔은 제 시종의 검지 끝마디에 붙은 노란 밴드를 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자 초롱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진짜 제 얼굴이 보이세요? 이제 잘 보이시는 거예요? 얼마나요? 얼마나 잘 보이시는데요? 저 얼굴에 큰 점이 하나 있는데, 어디 있게요?”
“하나씩만 물어봐.”
이내 하련솔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오래 뜸을 들였다. 제 시종의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참 노려보다 그는 검지 끝으로 톡, 초롱의 뺨을 찔렀다. 까만 점 하나가 박힌 자리였다. 초롱의 말과 달리, 작고 선명하고 매력적인 점이었다.
볼을 찔린 초롱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는가 싶더니,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함박웃음을 짓는지 여차하면 어금니까지 다 보여 줄 기세였다.
“와! 와…, 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솔 님이 드디어 흐리멍덩한 동태 눈깔을 벗어나는구나….”
“…….”
칭찬인지 욕인지 알 길 없는 말에 하련솔이 제 볼을 긁적였다. 그의 두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초롱은 문득 생각난 질문을 얼른 던졌다.
“어제 오신 손님과는 그러면… 좋은 시간 보내신 거죠?”
“어? 으음…. 아니….”
돌아온 답은 그러나 떨떠름했다. 초롱의 표정이 돌변하기 충분한 나쁜 소식이었다. 단숨에 이마와 눈썹, 콧잔등을 찌푸리자 그녀의 작은 얼굴이 상한 버섯처럼 쭈그러들었다.
귀여운 얼굴을 구경하며 하련솔은 실소했다.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이렇게나 감정 표현이 풍부한 시종인 줄을 여태 모르고 지냈다니….
“왜요, 솔님? 왜 ‘아니’예요? 뭐가 ‘아니’예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분이랑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그분이 솔 님더러 뭐라 그랬어요? 왜요, 왜요?”
‘왜요’ 지옥에 빠져 하련솔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음 깊이 고민했다. 문정궁에 온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돌봐주는 초롱은 성실한 시종이었고 착한 동생이었다. 따지자면 이 궁 안에 하련솔이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측근은 그녀뿐이었다. 그러니 어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들어도 좋을 성싶었다. 발 빠른 초롱이라면 나찰사에 대하여 하련솔이 모르는 정보를 얻어다 줄 수도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