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요즘은 어떤 기기든지 납작하고 단순했다. 울룩불룩한 버튼이 사라진 대신 매끈한 액정 안에 기능이 담겼다. 덕분에 눈이 보이지 않는 하련솔 입장에선 단순한 터치 조작도 힘들게 됐다. 초롱이 기기 겉면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여 ‘재생’과 ‘정지’ 아이콘 위치를 알려주어도 그때뿐이었다. 기기를 찾는 과정에서부터 화면을 실수로 건드려 완전히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기 일쑤인 탓이었다.
잠깐이나마 시력이 돌아왔을 때 점자 읽는 법을 익혔으면 좋았을 걸…, 돌이켜보니 아쉬웠다.
“형도 이 책 읽어요?”
그리고 대뜸 큰소리가 하련솔을 휘어잡았다. 기쁜 듯 들리는 목소리에 하련솔이 고개를 휙 들었다. 이차혁의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여차하면 숨결이 섞일 것 같았다.
“나 이 책 5권까지 갖고 있어요. 보여드릴까요?”
“난 아직 2권인데….”
“금방 읽어요. 내일이면 4권까지 다 볼걸? 뒤로 갈수록 더 재밌거든요.”
신난 듯한 목소리가 어린애처럼 밝았다.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이차혁의 태도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듣자 하니 마침 하련솔이 귀로 읽던 추리극의 엄청난 팬인 듯했다.
‘이런 피 튀기는 이야길 좋아하다니….’
2권까지의 전개만 하더라도 말 안 되게 빠르고 복잡했다. 벌써 죽은 인물의 수만 열셋인데, 그중 두 여자는 서로의 죽음을 위장하고 연쇄살인마 듀오가 된 것으로 막 밝혀진 참이었다. 이차혁은 목소리만 들어서는 도란도란하니 오래된 시를 외우고 클래식 오페라를 들을 것 같은데, 취향이 의외였다.
하기야 하련솔도 전에는 찾지 않던 상업 소설을 좋아하게 된 참이었다. 문정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일상이 심심하니 어제와 오늘이 분간되지 않을 만치 똑같이 반복되기에, 정신 산만한 픽션을 보고 싶어졌다. 반전을 품은 소설은 즐겁게 뇌를 깨울 멋진 자극제였다.
“어떻게 5권까지 갖고 있어? 초롱이…, 내 시종 말론 4권이 완결이랬는데.”
“아니에요. 4권 마지막에… 아냐, 스포일러는 안 할게요. 혹시 궁금해지면 말해요. 내가 빌려줄게…, 아니, 읽어줄게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원고를 받았거든요.”
“와…. 어떻게?”
순수한 감탄을 섞어 묻자, 방 안이 잠시간 조용해졌다.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하련솔의 귀를 간질였다.
“폐하께서 구해다 주셨어요.”
귓불이 홧홧해지도록 간지러운 귓속말이었다.
“아….”
즐거운 듯 속삭이는 말에 하련솔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들은 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어차피 내 침소를 오갈 사람도 몇 없는데, 뭘 귓속말까지 속닥속닥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선물 같은 거였나 봐요.”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부쩍 뜻밖이었다.
“어? 왜?”
“저야 모르죠. 이래저래 얼굴 비추시느라 바쁘셔서 그런 건지, 제가 아닌 다른 무화가 더 좋아지신 건지…. 뭐, 덕분에….”
이내 ‘탁탁’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하련솔이라도 이차혁이 자신의 둔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고, 또 그게 위로가 필요한 일인지도 감이 오질 않아, 하련솔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 자리가 많이 불편하면, 누워 있어도 돼.”
다리가 불편한 남자를 굳이 제 방에 들여놓곤, 딱딱한 바닥에 덩그러니 앉혀두자니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네.”
배려심에 건넨 제안을, 이차혁은 넙죽 받았다. 땀에 젖은 두루마기를 훌렁 벗어 던져놓고, 그는 방석을 휙 밀어 방구석으로 치웠다.
이내 하련솔의 오른쪽 허벅다리가 묵직해졌다. 양반다리로 앉은 몸이 우측으로 기울어지매, 하련솔은 깜짝 놀라 몸을 퉁겼다. 어리둥절하니 손을 내리자 낯선 이의 머리칼이 손끝에 닿았다. 놀랍도록 부드럽고, 사내치고 조금 긴 듯한 머리카락이었다. 이차혁이 그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운 것이었다.
당혹감에 하련솔이 실소했다. 암만 누우라고 먼저 허락을 했대도 그렇지, 침상 위도 아니고 제 무릎을 베고 벌러덩 드러눕다니….
‘진짜 어린애 같네.’
이차혁이 하련솔의 손을 덥석 잡아, 아예 제 이마 위에 끌어다 올렸다. 하련솔이 대놓고 허허 웃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든 짐승을 흉내 내며 그의 손바닥에 제 이마를 문지르기까지 했다.
“형…. 저 열 나는 거 같아요.”
“내 손이 더 뜨거운데?”
“아닌데. 내가 더 뜨거운데.”
어리광 부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하련솔은 황제라는 작자가 이해됐다. 모든 무화를 제쳐놓고 이차혁을 유독 아낀다던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귀여운 말투로 벽 없이 다가오는 무화라면, 제가 황제였더래도 좋게 여기고 자주 찾지 싶었다.
그런 황제가 왜 변덕일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하련솔은 이차혁의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차혁의 말이 맞았다. 그의 이마 위로 점차 열이 올랐다. 반듯한 이마의 윤곽과 부드러운 피부를 손끝으로 느끼고 있자니 점점 뜨거워져서, 물수건이라도 올려주지 못해 미안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왼손을 내려, 하련솔은 침상의 담요를 끌어다 이차혁의 가슴 위에 덮어주었다. 이차혁은 구깃구깃하게 내려앉은 담요 덩어리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차혁은 제 이마에 놓인 하련솔의 손목을 잡고 살살 움직였다. 하련솔의 손끝은 이제 눈썹에 닿았다. 결 반대 방향으로 손끝이 쓸리매 숱 많은 눈썹의 포슬포슬한 감촉이 하련솔을 간질였다. 마치 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차혁의 지시에 따라 하련솔의 손은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뺨에 닿았다. 군살이 전혀 없는 듯 딱딱한 턱선이 느껴졌다. 제 얼굴을 읽어보라는 듯, 그는 하련솔의 손을 움직여 코를 만지게 하고, 턱을 쓰다듬게 했다. 그리고 하련솔의 검지 끝마디를 살짝 깨물었다.
“헉!”
깜짝 놀란 하련솔이 잡혔던 손을 쑥 빼냈다. 이차혁이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안약이 잘 안 듣나 봐요.”
얼얼한 검지를 엄지로 문지르며, 하련솔이 허탈하게 대답했다.
“그거… 다 쓴 지 오래야. 이제 없어.”
“다 썼으면 더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누가 준 건데요?”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질문에 하련솔은 볼을 긁적였다. 그의 허벅다리를 베고 누워, 이차혁은 하련솔의 텅 빈 두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붉어졌다가도 금세 창백하게 가라앉는 뺨이며 전에 비해 더욱 덥수룩해진 머리칼에 덮인 이마, 오밀조밀한 코와 예쁜 입술을 하나하나 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잠시 침묵한 끝에, 하련솔은 내키지 않는 답을 내놓았다. 나찰사에 대해 말하자니 속이 답답한 것이었다.
“친구가 준 건데…. 그 친구가 요즘 안 와서 못 만나.”
“그 친구가 누군지는 알아요?”
“응.”
이차혁이 먼저 제 고민을 털어놓은 덕에 하련솔의 입도 조금은 덜 무거워졌다. 고민 끝에, 하련솔이 말했다.
“황제의 가족이랬어.”
그러자 그의 기울어진 다리가 휙 제자리를 되찾았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차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이내 강한 악력을 지닌 두 손이 하련솔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가족? 가족이라고요? 형제라도 된다고 그러던가요?”
“어? 어? 아냐.”
몸이 크게 흔들리며 약한 어지럼증이 솟구치매, 하련솔은 정신없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먼 친척이라고만 했어. 왜 그래?”
“아….”
하련솔은 제 어깨를 쥔 손이 주춤거리며 굳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대뜸 소리치고 후회하는 듯, 숨 들이켜는 소리도 귓가에 닿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 숙인 채 하련솔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미안해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이차혁이 속삭였다. 그러곤 구겨진 하련솔의 상의 팔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제가, 착각하고… 깜짝 놀라서요. 폐하에겐 형제가 없거든요….”
“어, 응….”
“하나 있긴 했는데, 옛날에 죽었어요. 근데 죽은 사람을 사칭했다고 하니까, 그런 거짓말을 한 줄 알고…. 하긴 그럴 리가 없는데.”
제멋대로 혼잣말을 중얼중얼 잇다가, 이차혁이 다시금 드러누웠다. 재차 허벅다리에 기대어오는 머리를 느끼며 하련솔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황제에 대해 아는 게 많고 그를 우러러보는 무화인지라, 이차혁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에 무척 예민한 모양이었다. 혹시 나찰사를 본 적이 있느냐고, 그가 언제 입궁할지 아느냐고 물으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떨떠름하니 침묵하는 하련솔을 향해, 이차혁은 재차 밝은 목소리를 냈다.
“형. 그러지 말고, 나랑 친구 해요. 난 형이 좋아요.”
얼핏 듣기 좋은 이야기였다. 아마 이차혁은 평생, 제가 건넨 제안에 거절을 내놓는 이를 만난 적 없을 터였다. 그만큼 자신만만하고 당연한 긍정을 기대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하련솔은 황제를 숭배하는 여느 무화들과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