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왜 내가 좋은데?”
‘아니’라는 거절을 내놓기에 앞서, 하련솔이 물었다. 대답은 선뜻 돌아왔다.
“형은 폐하의 사랑을 받는 데엔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이거든요.”
그에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고, 딱히 감출 사실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입밖으로 ‘그래, 친구 하자’ 하는 속 편한 이야기는 나오질 않았다. 가만히 침묵하는 하련솔을 올려다보며, 이차혁은 배 아래로 흘러내린 담요를 움켜쥐었다.
밝은 목소리 내어, 그가 재차 말했다.
“형.”
“응. 왜?”
“한 번도 못 만나본 폐하보다는 내가 더 좋죠? 나랑 더 친하잖아요. 그죠? 무슨 일이 생기면요, 폐하보다는 내 편을 들어줄 거죠?”
“…왜 그런 말을 해? 그렇게 편을 나눌 일이 뭐가 있다고.”
하련솔이 경험하기로, 산다는 건 구구절절한 일의 연속이었다. 인연이라는 게 칼로 무 썰듯이 쉽게 잘려 나가지를 않았고, 모든 이들이 각각의 면을 갖고 있었다. 어제는 적이었던 악덕 사장님도 오늘은 소일거리나마 던지듯 맡겨주는데, 어제의 친구였던 고시원 주민은 오늘 그의 방에서 비상금 12만 원과 라면 두 봉지를 훔쳐가는 식이었다. 사람은 누구나가 입체를 지닌 도형이라, 너는 삼각형 나는 사각형 분간해선 안 됐다. 당장은 그래 보여도 돌아서면 원일 수도, 별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구태여 누구와 척을 지지 않는다. 그게 하련솔이 살아온 두루뭉술한 방식이었다.
“…확답은 못 해줘. 난 누구의 편도 해본 적이 없어.”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일평생, 무작정 하련솔의 편을 들어주던 이가 있기는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고, 어디에서 어떻게 계신지 알 길 없는 아버지가 그랬다.
“알았어요.”
이차혁은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마음 바뀌면 말해요. 난 계속 대답 기다릴 테니까.”
그런 말을 툭 뱉더니, 휙 몸을 돌려 하련솔의 품에 제 머리를 갖다 박다시피 대는 것이었다. 마른 배에 닿는 코끝을 느끼며 하련솔은 그의 어깨를 더듬더듬 만졌다. 어린애 같은 응석에 쉬운 ‘그래’를 내놓는 대신, 하련솔은 상대의 팔꿈치를 타고 조심조심 손을 내렸다. 그리고 몸을 쑥 뒤로 빼버렸다. 이차혁의 머리가 바닥에 닿으며 쿵 소리를 냈다.
“아야.”
약한 신음을 흘리며 이차혁이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대뜸 일어난 하련솔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안내선을 따라 등반이라도 하는 양, 그는 이차혁의 몸을 만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뭐해요?”
제 하반신을 내려다보며, 이차혁이 물었다.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
하련솔이 대꾸했다. 귀찮다는 듯 무심한 말투였는데, 손짓은 그렇지 않았다. 꾸물꾸물 움직인 끝에 그가 찾은 것은 이차혁의 기다란 정강이였다. 다리 두 쪽을 잡고 무얼 가늠하려는 듯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상대적으로 마른 왼쪽 종아리를 잡고,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대뜸 시작된 안마에 이차혁이 웃었다. 웃는 것밖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게 됐다.
“그거 좀 주무른다고 나으면, 그게 개화병이겠어요? 쥐 난 거지.”
“그래도 기분은 좋아지잖아.”
힘주어 꾹꾹 손에 쥐고 통통통 손날로 두드려 안마하며, 하련솔이 말했다. 그에 이차혁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길을 따라 몸이 흔들리는 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낯선 친숙함.’
이차혁은 그것이 하련솔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렇네요. 마음은 한결 낫네요.”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그는 제 다리를 주무르는 무화를 빤히 바라봤다. 머리칼을 적신 불쾌한 땀은 마른 지 오래였다. 얼굴에 감돌던 타는 듯한 홍조도 자리를 떠났다.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는 안도가 그를 사로잡았다. 문정궁의 외진 구석 자리, 개구멍에 갇혀 돌아갈 방도를 찾아야 할 때인데도, 뭐든 다 괜찮다는 안일한 감정이 그를 편안하게 했다.
“아야, 아야….”
웃는 낯으로 그는 가짜 목소리를 내어 신음했다. 아픈 척 다리를 뒤척이자, 하련솔이 당황하며 더욱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고개를 가볍게 추켜들며 이차혁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황제를 옆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신세인 무화들마저 이차혁을 미워하진 못했다. 그들 중 가장 성질이 독하고 우울한 이가 윤슬찬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무 살의 사내 무화인데, 개화병이 심해지면 손발이 굽어 한여름에도 손모아장갑을 끼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사흘 내내 황제가 이차혁의 처소를 드나들던 무렵, 무화들끼리 둘러앉은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이 아니라 눈을 다쳤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그럼 당신을 마음껏 싫어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무화들은 하하호호 웃음 지으며 그를 조롱하고 들은 말을 잊은 척 넘어갔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들 모두 윤슬찬의 말에 공감했다. 뒤돌아서선 이차혁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다가도, 막상 그 앞에 서면 마음이 변한 경험은 그들 모두의 것이었다.
예쁜 것에 마음이 동하는 건 야생의 본능이었다. 문정궁에서 그 적나라한 본능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욱 활개를 쳤다. 특히나 이차혁의, 부드러운 천을 사포 삼아 긴 시간 들여 어루만진 조각 같은 얼굴을 올려다볼 때면 누구라도 굴욕감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아름답다는 칭찬을 평생 들으며 살아온 이차혁이야 그 심정을 몰랐다. 저열한 질투심일랑 평생 품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하련솔을 보고 있자면, 그의 곁에 선 황제의 훌륭한 자태를 상상하자면 기묘한 질투심이 속에서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상념에 사로잡힌 이차혁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듯, 하련솔이 물었다.
“너, 많이 아프면 의료원에 갈래? 초롱이 불러줄게.”
“‘너’가 뭐예요? 참 정 없다. 혁이라고 불러달라니까요.”
“그래. 혁아.”
귓가로 울리는 웃음소리에 하련솔은 나찰사를 생각했다. 문득 이차혁이라는 이 무화와 그가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는 제자리에 박힌 돌처럼 그저 있을 뿐인데 자꾸만 찾아와, 그저 그런대로 흐르는 일상에 손과 발을 담가대는 점이 그랬다. 아무도 하련솔이라는 무화를 크게 신경 쓰지 않건만, 제 모습이 그들 눈에만 유독 두드러지기라도 하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하자니 성격도 비슷한 것 같았다. 제멋대로에 위풍당당한 나찰사에 비하자면 이차혁은 섬세한 사람처럼 느껴지긴 하였으나, 각자 풍겨대는 엉큼한 기운이 유독 비슷했다. 대뜸 가까워지고 싶다는 양 어깨를 맞추어 오는 것이며, 언제 봤다고 ‘형’, ‘형’ 불러대는 귀염성이며…. 그러고 보면 큰 키와 덩치, 뜨거운 손의 온도, 막무가내로 들러붙는 말투까지 비슷했다.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형, 시종 나한테 빌려주게요?”
하련솔의 어깨에 제 턱을 괴며, 이차혁이 웃었다. 그러자 하련솔은 질색하며 몸을 비켰다.
“뭔 개소리야? 초롱이를 네가 왜 데려가.”
“날 위해 불러주겠다면서?”
“초롱이 불러서, 네 시종 불러 달라고 하자는 거였지.”
“아. 그런 거면 내가 연락하면 돼요.”
벗어 던진 두루마기와 함께 멀찍이 놓인 휴대폰을 힐긋 살피며, 이차혁이 말했다. 그러자 하련솔이 ‘어어’하고 감탄도 탄식도 아닌 소리를 냈다. 휴대폰 하나 없이 완전히 고립된 생활에 전념하는 무화는 저뿐이란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그럼 왜 이제까지 연락 안 한 거야?”
“내 방보다 여기가 더 좋아서요.”
하련솔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한 마디 두 마디 더 나눌수록, 이차혁의 대답이 뻔질뻔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뭐…. 여기저기 구경할 거 많긴 하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들은 말이 그렇기에 복습하듯 뱉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차혁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구경은 무슨…. 이 주위에 구경할 게 뭐가 있어서요?”
“어? 밖에 그네도 있고, 나무도 있고…. 저기 처마 위에 뱁새도 자주 와. 오늘도 있는진 모르겠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소리가 들렸다. 이차혁이 창문을 연 것이었다. 그 사소한 동작에 하련솔은 내심 놀랐다. 스스로를 숨기기 급급한 탓에 그는 창문조차 열지 않는 생활을 고수하는데, 이차혁은 손쉽게 그 벽에 구멍을 냈다. 대낮에도 어둑어둑한 하련솔의 방에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창문 위 처마를 올려다보기도 잠시, 이차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형. 저건 처마 장식이에요. 뱁새가 아니라.”
“…….”
그에 하련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려줄 것이 생겨 신난 사람처럼 이차혁은 눈에 보이는 장식의 모양을 설명했다. 작고 하얀 해태 조각인데, 하나는 기지개를 켜고 하나는 뛰고, 하나는 살이 쪘으며 다른 하나는 웅크리고 있다고 했다.
“그거 알아요? 해태는 불을 삼키는 동물이에요. 황제의 침전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무화들이 많이 아프니까, 열병을 좀 덜 앓으라고 침전과 먼 건물의 처마마다 해태를 올린 거죠. 해태더러 그 열까지 삼켜달라고요.”
도란도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하련솔의 정신은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하얀 뱁새가 아니었구나. 내내 올려다보면서 귀여워했는데….’
그는 제 상상 속의 ‘뱁새’를 나찰사에게도 보여주었었다. 네 마리가 모여 앉은 게 참 귀엽다고, 뭣도 모르고서 웃었던 것도 같다. 움직이지도 않는 돌 장식을 귀여워하는 저를 두고, 나찰사는 그런 척 넘어가 주었었다. 고양이가 물어간다느니 무어니 핑계를 대며 새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말도 남겼었다. 돌 조각에 대고 빵가루를 던져댈까 봐 신경 쓴 모양이었다.
딴에는 배려였을 거짓말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났다.
‘바보 같기는. 새가 아니라고 누가 실망할까 봐?’
그러자 그가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