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스페인 마드리드, 바하라스 국제공항. 태극문양을 새긴 전용기를 20미터 앞에 두고 차량 세 대가 줄지어 정차했다. 앞뒤로는 신식 SUV가 자리했고 중앙에는 한국 황제를 태운 클래식 카가 놓였다. 모두 세아트 차량이었다.
초기 목표는 이틀 전, 스페인에 도착한 한국 황제를 환영식 자리까지 마중하는 것이었으나 선별 끝에 2군으로 밀려나고야 말았더랬다. 꼼짝없이 다시 전시관으로 돌아갈 신세인 클래식 카에, 뜻밖에 황제 측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마지막 순방을 마치고 떠나는 그를 배웅할 수 있게 됐다.
입국 당시보단 집중도가 덜하였으나, 관계자 수십 명에 출입증을 목에 건 기자들의 수가 적진 않았다. 특히나 스페인 왕실 일가에서 꼭 배웅을 해 주고 싶다며 나선 이가 있어 이목을 끌었다. 그녀는 왕비의 막내 여동생으로, 언니와 나이 터울이 많아 자매라기보다는 모녀 관계에 가깝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여자였다.
국가 간에 한 번 공식적인 자리를 갖자면 입국하는 순간부터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외교였다. 각국 정상끼리 주고받는 선물은 물론이고 옷차림, 대접받은 음식, 머무른 숙소, 탑승한 차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계산이 들어갔다. 공항까지 따라붙은 관계자의 직급과 머릿수 역시 우호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온 젊은 황제를 배웅하겠노라 나선 왕비의 여동생은 얼핏 철부지로 보이기는 하였으나, 황제의 순방이 그만큼 순조로웠음을 표현하기 제격이었다.
때문에 전용기 앞에서 이림범은 일부러 멈추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림범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판으로 찍어누른 듯 변함없는 반면, 왕비의 막내 여동생은 시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타국에서 온 잘생긴 황제가 내놓는 형식적인 태도며 심드렁한 기색은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뺨과 귀가 장밋빛으로 물든 채 그녀는 꿋꿋이 가져온 선물을 전했다. 녹색 상자에 든 것은 작은 보석이 박힌 백색 팔찌였다. 이림범은 셔터 소리를 바삐 울리는 기자들을 향해 은근히 상자를 보여주며 감사를 표했다.
동영상 촬영이 금지된 현장이니 대화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팔찌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석이 지닌 뜻이며 팔찌 안쪽에 새겨진 문구의 주술적인 전설은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한편 터무니없었다.
힐끔 시선을 들어 이림범은 멀찍이 선 통역가를 살폈다. 그들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통역가는 발끝을 바닥에서 들썩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한참 고민하던 끝에 그녀는 제 셔츠 칼라를 정돈했다. 그리고 발을 뻗어 다가오려 하기에, 이림범은 간단한 수신호를 보냈다. 괜찮으니 대기하라는 손짓이었다.
순박한 눈동자를 지닌 어린 여인을 향해 이림범이 직접 말했다.
[난 그런 미신은 믿지 않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사람을 부숴놓을 뿐입니다.]
[네?]
하필 거센소리를 내며 강풍이 불었다. 너른 활주로 바닥을 긁고 지나는 바람에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리고, 이림범의 검은 재킷이 크게 펄럭였다. 가까이 붙어 선 탓에 작은 체구의 여인이 그 품에 안긴 듯한 착시가 생겼다.
[뭐라고 하셨나요?]
저와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황제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자, 여인이 반 발짝 다가섰다. 그러면서 그녀는 활짝 열린 황제의 재킷 안으로 손을 뻗었다. 제 손목에 두른, 선물한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백색 팔찌를 보여줄 요량이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음에 내가 당신 나라로 찾아가면, 내게도 그 병을 옮겨줄래요?]
[…뭐?]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그 병 말이에요.]
이림범의 표정이 어떻게 얼어붙는지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의 재킷 안주머니 위로 삐죽 드러난 붉은 실에 한눈 팔린 탓이었다. 조그마한 매듭으로 끝을 마감한 굵은 실을 향해 그녀는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이림범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림범은 거짓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짧은 인사를 뱉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소피아.]
[…내 이름은 미아예요.]
황당하다는 듯 돌아온 대답 끝엔 이림범이 없었다. 그는 이미 전용기로 오르는 계단 위였다.
“알아.”
혼잣말로 대꾸하며, 그는 거친 바람이 스미는 재킷 앞을 주먹으로 꽉 여몄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 제 자리를 찾자마자 깊은 피로감이 쏟아졌다. 체격에 맞추어 준비된 너른 시트에 주저앉아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아라는 여인이 유별나게 잘못을 저질렀느냐면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이림범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한국 황실에 대해 전형적인 편견을 지닌 수많은 외국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개화병에 걸린 수십의 후궁이 황제에게 트로피처럼 주어졌다고만 여길 뿐, 그 또한 같은 병을 앓은 환자가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임은 생각지 못하는 식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왼손으로 감싼 이림범이 남는 손을 올리자, 대기 중이던 파일럿이 줄지어 다가왔다. 허리 숙여 인사하려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내젓고, 그는 승무원을 불렀다.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곧바로 달려온 승무원은 그에게 두통약과 생수 한 병을 건네주었다.
성화인지 미열인지 모를 기운을 식히며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제로서의 첫 순방은 과연 성공적이었다. 이곳 스페인을 비롯하여 한 주간 받은 환영은 몹시 풍족했고, 외교관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만연했다. 그리고 이림범은 지쳐 버렸다.
‘집에 가고 싶다.’
십여 년간 해외를 떠돌며 살아온 그에게 낯선 향수가 난생처음 밀려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구중궁궐 세상이라 비난을 받건 말건 문정궁에 틀어박혀 사나흘 즈음 한량처럼 보내고팠다.
궁을 떠나온 지 오늘로 일주일째다. 다른 치들에겐 고작 일주일일 테지만, 문정궁의 무화들에게는 영겁처럼 기나긴 일주일일 터였다. 황제 없이 일주일이면 스물에서 스물두 살의 어린 무화들도 몸살을 시작할 때였다. 이차혁은 침소에 틀어박혀 생활하기를 한창일 테고, 그 밖의 무화들도 의료원에 진을 쳤으리라.
이림범은 습관적으로 제 재킷 안주머니를 만졌다. 조금 전, 낯선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붉은 실을 잡고 부드럽게 빼내자, 매듭 끝에 달린 옥 장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굵은 끈의 빛깔이 옅어지고 매듭의 실오라기는 한데 뭉쳐 덩어리가 되도록 닳고 닳은 노리개였다.
‘형 보고 싶다….’
오래된 그리움을 익숙하게 품다가, 그는 실소했다. 여태껏 낡은 노리개를 쥐고 그리워할 상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였는데, 이젠 달라졌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오늘 이림범은 다른 ‘형’을 생각하며 마음 졸였고, 언제고 그리움의 끝에 다가오던 막연한 슬픔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다. 대신에 그는 안달이 났다. 한시바삐 문정궁으로 돌아가 하련솔을 보고 싶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아팠느냐고 묻고, 혹시 형도 나를 그리워했느냐고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니 눈물보다는 웃음이 났다. 창밖으로 활주로가 내려다보이고, 두 발밑이 떠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그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오늘에 존재하는 자만이 선사할 수 있는 기대감이 그를 달랬다.
***
문정궁에 도착하자마자 이림범은 무화 여럿에게 둘러싸였다. 그들 모두와 일일이 인사하고, 눈짓이며 대화를 나누며 그는 느리게 걸었다. 저를 마중 나온 무화들이 유달리 예쁘거나 좋아서는 아니었다. 나중에 그들을 따로 찾거나 불러낼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기회를 찾아온 자들에게 아쉽지 않게 시간을 내주어야 했다.
이십여 분의 느릿느릿한 산책 끝에 호위 실장이 무화들과 황제 사이를 슬그머니 가로막았다. 황제의 침전이 코앞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누르기 바쁜 무화들을 가로질러, 박 비서가 황제의 곁에 섰다.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그가 물었다.
“어느 무화의 처소에 들르시겠습니까?”
뻔한 답을 가정해놓고 건넨 질문이었다. 여태껏 일정 없는 저녁을 맞이할 때마다 황제는 이차혁의 처소를 찾아왔다. 그와 식사하며 한두 시간을 보내는 건 예정된 계획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나 이림범의 답은 뜻밖이었다.
“피곤하다. 내 침전에 가 쉴 거야.”
비서의 두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아…, 아, 네넵.”
황제의 결정에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에 따른 제 감정도 드러내지 말라는 상궁의 조언을 벌써 잊은 그였다. 이름은 ‘총명’인데 하는 짓은 왜 그러느냔 핀잔도 풍화된 지 오래였다.
굵고 긴 목을 좌우로 젖혀 스트레칭하며, 이림범은 눈치 없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
“해가 저물면, 이차혁을 내 침전에 들라 해라.”
그러자 비서가 안색을 밝혔다. 눈에 띄게 환해진 얼굴을 이림범은 무심한 눈길로 살폈다. 문정궁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제각기 응원하는 무화가 하나씩 있었다. 로맨스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게 되듯, 문정궁의 하수인들도 저와 가까운 사이이거나 제 취향에 속하는 무화를 마음에 두게 마련이었다. 아무래도 박 비서의 성원을 받는 무화는 이차혁인 듯했다.
그의 귀 가까이 고개 숙이며, 이림범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직접 가서 알리고 와. 제 처소를 안 찾는다고 토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