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33화 (33/135)

33.

그렇게 비서를 떨궈 놓고 그는 침전에 들어섰다. 돌아온 황제를 반가이 맞이하며 시종들은 죄 싱글벙글 미소를 걸쳤다. 몇몇은 바삐 다가와 외투와 시계, 넥타이를 풀어 가져갔고, 한 명은 자리에 남아 목욕물, 식사, 이부자리에 대해 안내했다.

그의 말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림범은 자개장인 척 껍데기를 위장한 금고의 문을 열었다. 그러곤 순방 내내 품고 다닌 노리개를 색종이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그 옆자리에 놓인 거북이 모양 옥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여기 있던 옥보가 안 보이는데, 혹시 누가 내 침전에 다녀갔나?”

그러자 시종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오, 옥보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화들짝 놀란 그를 향해 이림범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 10대째 물려 전해 온 가보가 사라졌다. 이 방에 들른 자들 명단을 모두 가져와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시종은 황제가 이전에도 두 번이나 비슷한 장난을 쳤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가보가 분실되었다는데 함부로 의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그는 급한 마음에 얼른 복도로 뛰쳐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림범은 금고를 단단히 닫았다. 그리고 평상복을 꺼냈다. 짙은 색의 편한 바지와 흰 티셔츠를 걸치고,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길 안내를 하는 창도인 양 청색 단령을 걸쳤는데, 아주 얇은 옷감으로 지은 여름옷이라 팔뚝의 피부며 바지의 색이 반쯤 비쳤다. 가슴께에 붙은 끈을 매듭지으며 그는 침전의 숨겨진 후문으로 향했다.

조그마한 비상용 후문을 허리 숙여 통과하자마자, 이림범은 탄식했다.

“사람 보람 없게 하는 데 재주가 있어, 웅 실장!”

박 비서며 침전 시종이며, 기껏 떼어놓은 보람이 없게 됐다. 차렷 자세의 호위 실장이 후문 곁을 지키고 서 있는 탓이었다. 쓸데없이 빠릿빠릿해서는, 도대체 언제 뒤따라붙은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 김웅진, 직급 실장. 남들이 부르기로는 김 실장이고 사람 부르길 제멋대로 하는 이림범이 부를 때는 ‘웅 실장’인 그는 요즘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였다. ‘마흔한 번째 무화를 침전 앞에서 돌려보낸 독단을 두고 폐하께서 몹시 탐탁지 않아 하시더라’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로 그는 변했다. 그러잖아도 황제의 호위에 극성이던 자가, 자진하여 시말서를 작성하고 시키지도 않은 반성을 하느라 날을 새는가 싶더니 황제의 호위에 더욱 빈틈이 없어졌다.

게다가 눈치까지 좋아졌다. 황제가 그리하듯이 저까지 눈에 띄지 않게 옷을 갈아입은 것이었다. 전대를 풀고 모자도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뒷짐을 지고 선 꼴을 이림범이 빤히 노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간섭도 하지 않겠습니다. 뒤만 따르게 해주십시오.”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웅 실장이 외쳤다. 머리칼이 아주 짧은 탓에 두피까지 분홍색으로 보였다.

“지금이 뭔 조선 시대야? 내가 암행이라도 나가는 줄 알아?”

“폐하.”

상대의 심각한 태도에 이림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쓸모없이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목소리를 낮게 깔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간섭도 하지 말고, 아무 기억도 새기지 마라. 내 잠행은 모두 없는 일인 거다. 알았느냐?”

조선 시대 왕을 흉내 내며 그렇게 말하자, 웅 실장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 그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까?”

“…….”

이내 그는 이림범의 커다란 꼬리가 됐다. 등 뒤에 그를 혹처럼 달고서 이림범은 익숙한 길을 따라 터벅터벅 발걸음을 움직였다. 다른 직원이라면 말 한마디로 멈추어 세울 수 있겠지만 김웅진은 달라, 별수 없었다. 그는 이림범의 유년기를 지켜봐 온 잔뼈 굵은 군인이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지 않던가. 어차피 매번 숨어다닐 수도 없는 노릇, 저 대신 밟혀줄 꼬리를 달고 다니는 게 낫겠다고 이림범은 생각했다.

이목을 피해 가며 잠시간 걷고 보니, 언뜻 한 채로 보이는 두 전각을 잇는 숨겨진 문이 놓였다. 그 문을 통해 좁은 길을 지나면 문정궁 외곽까지 금방이었다. 오늘, 문정궁에 이 지름길을 아는 자는 황제인 이림범뿐이었다.

지름길을 지나 나무 산책로를 가로지르자 작은 지붕을 가진 건물이 한 채 보였다. 하련솔이 머무르는 처소, 개구멍이었다. 이림범은 제 뒤를 쫓느라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웅 실장을 향해 손바닥을 세웠다. 큰 개를 부리듯 ‘기다려’ 신호한 것이었다. 그러곤 뒤로, 뒤로 손짓했다.

“황제 여기 있다고 광고할 일 있어? 저기, 정자 옆에 가서 네 잎 클로버 세 개 모아 와. 다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마.”

근방을 오가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후, 이림범은 개구멍으로 직행했다. 한 주 전과 조금도 달라진 바 없는 처마를 확인하고, 낮은 담장 위로 가볍게 몸을 올렸다. 그리고 멈췄다. 운동화를 신은 그의 두 발이 뜰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훌렁훌렁 움직이던 팔다리가 얼어붙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림범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 끝에 하련솔이 있었다.

처소 복합문을 활짝 열어두고 하련솔은 마루에 앉아있었다. 벽면에 어깨를 대고 두 다리는 마루 위에 뻗은 채였다. 그의 발이 향하는 곳에 이림범이 있었다. 침입자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도 하련솔은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졸린 듯 기운 없는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낯빛은 창백하고 입술은 아주 희미한 연홍빛인데, 두 눈동자는 그저 컴컴했다. 검은 동공이 커다랗게 풀린 탓에 그의 눈은 본연의 밝은 갈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어 보였다.

따듯한 노을의 주홍이 그의 세상엔 없었다. 뜰에 앉아 오후 바람을 쐬면서도 그뿐이었다. 기운 없이 앉아 미동조차 않는 그는 텅 빈 목각인형 같았다.

고작 한 주였다. 이림범이 자리를 비운 기간이 고작 한 주였다. 고작 한 주 만에 하련솔은 완전히 고장 났다.

흉곽이 갑갑하게 조여옴을 느끼며 이림범은 천천히 두 발을 뜰에 내렸다. 그의 신발 밑창이 땅에 닿는 소리에 하련솔이 손을 움찔거렸다. 그의 두 손 안에 쥔, 원형을 알기 힘든 너덜너덜한 인형이 납작하게 구겨졌다.

“…….”

당황한 기색으로 하련솔이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불시에 저를 찾아든 작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눈치였다. 그런 그 앞에서 이림범은 황제가 아니었다. 나찰사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감정에 충실한 한량이었다.

천천히 입을 열어, 이림범은 하련솔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약하고 둔하고 외로워 보이는 하련솔을 보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안의 나찰사를 불러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 간 뜸 들인 끝에, 그는 겨우 말을 뱉어냈다.

“형.”

그러자 하련솔의 얼굴에 감정이 피어올랐다. 서서히 위로 향하는 눈썹이며 슬그머니 호를 그리는 입술, 봉긋 솟는 뺨을 보자니 그라는 우물에 물결이 생긴 듯했다. 이림범은 곧바로 그 앞으로 달려갔다. 두 손을 뻗어 그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쪽이야.”

“아…, 아.”

저를 향하게끔 얼굴 방향을 돌려주자, 하련솔이 더욱 활짝 미소 지었다. 이림범이 생각하기로, 다시 만난 저에게 그가 뱉어야 할 말은 ‘너 나한테 왜 그랬냐’라는 타박이었다. 왜 멋대로 입을 맞추어 저를 놀라게 하고, 대뜸 발길을 끊었느냐는 핀잔을 들을 차례였다.

그러나 하련솔은 웃음 짓기만 했다. 보기 좋게 웃으며, 도리어 기쁜 듯 속삭였다.

“이제는 날 찾아오지 않는 줄 알았어.”

타박도 핀잔도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덤덤하게 뱉은 말이었다. 그 말이 이림범의 속을 긁고 지났다. 하련솔을 보고 있으면 그는 저에게도 마음이라는 게 있다고 느꼈다. 마음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제 속의 어딘가가 따끔거리고 아렸다.

“…왜?”

마른침을 삼키며 이림범이 물었다. 눈썹이 구겨지고 콧잔등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장난쳤다.

“형. 나 기다렸구나?”

그러자 하련솔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 쉬었다. 휴… 내쉬는 숨결엔 웃음기가 가득한데, 그의 몸에는 기력이 전혀 없었다. 천천히 손을 옮겨, 이림범은 그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목이 어찌나 희고 말랐는지 툭 튀어나온 성대가 유독 커 보일 정도였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원인을 죄 아는 주제에 그렇게 말했다.

“언제부터 이랬어? 형. 눈…, 언제부터 다시 안 보였어?”

좋은 약이라도 지어주려는 척 그렇게 묻기도 했다.

잠시간 생각하는 듯하다, 하련솔이 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수요일.”

“그럼… 나흘 정도 됐나? 일요일부터 안 보였으니까….”

아무런 동요 없이 뱉은 말이 이림범을 놀라게 했다. 하련솔의 상태를 재차 확인하고자, 그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눈동자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석양빛이 드는 얼굴을 제 몸으로 가려 그림자를 만들어도 보았다. 그러나 까맣게 벌어진 동공은 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3일? 고작 3일 만에… 이렇게 멀어 버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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