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34화 (34/135)

34.

문정궁에는 수십 명의 무화가 살았다. 그들 중 어느 무화의 병증도 이림범을 이토록 마음 아프게 하진 않았다.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그는 이맛살을 구겼다. 미룰 수도, 줄일 수도 없는 일정을 소화하느라 한 주간 궁을 비운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모든 자리에 하련솔을 대동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황제라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황제이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라오며 지켜봐 온 과거의 불우한 사건이 있었고, 기억에 아로새겨진 비극이 있었다. 지나간 비극이 다시금 반복되지 않게 그는 조심해야 했고, 움츠려야 했다. 좋아하는 것일수록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멀리 팽개쳐 두어야 했다.

서서히 힘이 빠져 버려, 이림범은 하련솔을 놓아주었다. 그의 여윈 뺨에서 손을 떼어내기가 무섭게, 하련솔이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작은 동작으로 이림범을 놀라게 하며, 그는 가느다란 열 손가락으로 이림범의 한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난번엔 내가 미안했어.”

예상치 못한 말에 이림범은 퍽 당황스러웠다. 어린아이 같은 되물음이 불쑥 나갔다.

“형이 뭐가 미안해?”

“내가 널 때렸잖아. 얼굴은 좀 괜찮아? 미안해.”

약하거나 비굴한 사람이어서 뱉는 사과가 아니었다. 그런 사과라면 누구에게든 쉽게 얻어 내며 살아온 이림범이었다. 하련솔의 사과는 그것들관 결이 달랐다. 어른이고 성숙한 사람이기에 꺼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림범은 큰 한숨을 속으로 삭였다. 그 앞에서 어린애 같은 제 모습에 신물이 났다. 어디 기둥에 머리를 쿵쿵 가져다 박아야 이 자괴감이 풀릴 성싶었다.

“나야말로 미안. 갑자기 키스해서….”

“그래. 이제 괜찮아.”

“뺨 때린 건 신경 쓰지 마. 날 때린 남자는 형이 처음인데, 뭐…. 거울 볼 때마다 형 생각이 나는 게 오히려 좋았어.”

중얼중얼 늘어놓은 진심에 하련솔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파란빛으로 질리는가 싶더니, 늦게 불이 붙은 듯 붉게 변했다.

“…야, 너는….”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웃었다. 못 본 새에 수척해지고 약해져 그런지 그의 웃음이 포슬포슬해 보였다. 금방 바스라져서 기운 없는 무표정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제 앞에서 안달 내는 이림범을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하련솔은 대뜸 처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심결에 그를 따라 들어서려던 이림범은 ‘으음’ 하는 목 울림소리에 멈춰 섰다. 작은 음성과 손짓으로 그를 멈춰 세운 채 하련솔은 복합문을 퉁,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거기 앉아 봐.”

두 번째 문전박대를 당하는구나 하고, 이림범은 다소 흥분했다.

“형. 왜 이래? 바리케이트라도 필요해서 이래? 내가 또 입술 갖다 박을까 봐?”

“그런 것도 있고….”

컴컴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그와 달리 차분했다.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 그런데 나만 네 표정을 못 보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래? …알았어. 이야기해.”

문 하나를 사이에 놓고, 하련솔은 자세를 고쳐 반듯하게 앉았다. 그리고 마루 위의 손님이 풀썩 앉는 소리를 들었다.

이차혁이 찾아왔던 날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나찰사와 저는 서로 친하기는 하나 그뿐, 각자의 과거와 비밀은 조금도 모른단 점이었다. 하련솔은 그 사실을 고치고 싶었다. 문정궁에 들어선 이상 지난날은 모두 묻고, 잊으라던 양 실장의 조언이 빛을 잃는 순간이었다. 과거를 모르고서 어떤 이에 대해 이해할 순 없는 법이었다. 비밀을 모르는 채 관계가 긴밀해질 수도 없다고 생각됐다.

하련솔은 나찰사가 궁금했다. 그에 대해 알고 싶은 만큼, 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자랐다.

그러자니 바리케이트가 필요했다. 얇은 복합문은 훌륭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하련솔은 복합문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퉁’ 하는 둔한 울림이 전해졌다. 문짝 너머의 상대도 몸을 기댄 모양이었다.

제 맞은편 자리에 앉아, 꼭 저처럼 문짝에 머리를 기댄 나찰사를 상상하며 그는 말했다.

“나는 가족이 아빠뿐이야. 네가 눈치챘는진 모르겠는데… 엄청 가난하게 살았고…. 음, 얼마나 힘들게 살았냐면, 우리 아빠는 은행보다 무당 말을 더 믿을 지경이었어.”

가난할 뿐만 아니라 박복해, 미신과 부적에 매달리던 아버지였다. 하련솔은 그를 기억했다. 온화하다면 온화하고, 순박하다면 순박한 그는 죄짓지 않고 열심히 사는 남자였다. 하련솔도 그런 아버지의 성품을 배우며 자랐다. 문제는 세상이 그들에게 너무 잔인하단 점이었다. 아버지는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고, 하련솔에겐 크고 작은 사고가 매해 벌어졌다. 그 바람에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돈을 벌고자 나설 무렵, 하련솔은 온 세상의 불행이 저에게 쏟아져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가 스물두 살이 되고 아버지의 수염이 하얗게 세어 버린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도리어 나빠지기만 했다. 아버지를 볼 때면 하련솔은 그의 점점 나약해져 가는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스물두 살 여름엔가, 배달 일을 하다가 발목 인대를 다쳤었어. 별수 없이 집에서 쉬는데, 아빠가 내 몫까지 밤낮없이 일만 하는 거야. 그날은 엄청 더운 밤이었는데… 열한 시쯤 됐나. 방이라도 치워 두려고 청소하다가 내가 뭘 찾았어. 보험 서류였는데, 사망 보험금을 보장한다더라.”

하련솔은 그 종이의 질감을 아직도 기억했다. 제 손금에서 흘러나온 땀에 젖어 점차 눅눅해지던 서류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한솔’ 두 글자가 번갈아 실려 있었다. 사망 시 지급된다는 보험금을 모두 합해보니 7억이라는 큰돈이 됐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두툼한 서류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읽었다. 그들 형편에 말도 안 되게 높은 가격인 매달 납입 보험료를 확인했고, 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는 기간을 확인했다. 대체로 가입일로부터 5개월, 혹은 6개월 뒤부터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확인한 보험 계약 날짜는 4개월 전이었다. 아버지가 투잡, 쓰리잡 가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일하기 시작한 기간과 같았다.

그제야 하련솔은 아버지를 이해했다. 빛이 바랜 듯 보이던 표정이며 부쩍 줄어든 말수, 잠도 잘 자지 않고 몸이 망가지도록 일하던 집착적인 태도까지, 모든 의문이 한 번에 해갈되었다. 형편에 맞지 않게 높은 보험료를 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돈을 모으고자 바빴던 모양이었다.

복합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형을… 죽이려고 한 거야?”

그 소리에 하련솔은 하하 웃었다.

“아니. 그 반대야.”

열 손가락을 꼽도록 많은 보험은 전부 아버지에게 걸려 있었다. 사망 보험금을 받아내자면 죽어야 하는 이는 아버지였고, 수령인의 이름이 한솔이었다. 모든 서류에 꼼꼼하게 기재된 제 이름을 보던 날에, 한솔은 숨이 막혔다.

“그래서 도망쳤어.”

단칸방 낡은 식탁 위에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그는 미련 없이 떠났다. 그가 더는 아버지와 기대어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듯이, 아버지도 구태여 한솔을 찾지 않았다. 찾으려고 노력하였지만 찾아내질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솔은 잊기 쉽고, 알아보긴 어려운 남자였으므로.

“이건 비밀인데, 그냥…. 너한테 이야기하고 싶었어. 난 너에 대해 잘 모르는데… 너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누구도 한솔에게 가까이 다가오질 않았기에, 누구에게건 말할 기회가 없었다. 하련솔로서는 원치 않게 품게 된 비밀이었다.

막상 제 이야기를 털어놓고 보니 속이 후련한 한편 조마조마했다. 문짝 너머의 나찰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쉽게 동정해도 좋고 입바른 말을 해도 좋으니 어떤 대답이건 빨리 들려주었으면 바랐다.

그러나 앉은 자세를 고치는 하련솔에게 들려온 건 제 이야기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형. 여기, 원래 내 비밀기지야.”

“…….”

난데없는 말에 하련솔은 어리둥절했다. 큰 눈을 끔벅끔벅하는 동안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는 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릴 때부터 내가 자주 숨어서 쉬던 곳이야. 인적도 드물고, 다른 전각이랑 동떨어져 있고, 시원하고…. 그거 알아? 옛날에는 요 옆 창고에 소금을 보관한 적도 있어.”

‘아’ 하고 하련솔은 깨달았다. 나찰사는 하련솔의 비밀을 알게 된 값을 내고 있었다. 오래된 비밀 하나를 들었으니, 저도 제 한 가지를 내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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