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여기서 딱 한 번, 어머니랑 마주친 적이 있어. 내가… 열세 살이던 해, 겨울이었어. 엄청 추운 날…. 이 문을 열었는데 어머니가 딱 계시는 거야. 대들보에 천을 걸어 두셨는데, 그게 참 힘들었나 봐.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앉아서 쉬고 있더라고.”
그날 이림범은 제 어머니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훌륭한 이목구비를 물려주신 어머니는 원체 타고나길 미인이었지만, 그날은 유독 보기 좋았다. 이림범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저를 반기며 웃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녀는 ‘범아’, ‘범아’하고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이리 온’, ‘엄마한테 오렴’ 속삭였고, 쭈뼛거리며 저에게 다가온 이림범을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낯선 상황에 당황하고 쑥스러운 와중에 이림범도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단단한 포옹을 오래도록 이어 나간 끝에,
‘내 아들….’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무얼 결심한 사람처럼 그녀는 기껏 대들보에 걸어둔 기다란 천을 빼내었고,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더니 이림범의 손을 잡았다. 아들과 함께 교태전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는 문정궁 곳곳에 놓인 지름길을 알려주었다.
“지금도 하나하나 다 기억나. 그날 어머니 기분이 참 좋아 보였거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돌이켜보면 그 환한 미소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숨어든 자리에 들이닥친 아들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제 아들이 저를 찾아 문정궁 곳곳을 헤매어 다녔다고 착각했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우울해진 저를 말리고자 일부러 찾아와주었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난생처음 아들을 안아준 것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살아가야 할 새로운 원동력을 얻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난 여기가 좋아.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져….”
이림범이 작게 속삭였다.
문정궁에서 보낸 유년기는 내도록 최악이었다. 이 궁을 채운 수많은 전각들이 죄 끔찍하고 무섭게만 느껴져, 제 어머니가 목을 맬 뻔한 처소를 좋아하게 될 지경이었다. 남이 들었더라면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일임을 그도 알았다. 그런들 감정이 움직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그날, 그 순간 어머니는 이림범을 좋아해 주었다. 안아주었고, 다독여 주었고, 손을 잡기도 했다.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이틀 전 일이었다.
이내, 벌컥 열린 문이 그의 이야기를 끊어놓았다. 깜짝 놀라 이림범이 뒤로 물러서려는데, 벌어진 문틈 새로 쏟아지듯 튀어나온 하련솔이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이림범은 두 팔 뻗어 그를 급히 안았다.
그러자 하련솔이 덥석, 이림범의 얼굴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는 양 자연스럽고 빠른 손길이었다.
“…….”
어리둥절하니 입을 다문 채 이림범은 제 얼굴을 더듬거리는 손길을 느꼈다. 느리고, 신중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림범의 얼굴을 익히고, 표정을 읽어내리는 눈이 달린 손길이었다.
하련솔은 그의 군살 없는 뺨과 딱딱한 턱, 너무 높다고 생각되는 콧대를 천천히 읽었다. 풍성한 속눈썹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주름 하나 없는 이마를 지나, 풍성한 머리칼에 손이 닿았다. 말랑한 귓불에 이르기까지 이목구비를 읽어내린 끝에, 하련솔이 속삭였다.
“안 우네.”
그에 이림범이 웃었다.
“형도. 안 우네?”
제 손 아래 놓인 뺨이 봉긋해지고 눈매가 접히는 걸 느끼며, 하련솔이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도 움찔 이마를 찡그리며 눈썹을 구겼고, 슬픈 얼굴을 감추려는 듯 이림범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얼굴을 쓰다듬던 손도 자연스레 그의 목에 감겼다. 살 내음이 섞이도록 강한 포옹이었다.
침묵 속에 그들은 기다렸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기를, 북받친 감정이 식기를, 이 순간이 뇌리에 명확하게 각인되기를, 착한 아이들처럼 얌전히 기다렸다.
긴긴 포옹 끝에 먼저 몸을 떼어내려는 이는 하련솔이었다. 그러나 이림범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제 품에서 벗어나려는 하련솔을 오히려 더 세게, 와락 껴안았다. 제 가슴팍에 그의 가슴을 바짝 붙이고, 바스락거리는 천 아래의 마른 몸과 뜨거운 체온을 온통 느꼈다.
서툰 포옹을 거절하는 대신, 하련솔은 이림범의 등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순전한 위로에 이림범은 쓴웃음을 삼켰다. 제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저를 달래는, 하련솔이 좋았다.
다른 한편 그는 두려웠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언젠가는 하련솔을 좀먹을까 봐, 그게 막연히 무서웠다.
“…….”
눈길을 올리면, 이림범은 하련솔의 정수리 위로 그의 방 안 천장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직선으로 단단히 지붕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는 지난 일을 모두 잊었다는 듯 그저 그렇게 존재했다. 유독 좁다랗게 느껴지는 방의 천장을 노려보다, 이림범은 고개 숙였다.
그리고 물었다.
“…형. 여기에서 사는 게 지루하진 않아?”
“응? 아니.”
하련솔의 대답은 싱거울 만큼 빨랐다. 시원시원한 그에 비해 이림범은 끈질긴 데가 있었다. 그는 이미 답을 얻은 질문을 거듭 고쳐 늘어놓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지루해지지 않겠어? 언젠가는 궐에서 사는 게 지겹고, 질리고, 싫어지지 않을 거 같아?”
“입궁한 지 한 계절도 안 지났는데, 뭘….”
“이곳에선 시간이 빨리 흘러.”
대뜸 치미는 충동이 있어, 이림범은 떠오르는 생각을 곧이곧대로 뱉었다.
“그러지 말고, 형. 나랑 같이 나가 살지 않을래?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치지 않을래? 황제고 무화고 간에 다 버리고….”
하련솔 앞에만 서면 그는 유독 어린애 같을 때가 많았다. 말도 행동도 여과를 거치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치기 어린 태도로 제 진심을, 있는 그대로 내놓게 되었다. ‘나찰사’라는 가명을 쓰며 가상의 인물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그때만큼은 솔직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반면 하련솔은 침착한 어른이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그는 이림범을 가볍게 밀어냈다. 너른 품에 파묻히다시피 안긴 몸을 떼어내더니 풀썩, 마루 한편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했다.
“네가 뭔갈 오해한 거 같은데…. 나는 너랑 바람피울 생각이 없어.”
“뭐?”
생각지도 못한 거절 사유에 이림범의 눈이 커졌다. 멍하니 장목한 채 그는 하련솔을 바라만 볼 뿐, 무어라 꺼낼 말을 찾지 못했다. 제가 들은 말이 무언지 이해조차 완벽하게 되질 않았다.
반면 하련솔은 심각했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 진 주름이 그 심각성을 증명했다.
“너와 그런 식으로 만날 수도 없고, 이곳을 떠날 수도 없단 말이야. 나는…, 황제에게 있어 난 무화고, 너는 가족이잖아. 지난번 실수는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 그렇게 하는 게 맞아.”
설득력을 지닌 말이 은근히 끈덕졌다. 황제 본인인 이림범조차 ‘그건 그래’ 하며 깜빡 넘어갈 뻔했다. 정신을 차려보려 이림범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했다.
“형…. 황제한테는 형 외에도 가진 무화가 마흔 명이나 더 있어. 형은 딱히 황제를 원하지도 않잖아. 그래도 의리를 지키고 싶어?”
“의리 문제가 아니야. 의리에 모든 걸 맡겨도 될 것 같으면, 법은 왜 있고 규칙은 왜 있고 시스템은 왜 있어?”
이림범은 뜸을 들여가며 설득하기 바쁜데, 하련솔이 따박따박 뱉어낸 말은 꾸중에 가까웠다. 문정궁에서 가장 야무진 무화가 여기 있었구나… 이림범은 생각했다. 도무지 한 마디도 지질 않고 맞는 말만 하니, 정절을 잘 지켰구나 칭찬하는 상이라도 내려야 할 판국이었다.
소리 없는 실소를 흘리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반듯반듯한 눈썹은 오늘따라 더욱 일자로 뻗었고, 두 눈은 이림범이 앉은 방향에 고정된 채 굳건했다. 여태 봐 온 중에 가장 진지하고, 심각한 모습이었다.
‘미치겠네.’
그리고 미치게 예뻤다.
하련솔은 볼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상냥한 사람인 줄이야 진작 알았지만, 만나본 적도 없는 황제까지 염두에 두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찰사로서 거절을 당해 마음이 아픈 한편, 황제로서 이림범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중적인 마음은 이내 아리송한 질문이 됐다.
“…황제가 아닌 날 좋아해 줄 순 없다는 거야?”
그러자 하련솔이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
그 바람에 이림범은 애가 닳았다. 그는 감정의 밑천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즉답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니 마음이 쓸쓸하고 조금은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