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이림범은 우울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형이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사실은 내가 싫은 거야?”
듣던 중 터무니없는 소리에 하련솔은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튀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뭘 그리 극단적으로 생각하냐, 좋아하지 않는다고 싫어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냐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솟구쳤다. 그러다가도, 나찰사라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만으로도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입이 딱 닫히고 혀가 굳었다. 다른 한편으론 거짓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 진심을 조금이라도 더 숨겨보려, 하련솔이 말을 돌렸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인데?”
“…꼭 연애 감정이 있어야 좋은 사이인 건 아니잖아.”
“형.”
다시금 분위기를 다잡으려는 양 이림범이 짧게 말했다. ‘형’이라는 부름은 하련솔의 약점이었다. 특히 매달리듯 간절하게 부를 때 그의 마음은 더욱 약해졌다. 그러잖아도 낮은 목소리를 무진 시무룩하게 내리깔며 부르는, 이림범의 ‘형’에는 특별한 자력이 있었다. 그 목소리는 하련솔의 경계심을 말랑하게 풀어놓고, 부드러워진 신경을 저를 향해 쏠리게 했다.
긴 한숨 끝에 하련솔은 제 패배를 인정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로, 그는 속삭였다.
“나도, 너 좋아하지…. 좋아해. 하지만 감정 가는 대로 살 순 없잖아.”
심란한 얼굴로 전해온 이야기에, 이림범은 활짝 웃었다.
“형의 감정이 향하는 곳은 나라는 거네?”
그 음성에 실린 꾸밈없는 기쁨에 하련솔은 마음 한편이 녹아내렸다.
‘감정만 그럴 뿐이지 너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데, 그래도 그게 좋을까.’
나찰사를 애정결핍에 걸린 아이처럼 생각하며, 하련솔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더욱 어리숙한 요청이 덧대어졌다.
“끄덕 말고, 말로 해줘.”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못 이기겠다는 듯 마지못해 뱉은 대꾸였다. 하련솔은 낙담을 담아 내민 말이었으나, 이림범에겐 간절히 필요로 하던 확답이었다. 허탈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고개 주억거리는 하련솔을 보며, 이림범은 머릿속에 등이 켜지는 것을 느꼈다. 높고 험한 낭떠러지 위에 서 있다가 대뜸 환한 평지로 순간 이동한 착각마저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결심을 고쳐먹게 만드는 건 큰 사건이나 사고 따위가 아니었다. 일상에 스며 알아챌 듯 말 듯 작고 온화하게 누적되어 온 감정이 있었다. 그 위에 별다른 의도 없이, 깃털처럼 내려앉은 말 한마디, 그 말이 주는 사소한 자극이 끝내 이림범의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그 순간 이림범에겐 하련솔밖엔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모든 치들이 안겨준 불안과 공포는 즉각 자리를 잃어버렸다. 여태껏 그를 겁먹게 한 일련의 비극들은 모두 남의 일처럼 생각됐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것들은 그의 어머니의 일이고 그의 아버지의 일이고, 그 아버지가 사랑한 전대 무화 간의 일이지 이림범의 일이 아니었다. 이림범은 그들과 달랐다. 그들이 만들어낸 그늘에 숨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잘못을 절대로 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알겠어.”
끝내 결심을 담아 이림범이 중얼거렸다.
이 조그만 처소, 개구멍을 이림범은 좋아했다. 언제고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날 개구멍의 주인이라며 등장한 하련솔의 곁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게 좋고, 먹는 게 좋고, 수다가 좋은 하련솔과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불안하지 않았다. 화도 나질 않았고, 살 에이는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곁을 내주는 것만으로 하련솔은 이림범을 위로했다. 그는 이림범으로 하여금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련솔을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욕심이 이림범을 채웠다. 낡은 지옥과 같은 문정궁 전체가 그처럼 편안하게 느껴졌으면 싶었다. 하련솔이 이곳 개구멍을 완전한 안식처로 만들었듯이, 제 침전을 포함하며 문정궁 곳곳이 그가 주는 안식으로 가득했으면 바랐다. 그에게 문정궁을 맡기고 싶었다. 그를 문정궁의 안주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저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유일한 타인인 하련솔에게, 이림범은 그 자신을 주고 싶었다.
“내가 형을 찾아오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이 이림범의 단령 속까지 스몄다. 하련솔도 제 머리칼이 날리는 걸 느끼는지 한쪽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하련솔의 곁에 머무르던 큰 존재감은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대뜸 멀어지는 발소리를 당황한 채 듣는 것밖에, 하련솔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순간에는 도리 없이 슬프고 외로웠다. 나찰사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뱉어놓은 말 때문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하련솔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저는 그와 서로 간에 비밀을 털어놓고 화해했다고 믿었는데, 나찰사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소화되지 못한 감정이 목구멍에 걸린 듯해, 하련솔은 아주 조금 괴로웠다. 문지방을 넘어 엉금엉금 제 방 안으로 숨듯이 기어 들어가면서, 그는 제 침실이 전처럼 포근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나찰사가 남겨두고 간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서, 그 무게가 방바닥을 누르고 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문간에 주저앉아 그는 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작은 두통이 일었다. 간만에 눈두덩이가 무겁고 눈알 뒤편이 쓰라렸다. 완전히 가신 줄 알았던 통증을 다시금 맞이하며, 더운 손바닥으로 눈꺼풀 위를 꾹 눌렀다.
“후우….”
긴 한숨을 의도적으로 뱉으며 답답한 속을 풀어보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길게 슬퍼할 새 따윈 없었다. 잔인할 만치 고요해진 처소의 침묵을 부수며, 초롱이 숨 헐떡이며 뛰어든 것이었다. 어느 때보다 흥분한 목소리로 그녀는 ‘솔 님’, ‘솔 님’하고 하련솔을 찾았다. 두 팔 가득 형형색색 예쁜 옷을 안아 든 채였다.
상기된 얼굴로 초롱이 외쳤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준비합시다! 황제 폐하께서 솔 님을 침전으로 부르십니다! 이차혁 님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닌, ‘하련솔’, 우리 솔 님을 콕 집어 부르셨다고요!”
몹시 상기된 탓에 그녀는 하련솔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는 줄도 몰랐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초롱은 빠르게 움직였다. 참빗과 세안 도구, 그리고 숨겨둔 옷 한 벌을 꺼내 들며 기쁜 날을 맞이하기 여념 없었다.
“어쩐지 오늘은 운이 좋다 했죠, 오는 길에 네 잎 클로버를 세 개나 주웠거든요!”
***
손발을 덜덜 떨며 하련솔은 느릿느릿 움직였다. 침전으로 향하는 길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몇 번이고 길 한복판에 멈추어 서 뒤를 돌아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멀리서 그를 쫓던 초롱이 쪼르르 다가와,
“잘하고 있어요, 솔 님!”
응원의 박수를 남기고 다시 토도도도 멀어지길 반복했다.
‘그게 아냐, 초롱아. 나 좀 말려 달란 말이야….’
벌렁벌렁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서 하련솔은 재차 발을 앞으로 뻗었다. 내심으로는 피눈물이 강을 이뤘다. 황제를 만나기가 두렵고, 걱정되고, 불안했다. 그가 저라는 변두리 꼴등 무화를 콕 집어 부를 때엔 응당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일지 유추를 하면 할수록 나쁜 생각밖엔 들지 않는 것이었다.
하필 일주일간 자리를 비웠던 황제였다. 먼 나라 이웃 나라를 순방하고 오늘 오후에 돌아왔다고는 하련솔도 전해 들어 알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셈인데, 얼마나 피곤하고 휴식이 간절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날 밤, 구태여 잘 알지도 못하는 마흔한 번째 무화를 찾는다는 게 이상했다. 구체적으로 전할 말이 있고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야만 이 부름이 그나마 말이 되는데, 그와 일면식이 없고 맡은 바 일도 없는 하련솔로선 머릿속이 그저 백지였다.
딱 한 가지, 뇌리에 아른거리는 인영이 있기는 했다. 하필 오늘, 그것도 바로 조금 전에 제 처소를 다녀간 나찰사였다. 그러고 보면 나찰사를 만난 것도 한 주 만의 일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 여태껏 부재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듣질 못했다.
‘어라…? 설마….’
이내 그럴싸한 의심이 하련솔의 머릿속에 싹을 틔웠다.
‘아냐…. 에이! 아니겠지.’
몇 번이고 속으로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어도, 그가 짱돌 굴려 얻어 낼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나… 바람 났다고 신고당했나?’
뚱딴지같은 확신에 사로잡혀 하련솔은 허파에 바람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이 맞지 싶었다. 하필 오늘 나찰사가 찾아와서, 서로 간에 좋아한다느니 마음이 향한다느니 느끼한 이야길 나누지 않았던가. 또 하필이면 대화를 나눈 장소가 처소 방안도 아니고 마루 위였다. 근방을 지나는 귀 밝은 작자가 있었더라면, 그들 대화를 몰래 훔쳐 듣고 황제에게 일러바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