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상상이 됐다. 하련솔의 머릿속에서 그 상상은 아주 고오얀 무화라 낙인찍힌 제가 궁 밖으로 쫓겨나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병에 걸려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궁에서 지원해주는 돈줄도 다 끊기고, 몸 눕힐 방도 맛있는 식사도 친절한 초롱이도 없는 진흙탕 인생에 내던져지면… 깡통을 목에 걸고 공원에 나앉는 것밖엔 답이 없었다.
‘박스 팻말에 ‘문정궁 무화 출신 거지’라고 적어야겠다. 500원당 1분씩 궁에서 쫓겨난 썰을 야금야금 풀어야지. 그럼 황실 모욕죄로 콩밥이나 먹을 수 있으려나?’
울적한 마음에 하련솔은 덜그럭덜그럭, 기름칠이 필요한 깡통 로봇처럼 움직였다. 초롱이 곱게 빗어넘긴 머리칼도 너무 보드라워 피부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는 비단옷도 모두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턱’, 하련솔의 발이 멈췄다. 같은 길을 오갈 적에 지난날엔 느끼지 못한, 특이한 블록이 신발 밑창에 닿았다. 더듬더듬 발바닥을 문지르며 확인하자니 울퉁불퉁한 게 점자 블록인 듯했다. 새로운 감각은 그러나 하련솔에게 절망만 안겨줄 뿐이었다. 한참 걸어온 길 끝에 놓인 점자 블록이 뜻하는 바는, ‘이제 침전 앞에 도착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제자리에 선 채로 하련솔은 몇 번씩 발을 굴렀다. 전신이 종이 인형처럼 가냘픈 탓에 그 모습은 얼핏 빈혈을 느낀 환자가 비틀거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실례합니다. 어지러워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하련솔은 대뜸 다가온 호위 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날 침전 앞에서 저를 돌려보냈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하련솔은 안색을 밝혔다. 또 한 번 저를 박대해주지 않을까 미약한 기대를 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냉큼 거짓말했다.
“저, 사실 안 괜찮은데…. 엄청 어지러워서 혼자 길을 못 찾겠네요. 더는 못 걷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손등을 이마에 대고 비틀거렸다. 꽉 막힌 호위 실장이 다시금 저를 쫓아내기를 간절히 바라서였다.
그러나 웅 실장의 마음가짐은 지난날과 사뭇 달랐다. 자신의 실수로 가여운 박대를 당한 무화를 기억하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하련솔을 돕고자 했다. 어쩌면 좋을까 방법을 찾느라 잠시간 머뭇거리다, 그는 하련솔의 손아귀에 제 등채 손잡이 부분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낯선 감촉에 당황하며 하련솔이 손을 물렸다.
예민하고 나약한 무화를 향해, 웅 실장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봉입니다. 함부로 부축을 해 드릴 순 없으니 이거라도 잡고 따라오십시오.”
“…아니, 저는…. 그게….”
“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폐하의 침소까지 제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
재차 손바닥 안으로 가죽 손잡이가 밀려 들어오매, 하련솔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호위 실장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하련솔도 그를 따라 엉거주춤 걸음을 움직였다. 등채에 달린 작은 솔이 앞뒤로 흔들거리며 하련솔의 손등을 간질였다.
호위 실장의 보필을 받으니 황제의 침소까지 금방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걷던 하련솔은 ‘퉁’ 소리와 함께 실장의 어깨에 머리를 부딪쳤다. 갑자기 멈추어 선 실장이 뒤늦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 왔습니다.”
“버, 벌써요?”
하얗게 질린 하련솔의 등을 떠밀며 실장이 외쳤다.
“폐하, 무화 하련솔이 도착했습니다.”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련솔은 제 손안의 지푸라기였던 등채마저 놓치고야 말았다. 열린 문 앞에서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탄식했다. 제 발로 이곳까지 들어온 이상 더는 달아날 방도가 없게 됐다. 죽기 아니면 운 좋게 살아남기, 둘 중 하나였다.
한 발 두 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자 발밑으로 문지방이 지나는 게 느껴졌다. 세 발 네 발, 앞으로 직진한 순간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 온몸에 소름이 쭉 올랐다.
그리고,
“흠.”
작은 콧소리가 하련솔을 놀라게 했다. 제자리에서 볼썽사납게 파닥거리며, 그는 허둥지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넙죽 엎드리고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제를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하는지, 침전에서의 규칙은 어찌 되고 주의할 점은 또 무언지 초롱이 알려준 말이 없었다. 똘똘한 시종을 뒤늦게 그리워하며, 하련솔은 두 손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가 있거라.”
이내 황제가 말했다. 하련솔이 아닌, 침실 안에 머무르는 다른 시종에게 건넨 말이었다. 쪼르르 도망치듯 사라지는 발소리가 양방향에서 들려왔다.
황제와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보다도, 그의 음성에 하련솔은 놀라 소스라칠 뻔했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해도 그렇지, 황제의 목소리는 나찰사와 지나치게 흡사했다. 무섭도록 낮은 저음,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 유독 부드럽게 느껴지는 말끝까지 전부 똑 닮았다. 고압적인 어투만 아니었더라면 나찰사 본인이라 착각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바닥과 하나가 될 기세로 납작해진 하련솔을 향해, 황제가 말했다.
“고개를 들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하련솔은 떨리는 얼굴을 위로 들었다. 그러자 묵직한 발소리가 터벅터벅 울렸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움직여 황제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픈 마음이 절실한 하련솔을 향해, 그가 물었다.
“내가 널 왜 불러냈는지, 그 뜻을 알겠느냐?”
“아, 아뇨…. 모릅니다.”
급한 마음에 하련솔은 즉답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나찰사와 나눈 대화와 관계에 대해,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우선 비밀을 지키고자 했다. 제 안위만 걸린 문제였더라면 당장에 자수를 해 오해를 풀고, 처벌 수위를 낮추려 노력했을 테지만, 나찰사가 엮여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여차해서 일이 잘못되거든 저는 문정궁에서 쫓겨나면 그만이라지만, 아니 그 또한 큰일이긴 하였지만, 나찰사는 황제의 친척이었다. 평생 두고두고 미운털이 콕콕 박힐 텐데, 명절 때마다 황제가 그를 얼마나 꼬장꼬장하게 괴롭힐지 누가 알겠는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하련솔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얼굴을 추켜들고 있자니 목덜미가 아프고 어깨에 쥐가 나 별수 없었다. 차라리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려는데, 곧장 다가온 손이 그의 턱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황할 새도 없이 휙, 마른 고개가 위를 향했다.
황제가 제 턱을 쥐고 있음을 알고, 하련솔의 탁한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정말 모르겠느냐.”
재차 하문하는 소리가 묵직했다. 이제 하련솔은 울고만 싶었다. 거듭 질문하는 걸 보면 원하는 바 답이 정해져 있는 듯한데, 저는 차마 사실을 고할 수가 없었다. 울먹울먹 헝클어진 얼굴을 황제의 손 위에 내놓은 채, 느릿느릿 가망 없는 거짓말을 이어 나갈 따름이었다.
“정말…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감각이 하련솔을 사로잡았다. 얼굴 앞으로 더운 기운이 밀려드는 느낌이 일더니, 입술 위로 아주 부드러운 피부가 와 닿았다. 도톰하고 따듯한 것이 하련솔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살포시 내려앉은 감각은 ‘쪽’ 소리와 함께 여운을 남겨둔 채 뒤로 물러났다.
몸을 뒤로 피하지도, 잡힌 얼굴을 빼내지도 못하고서 하련솔은 어리바리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할 새도 없이, 그의 뺨 위에 황제의 뺨이 스치듯 닿았다.
“이래도 모르겠어?”
귓가를 스치는 날숨이 하련솔을 움츠러들게 했다. 친숙해서 더 두렵던 황제의 목소리는 이제 어투까지 완전히 나찰사와 같게 됐다.
“내가 형을 찾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 했잖아….”
그리고 나찰사만이 할 수 있는 말이 들려왔다. 그 속삭임 한 번에 하련솔의 머릿속, 무섭고 거대한 황제가 모습을 바꿨다.
“앞으론 형이 날 찾아와 줘. 매일 밤 형을 부를 테니까.”
들은 말을 미처 소화해내지 못해, 하련솔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아니, 이게….”
밀려드는 회상이 수십 조각이건만 그 중 무엇 하나 제자리에 붙일 수 없었다. 나찰사의 정체를 유추하기에 충분한 힌트들은 이미 산재해 있었다. 다만 하련솔이 그게 퍼즐인 줄 몰랐을 뿐이었다.
“아니….”
그는 나찰사를 철석같이 믿었다. 그가 다른 이로 변신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다른 이가 그로 변신해 다가온 것이라고도 예상하질 못했다. 그가 이 나라의 황제이자 저라는 무화의 주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네 번째 같은 소리만 반복하는 하련솔이 답답해, 이림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니’ 말고 다른 말은 못 해?”
농담으로 면박을 줘도 하련솔은 제대로 듣지 못하는 듯 보였다. 백지장처럼 하얗던 얼굴을 빨갛게 익힌 채 그는 정신이 조금도 없었다.
사람이 엎드린 자세로도 나자빠질 수 있다는 걸 이림범은 처음 알았다. 손끝, 발끝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듯 하련솔이 허물어졌다. 사지는 바닥에 납작하게 들러붙다시피 했고, 이림범의 손에 잡힌 얼굴도 아예 그의 손바닥에 푹 파묻혔다. 이러다 슬라임처럼 녹아내리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형. 괜찮아?”
그에 이림범도 무척 당황했다. 내도록 제 정체를 밝히는 날을 상상해온 그였다. 그의 상상 속에서 하련솔은 ‘야’ 하고 버럭 화를 내고, 긴긴 잔소리로 저를 꾸중하고 야단을 쳤다. 화들짝 놀랄 줄 알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충격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내 하련솔은 이림범의 짐작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다. 퍼뜩 정신이 든 듯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슬금슬금 뒤로 기었다. 그러더니 맨바닥에 재차 엎드리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눈이 보이질 않아서, 황제 폐하를 못 알아보고 이제까지…, 이제까지 많이 무례했습니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만치 재빠른 동작이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기분 상하게 해드렸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더니 두 손을 한데 모아 싹싹 빌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이림범은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