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형….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하련솔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이림범이 얼른 손 뻗었다. 라이터 없이 불 피우려는 사람처럼 쓱쓱 싹싹 문지르기 바쁜 손바닥을 떼어내고, 제 두 손에 각각 맞잡았다. 그제야 하련솔이 정처 없는 사과를 멈췄다. 그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가 흘러내렸다.
애가 타는 듯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하련솔이 물었다.
“화 안 나셨어요?”
“…왜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형이야말로 나한테 화를 내야지. 내가 형을 속인 거잖아.”
꼭 잡은 두 손을 위로 당기며, 이림범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악력을 못 이겨 하련솔도 주춤거리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무진 풀죽은 그의 얼굴을 이림범이 눈에 담았다. 새삼, 말도 안 되게 착하고 순순한 남자였다. 그 보드라운 성격에 감탄이 날 지경이었다.
그제야 살펴보니 하련솔이 걸친 상의가 황제의 옷이었다. 내심 이림범은 하련솔의 시종을 칭찬했다. 제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던 날, 개구멍 쪽마루에 벗어 던져놓곤 잊어버린 대창의를 시종이 따로 챙겨둔 모양이었다. 황제가 남긴 흔적을 함부로 어디에 반납하지도 못했을 테니 꽁꽁 숨겨 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제 무화에게 입혀 침전으로 보내다니 그 생각이 참 깜찍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대창의에 금색 자수가 새겨진 것이 이림범이 걸칠 땐 흑호랑이를 표현한 것 같았는데, 하련솔이 걸치니 밤의 개나리를 두른 듯했다. 양옆, 등 뒤 세 갈래로 훤히 트인 밑단도 훨씬 길어 보였고, 소매도 두 번 접어 하얀 원단이 위로 올라온 지라 생판 다른 옷 같았다. 이림범조차 잠시간 못 알아볼 정도였다.
“이리 와.”
이림범이 그렇게 말한 순간 하련솔에겐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신이 홱 앞으로 당겨지며, 황제의 너른 품에 고스란히 안겼다. 하련솔을 부둥켜안은 채 이림범은 그의 손에 대고 입김을 호호 불었다. 끝마디가 파랗게 질린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서였다. 조금 놀라게 해 주려 한 것뿐인데, 도리어 겁에 질리게 해 미안했다.
멍하니 그의 포옹을 받아주는가 싶던 하련솔이 퍼뜩 몸을 움직였다. 꽉 붙들린 손을 빼내려 뒤흔들며, 그가 외쳤다.
“잠깐! 잠시만. 나, 하나… 한 가지만 물어보게 해줘….”
그러더니 제자리에 선 채 홀로 비틀거리는 것이었다.
황제의 부름을 받아 예쁜 옷을 차려입고, 앞머리가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면서 창백하게 선 그의 모습이 이림범을 마음 아프게 했다. 그는 쓴 욕설을 속으로 삼켰다. 바보 같이 들떠서는, 하련솔의 몸이 얼마나 나약한지 아주 잠깐 잊어버린 제 죄가 컸다.
하련솔은 놀랐다는 이유만으로 빈혈과 통증을 느끼는 환자였다.
“으….”
거듭, 놓아달라고 팔을 흔들기에 이림범은 잡았던 손을 풀어주었다. 잘못 힘을 주었다가 하련솔의 어깨가 빠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신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미리 뻗어두었다. 언제든 끌어안아 부축할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떨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하련솔이 말했다.
“나찰사라고 그랬잖아. 너…, 황제의 먼 친척이라고… 나한테 그랬었잖아. 그거 말고, 나한테 한 거짓말이 혹시 더 있어?”
“없어.”
뻣뻣하고 수직적인 인간관계만 가져 본 터라, 하련솔을 점령한 감정을 읽어내기 위해 이림범은 머리를 팽팽 굴려야 했다. 질문 끝에 불안감이 묻고 눈시울이 빨개지는 걸 보면 그는 무언가 굉장히 두려운 듯했다.
잠시간 고민한 끝에 불현듯, 이림범은 그 공포의 원흉을 알아챘다. 황제라는 작자가 가짜 연극을 하며 저를 가지고 논 것일까 봐… 하련솔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떨고 있었다.
“형.”
최대한 작게, 속삭이듯 소리 내며 이림범은 그를 불렀다. 겁에 질린 하련솔이 쓰러질까 염려되어, 그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허둥지둥 말을 쏟아내야 했다.
“정말이야. 형. 그거 말고는 거짓말한 거 없어. 정말 미안해. 형이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처음 거짓말을 한 의도는 단순했다. 멀어버린 눈을 고쳐주었는데도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화가 재밌어서 그랬다. ‘폐하’, ‘폐하’ 하며 제 발목에 매달려야 할 녀석이 뻔뻔하고 예쁜 얼굴로 길목을 향해 턱짓하며, 이만 꺼져달라고 눈치를 주는 게 귀여워서 그랬다.
나중에는 해방감을 즐기느라 바빴다. 황제가 아닌 그저 먼 친척이라며 제 신분을 감추고, 의무와 권력을 벗어놓고 호형호제하며 지내니 마음이 편했다.
이내 그 만남에 중독됐다. 정확히는 하련솔에게 중독됐다. 더 자주, 편하게 그를 만나고 싶단 바람에 휩싸였다. 상냥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이름이 나찰사가 아닌 범이었으면 바라게 됐다.
그게 전부였다.
“정말 그게 전부야.”
이림범이 말했다. 그의 말끝에, 하련솔이 비틀거리며 낸 소음이 섞였다. 이번에야말로 이림범은 그를 제 품에 제대로 안았다. 제 옷깃에 그의 얼굴이 파묻히도록 깊이 끌어안고, 마른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정말이야? 정말… 너야?”
숨결 반, 목소리 반을 내어 하련솔이 물었다.
“그래, 나야.”
그의 정수리에 턱을 기대며 이림범은 무화의 팔뚝 위를 엄지로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쓰다듬을 때마다 상대의 몸을 꽉 채운 긴장이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 때문에….”
“그래, 미안해. 울지 마.”
이내 하련솔이 눈물을 보였다. 불쑥 솟구친 눈물은 빠르게 뺨을 적시며 떨어졌다. 이림범이 얼른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응?”
어린애 다루듯 건넨 위로에 하련솔은 그저 억울했다. 쏟아지는 눈물을 그쳐보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눈물은 그의 속눈썹을 무겁게 하며 줄줄이 빠져나왔다.
“내가 울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하련솔은 계속 울었다. 그의 뺨과 콧잔등에 여러 개의 눈물 줄이 생겼다. 하얀 얼굴은 물에 젖으니 더욱 투명해 보였다.
그를 끌어안은 채로 천천히, 이림범은 제 침상 위로 움직였다. 대나무 발이 쳐진 자리 너머에 기꺼이 들여놓은 무화는 제가 처음임을, 하련솔은 모를 터였다. 이림범이 선 자리에서 자세를 낮추자, 그에게 온전히 기대어 있던 하련솔은 중심을 못 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자연스레 그의 허리가 이림범의 다리 사이에 놓이고, 축 늘어진 머리가 어깨에 기대어졌다.
손을 들어, 이림범은 우는 이의 두 눈 위를 덮었다. 손가락 사이의 틈조차 생기지 않게끔 꼼꼼히 가려주자, 마구잡이로 쏟아지던 눈물의 양이 부쩍 줄었다.
“나 때문이야.”
이림범이 말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내 덕분이야’ 하고는 으스댔을 테지만, 눈물 흘리는 하련솔 앞에서는 자책이 먼저 나왔다.
“걱정하지 마. 형 눈이 나아지고 있어서 그런 거니까. 급하게 빛을 쬐니까 시리고 아픈 거뿐이야.”
“으…, 응.”
이림범의 말이 맞았다. 이따금 회복에도 고통이 따르는 법이었다. 완전히 멀어 버렸던 눈이 대뜸 떠지고, 차단당했던 빛이 쏟아져 들어가매 하련솔은 눈알이 타는 듯했다. 커다란 두통이 일어 골이 울리고, 목덜미는 물론이고 어깻죽지까지 쥐가 올라 뻐근했다.
참아내려 애를 쓰기도 잠시, 하련솔은 정신없이 신음하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나찰사가 방문한 다음 날마다 눈이 조금씩 떠지고, 빛 번짐으로 인한 통증이 왕왕 있긴 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심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으…, 흐으….”
잇새로 신음이 흐르고 속옷 안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불 위에 나자빠진 다리를 추스르며, 하련솔은 황제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암흑 속에서 느껴온 무기력한 외로움을 잊어버리곤, 차라리 낫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이림범은 저로부터 무화가 달아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하련솔이 겪는 고통을 알고, 그를 낫게 할 방법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른팔을 하련솔의 어깨에 단단히 두르고, 좌우로 비틀어대는 허리 위에 다리 한 짝을 감았다. 온몸으로 먹잇감을 포박한 뱀과 같은 자세였다.
“쉿…, 가만히. 가만히 있어, 형.”
눈을 가린 손에 슬그머니 힘을 줘 제 어깨에 뒤통수를 기대게 하자, 하련솔이 더운 숨을 씨근덕거렸다.
“금방 나아질 거야. 내가 그렇게 해줄게. 내가, 다…. 모두 다 낫게 해줄게. 가만, 가만히 있어….”
열 기운을 못 이겨 팔짝거리던 몸이 서서히 멈췄다. 헐떡헐떡 거친 숨결은 여전했지만, 전처럼 막무가내로 달아나려 하진 않았다. 고개 숙여, 이림범은 하련솔의 뺨을 적신 눈물을 확인했다. 그의 눈을 덮은 제 손 아래로, 새 눈물 한 방울이 느리게 방울져 내렸다.
그의 뺨에 입술을 대고, 이림범은 타인의 눈물을 맛봤다. 차게 식은 뺨의 온도 때문인지 하련솔의 눈물은 겨울 바닷물처럼 짜게 느껴졌다.
“그래…. 착하다.”
이내 하련솔이 조용해졌다. 너무 아파서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황제에게 얼굴이며 몸통까지 모두 다 내맡겨버린 채 그는 그저 얌전했다. 소위 아픈 이들은 예민해진다고들 하는데, 무화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황제 앞에서는, 그들 모두 온순하기 짝이 없는 양이었다. 황제가 건네는 눈짓, 손길, 말 몇 마디면 열이 식고 두통이 가시니 착하게 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련솔은 그 정도가 고약했다. 가뜩이나 착한 성미인 그는 별다른 의심도 경계심도 없이 쉽게 이림범에게 몸을 내맡겨 버렸다.
그 순순함이 도리어 이림범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저 아프다고 악이라도 쓰고 지랄 발광을 하면 미운 마음이라도 들 텐데, 두 뺨에 눈물 줄을 만들며 축 늘어져 있으니 애 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