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하련솔은 이림범이 만나본 중 가장 심각한 개화병 환자였다. 그의 몸에 깃든 개화병 증세는 쉬이 나아지질 않았고, 겨우 좋아진 뒤에도 금세 악화됐다.
그를 부둥켜안고 있자니 이림범은 도리어 자신이 괴물이라 생각됐다. 하련솔에 비하자면 그의 몸은 너무 크고, 굵고, 커다랬다. 앞으로 팔을 쭉 뻗어 하련솔의 마른 발목과 견주어보다, 이림범은 콧김을 세게 내쉬었다.
‘누가 보면 내가 형 잡아먹고 큰 줄 알겠네.’
아픈 이를 끌어안고 버티자니 문득 하련솔의 비밀 이야기가 떠올랐다. 온 세상의 불행이 전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던가. 개화병도 그에게 들이닥친 큰 불행 중 하나일 터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클라이맥스급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렇겠지?’
그래야만 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생기는 건 그에게 있어 너무나 불공평하고 끔찍한 일이었으므로.
제 품 안의 하련솔을 부드럽게 고쳐 안자, 좀 전에 비해 열 기운이 한풀 가신 것이 느껴졌다. 줄줄 흘린 땀이 식은 덕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나, 다른 무화들에 비하자면 하련솔의 회복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개중에서 병세가 독한 수준인 이차혁도 사나흘 간격으로 이림범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만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하련솔은, 이림범이 벌써 몇 차례 개구멍에 들렀음에도 시력을 완전히 되찾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와락 품에 끌어안은 채 한참을 버티는데도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가뜩이나 타고나길 약한 몸에, 게다가 너무 늦게 개화병이 들어 그런 듯했다.
이림범은 하련솔의 눈을 덮은 오른손을 재차 단단히 오므리고, 왼손으로 팔뚝을 주물러 주는 등 더욱 열심히 그를 만졌다. 황제로서, 공식적으로는 처음 무화 하련솔과 만난 자리인데, 저는 안달이 났고 하련솔은 가만히 늘어져 있기만 하니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1분, 1초라도 빨리 하련솔이 나았으면 바랐다. 아프지 않은 그는 어떤지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얼른 활기를 되찾고 힘을 내서, 그 착한 성격이 약점이 아니게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기절했나 싶게 조용하던 하련솔이 두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속눈썹의 감촉에 이림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어 번 더 그의 손금을 간질이다, 하련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다른 무화들…, 그러니까… 이차혁을 놔두고 날 불렀다던데….”
깊이 가라앉아 평소보다 반 톤 정도 낮은 목소리로, 기껏 건네 온 말이 그랬다. 이림범은 황당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코웃음 쳤다. 여기서 왜 이차혁의 이름이 나오는가 싶었다.
“지금 그게 신경 쓰여?”
“신경 쓰여.”
하련솔의 말은 사실과 조금 달랐다. 이림범이 이차혁을 내버려 두었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그는 분명 박 비서를 보내 침전으로 들라는 말을 전했다. 그 제안을 거절한 건 이차혁이었다.
황제 없는 생활이 일주일째이니 그의 왼쪽 다리가 슬슬 마비됐을 터였다. 휠체어는커녕 목발 짚기도 수치스러워하는 그 성격에, 황제가 부른답시고 냉큼 침전까지 이동해 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칼 같이 거절할 거란 걸 이림범은 진작 알았다. 그럴 줄 뻔히 알기에, 오늘은 보지 말자는 뜻을 담아 일부러 비서를 보낸 것이었다.
지금쯤 저에게 뿔이 났을 이차혁을 생각하자니 입안이 떨떠름했다. 이림범은 ‘으음’ 하고 침음성을 내며 말했다.
“그 녀석이라면 걱정하지 마. 걔가 형을 질투하거나 괴롭힐 일은 없을 거야.”
어지간히 확신 섞인 목소리였다. 토닥토닥 저를 달래는 말에 하련솔이 실소했다.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땡볕 길을 지나 개구멍 쪽마루에 주저앉던, 지친 남자의 발소리가 문득 생각난 것뿐이었다.
‘마지막 선물 같은 거였나 봐요.’
황제에 대해 말하던 부드러운 목소리도 하련솔의 귓가에 메아리로 남았다. ‘친구가 되자’던 이차혁은 쓸쓸하고 외로운 이 같았다. 함부로 그를 동정해선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별수 없이 마음이 쓰이는 게 사실이었다.
‘이래저래 얼굴 비추시느라 바쁘셔서 그런 건지, 제가 아닌 다른 무화가 더 좋아지신 건지….’
그때는 ‘다른 무화’의 정체가 하련솔 자신임을 꿈에도 몰랐다. 아마 이차혁도 매한가지일 거라, 하련솔은 확신했다. 그 음성이 몹시 부루퉁하니 안쓰러웠던 걸 보면 틀림없었다.
형… 하고 저를 부르던 말투도 시무룩하니, 괜스레 신경 쓰이는 데가 있었다. 황제를 많이 좋아하는 듯, 황제만을 바라보며 사는 듯 말하던 이차혁인데, 저는 그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황제를 만나본 적도 없고 황제에겐 관심도 없는 양, 뻔질뻔질한 얼굴로 그를 속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저도 제가 그런 놈인 줄로 믿었으니 별수 없었다.
‘나중에 걔가 알면 상처받지 않을까?’
이차혁을 걱정하느라 생각을 길게 늘이는데, 작은 소리와 함께 감긴 눈꺼풀 위로 손바닥 살이 닿았다.
“형.”
정신 차리라는 듯 그의 얼굴 반절을 ‘텁’ 덮어버리며, 이림범은 그의 머리를 제 가슴에 고쳐 안았다.
“그만 생각해. 다른 놈 생각하지 마.”
딱딱하게 힘이 들어간 가슴에 볼이 눌린 채 하련솔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찰사… 아니, 이림범이 참 열렬하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까지 잡아채려는 모양새가 욕심 많은 아이 같았다. 커다란 흉통 바깥으로 그의 심장 박동이 빠르게 둥둥 울렸다.
심각하게 건넨 말을 응석처럼 받아들이며, 하련솔은 농담했다.
“다른 무화 생각도 안 돼?”
“안 돼. 특히 이차혁은 더 안 돼.”
뜻밖에 이림범의 대답은 빠르고 분명했다. ‘이차혁’ 세 글자를 뱉을 땐 경고가 실린 듯 발음이 더욱 강했다.
말도 안 되는 질투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하련솔은 심드렁했다. 감정 표현이라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큰 충격이 한 차례 그를 흐트러뜨리고 떠난지라, 오늘 감정의 할당량을 다 써 버려 더는 아무런 생각도 기분도 들질 않았다.
대답 없이 멍하니 늘어진 하련솔을, 이림범은 자세를 고쳐가며 단단히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제 침상에 무화를 들여, 그를 향한 감정을 한 아름 껴안고 있자니 이림범은 손에서 열이 나고 뱃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아주 강한 포옹, 그뿐이었다. 그의 열기를 받아줄 사람은 물 먹은 솜인형처럼 축 늘어져, 말을 할 기운마저 없어 보였다.
‘옛날에 아빠가 나 이렇게 안아줬는데….’
황제의 품에 안겨, 하련솔은 완전히 다른 생각에 잠겼다. ‘얘는 힘 조절을 하는 법도 모르나 보다’ 생각했고, ‘내일이면 내 허리에 멍 자국이 남겠는데’ 추측했다.
엉뚱한 잡념에 빠진 무화의 예쁜 입술을 내려다보며, 이림범이 말했다.
“형은 나의 무화야.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무화야.”
“…….”
제가 아닌 다른 생각은 모두 쫓아내려는 양, 한 자 한 자 힘주어 뱉어낸 진심이었다. 그의 손바닥이 만들어낸 어둠을 바라보며, 하련솔은 눈동자를 느리게 굴렸다. 그러면서 그는 이림범이 참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같은 말을 나찰사일 때 뱉었더라면, 하련솔은 ‘개소리하지 마’ 힐난하고 ‘이게 어딜 형한테’ 꾸중하며 주먹을 붕붕 흔들었을 터였다. 한데 같은 말도 황제이신 이림범이 그렇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하련솔은 입을 다문 채 잠잠한 반면, 이림범은 하고픈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무척 많았다.
“내 총애에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밖에는 아무 걱정도, 대비도 할 필요 없어. 그건 황제인 내가 다 할 테니까.”
삐죽, 하련솔의 윗입술이 튀어나왔다. 불만스러운 듯 내려간 입꼬리를 보며 이림범은 소리죽여 웃었다. 그래도 몸의 떨림까진 숨길 수 없었다. 들썩들썩, 마른 웃음의 기운으로 제 상체가 함께 흔들리자 하련솔이 이마를 찌푸렸다.
말없이, 이림범은 제 눈에 어여쁘기만 한 무화의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황제이고 하련솔이 무화여서 좋다고 생각했다. 제가 그의 아픔을 삭여주는 황제여서, 이마에 입을 맞출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작은 입맞춤으로 하여금 좋은 이가 저뿐만은 아님에 감사했다.
“형의 눈도, 몸도 내가 다 고쳐 줄게.”
그러면서 그는 하련솔의 입술이 아닌, 제 손등 위에 입을 붙였다. 아무렇게나 그의 영역을 침범하고, 멋대로 입을 맞대고 들쑤시고파도 참아야 했다.
“계속 나를 좋아하기만 해…. 형이 해야 할 일은 그것뿐이야.”
하련솔의 마음을 얻자면 그가 내놓은, 흐물흐물한 바리케이트를 존중해야 했다. 이림범은 다시는 그에게서 뺨을 맞고 싶지 않았다.
또한 본능적으로 그는 알았다. 마흔한 번째 무화인 하련솔이 지닌 호의에 비해, 제 감정이 유독 크고 무겁다는 것을. 그러니 납작 엎드려 기다려야 했다. 감정을 끌어 올릴 체력조차 없는 하련솔이 건강해지기를, 그 안에 심어놓은 제 씨앗이 슬금슬금 자라 큰 애정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