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40화 (40/135)

40.

문득 희한한 숨소리가 이림범의 귀를 사로잡았다. 식, 식… 두 번에 나뉘어 숨을 들이켜는가 싶더니, 푸우… 입술이 떨리도록 요란한 날숨이 이어졌다. 제 손등에 붙였던 입술을 떼어내며 그는 하련솔의 하관을 다시 살폈다. 반쯤 열린 입술 새로 깊은숨이 식, 식… 연거푸 빨려 들어갔다.

“…….”

하련솔의 눈가를 덮은 손을 천천히 치우자, 곤히 잠든 얼굴이 드러났다. 나찰사의 정체를 알고 놀라 경악하던 충격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림범은 그의 꼭 감긴 눈가와 콧잔등에 남은 눈물 자국을 엄지 끝마디로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고운 콧대를 따라 그리며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기도 했다.

그는 잠기운에 취해 무거워진 하련솔의 몸을 쉽게 움직였다. 땀에 젖은 상의를 조심스럽게 벗겼고, 마른 천으로 지친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한참 간, 아주 많이 운 탓에 잠든 이의 눈꺼풀이 새빨갰다. 제 손으로 막아주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살이 짓무를 뻔했다.

‘누가 보면 내가 밤새 못살게 군 줄 알겠어.’

잠든 이의 목 끝까지 도톰한 이불을 덮어준 뒤, 이림범은 그의 옆자리에 함께 누웠다. 그래도 제 품 안이 편안한가 보다… 생각이 들자 마음이 흐뭇했다. 이내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 안에 팔을 집어넣고, 하련솔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만, 아주 꼬옥 잡았다.

“형. 좋아해….”

기다랗고 예쁜 하련솔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이림범이 중얼거렸다. 하련솔도 잠결에 그 고백을 들은 듯했다. 따듯하고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의식이 꺼지기 직전, 그가 설핏 웃은 것도 같았다.

***

황제의 침전에서 맞이한 아침, 하련솔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스민 햇볕이 그의 무릎 위에 마름모를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휙 들자 높다란 천장과 아주 비싸고 오래되어 보이는 샹들리에가 보였다. 좌로, 우로 얼굴을 돌릴 때마다 나무 가구와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자개장, 균일한 높이로 쌓인 벽돌이 보였다.

‘아, 벽돌이 아니라 책이네.’

두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서, 하련솔은 사방팔방의 풍경을 최대한 정성껏 눈에 담았다. 어제는 눈물을 펑펑 쏟도록 아프던 눈이, 오늘은 맑은 물에 씻어내린 뒤 다시 착용한 듯 말짱했다. 두통도 사라진 지 오래였고, 매일 아침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감과 덜 잔 듯한 찝찝한 감정도 없었다.

문정궁에 온 이래 가장 상쾌한 순간이었다.

“…와.”

제 뒤통수에 지어진 까치집을 탈탈 털어내며 그는 감탄했다. 어젯밤 이 침전에 들어섰을 땐 볼 수 있는 게 온통 어둠뿐인 데다 마루를 밟는 소리며 묵직한 나무 냄새, 음성이 커다랗게 울리는 공간이 모두 위협적으로 느껴졌었다. 한데 부족하게나마 돌아온 시력으로 눈을 떠보니 이곳은 매우 아름답고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 하련솔은 여러 군데에서 스며든 햇볕이 좌우로 늘어나며 번지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천장은 물론이고 사방이 꽉 막힌 전각임에도, 적재적소에 풍부하게 스민 볕이 야외 같은 느낌을 줬다.

그제야 왜 이림범이 제 처소를 ‘개구멍’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넓고 환한 그의 침실에 견주자면 하련솔의 처소는 쥐구멍이라 불려도 타당했다.

‘나찰… 아니, 황제는 어디 갔지?’

자리를 비운 그의 행방을 궁금해 하던 차, 기다렸다는 듯 통로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보폭이 넓고 성큼성큼 걷는 발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과연 호랑이는 호랑이구나 생각하는데, 이림범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크게 울렸다.

“솔은?”

“깨어나셨습니다.”

그에 하련솔은 ‘악’ 소리를 내도록 놀라고야 말았다. 시종의 대답 소리가 바로 제 등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며 그가 경악하자, 여태껏 말짱하게 선 채 자리를 지키던 시종도 덩달아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쿵, 쿵… 가까워지는 황제의 발소리를 들으며 시종이 얼른 허리 숙였다. 하련솔도 어째선지 마음이 급해서, ‘어어’ 하고는 괜찮다는 수신호를 마구잡이로 보냈다. 이내 벌컥 미닫이문이 열리고, 이림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야?”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고개 들었다가, 하련솔은 더욱 당황했다. 대나무 발을 지나 저에게로 다가오는 이림범의 인영이 전에 없이 선명했다. 커다랗고 길쭉길쭉한 몸의 형태는 얼핏 훑어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게 훌륭했다.

“아, 니…. 아무 일도 아니….”

멍하니 중얼거리는 하련솔 앞에, 이림범은 무릎을 쭈그리며 가볍게 앉았다. 화려한 곤의를 입었으나 걸치기만 하였을 뿐 앞을 죄 풀어헤쳐 놓아, 흩어진 밑단이 부채꼴을 그리며 바닥에 끌렸다.

“잘 잤느냐. 솔아?”

그러더니 낯선 어투로 무뚝뚝하게 말을 뱉었다. 어리둥절한 와중에 하련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기 많은 이림범이니, 저를 무어라 부르건 그러려니 한 것이었다. 반면 이림범은 애써 무표정한 얼굴에 심드렁한 눈빛을 내보였다. 손짓으로 시종을 물리며 그는 보는 눈이 죄 사라지길 기다렸다.

마침내 너른 공간에 단둘이 남아, 이림범이 씩 웃었다.

“형. 이제 내 얼굴 잘 보여?”

하련솔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눈앞에 놓인 이림범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했다. 눈썹과 눈이 한데 뭉쳐 얼룩 같았고, 코의 음영이 분간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입술도 윤곽은 없고 색만 있었다. 그래도 붉은 부위가 말소리를 따라 일렁이는 것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응. 잘 보여. 잘 생겼네, 너….”

우쭐한 태도로 기대에 찬 이림범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련솔은 거짓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면 아주 잘 보이는 것이라고 내심 만족했다. 잠들기 전까지 저를 안아준 이림범에겐 고마운 마음이 컸다. 황제의 침전에서 밤을 보내면 이렇게나 좋아지는구나, 참 마법 같다… 그런 생각도 절로 들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이림범의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하련솔이 물었다.

“…이제는 널 뭐라고 불러야 해?”

“황제 이름도 모르고 입궁했어?”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 빨랐다.

잠시간 하련솔은 머뭇거렸다. 막상 입에 담자니 낯설 뿐, 황제의 이름 석 자야 알긴 알았다. ‘산 호랑이’ 황제라, 성은 이림이고 이름이 범이었다.

“그럼… ‘범아’.”

오래 주저한 끝에 하련솔이 그리 불렀다. 그의 눈앞에서, 입술의 다홍빛깔이 길게 늘어나더니 이내 역삼각형을 그렸다. 함박웃음을 짓는 듯했다.

“응. 솔이 형.”

그를 따라 하련솔도 미소 지었다. 포근한 아침이 안겨주는 편안한 분위기, 눈앞에 놓인 이림범이 풍기는 신난 듯한 기운, 지저귀는 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로 인해 그는 머릿속이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그의 머리 안에 깨어있는 이성의 조각은 아주 작고 미약했다.

그 조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나,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성의 생각은 늘 맞았다. 처음 이 궁에 발 들이던 날 세웠던,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자면 하련솔은 지금 황제의 침전에 있어서는 안 됐다. ‘범아’ 하고 그를 부르고 ‘솔이 형’이라 그에게서 불리며, 그의 손을 잡고 그의 이부자리에 몸을 비벼서는 안 됐다. 품위 유지비를 연금처럼 타 먹으며 가늘고 길게 사는 변두리 백수의 삶에서, 그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닌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하련솔은 대뜸 닥쳐 온 현실감각에 두 눈을 끔벅끔벅하는데, 덩치가 산만 한 호랑이 황제께서는 그 앞에서 싱글벙글했다. 몹시 귀하고 예쁜 것 구경한다는 양, 절 보는 그의 두 눈이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모자란 시력으로도 그 빛을 읽어내긴 충분할 지경이었다.

“아쉽다. 형이 일어날 때까지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침 회의를 다녀오느라 바빴어.”

“아…. 그랬어?”

제 정수리를 덮도록 커다란 황제의 그림자 아래에서, 하련솔은 얼떨떨하니 미소 지었다. 그를 따라 흡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이림범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날은 많으니까.”

언제든 그를 제 침전에, 몇 번이고 다시 눕히겠노란 확신으로 가득 찬 젊은 황제 앞에서 하련솔은 개구멍을 생각했다. 제 조그마한 처소로 돌아가, 어두운 방 안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초롱이 가져다준 약과나 먹으며 세 시간쯤 낮잠을 자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인 뗏목을 타고 소탈하게 항해하던 그의 그물망에, 원대한 장래를 지닌 대단한 존재가 낚이고야 말았다. 망망대해 위에서 하련솔은 길을 잃어버렸다. 노를 쥔 자는 진작에 이림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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