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결국 이림범의 신경질이 끓는점에 다다랐다. 천 번 굽히고 만 번 양보하자던 마음이 쉽게 휘발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보기 좋게 미소 짓고 듣기 좋게 ‘범아’ 하고 저를 달여 놓던 하련솔이었다. 그가 불어넣은 기대감에 심장이 빠듯해져, 이림범은 큰 결심을 했다. 하련솔을 제 곁에 앉히고, 그를 향한 제 마음을 남들 앞에 드러내는 건 이림범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하련솔이 싫단다.
“하….”
생각할수록 열 받고 곱씹을수록 황당했다. 기가 막혀, 이림범은 선 자리에서 몇 번이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면 오늘 오찬에는 곶감 쌈이 나왔다. 반듯하게 자른 곶감 가운데 호두를 넣고 돌돌 만 간식이었는데, 그걸 보니 하련솔이 생각났었다. 즉석에서 손님이 선물한 간식인 데다 양이 적으니 개구멍까지 하사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러게 불러 줄 때 진작 나왔으면 좀 좋았을까? 고운 옷 입고 제 옆에 앉아, 산해진미 가득한 식사로 보신하고, 곶감으로 혀를 닦고 호두로 입의 심심함을 달랬으면 좀 좋았을까…. 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인데 몰라주니 섭섭했다. 섭섭하니 아쉬웠고, 아쉬우니 불만스러웠다.
제 말로는 저에게 불운이 다 쏟아졌다던데 이제 와 보니 틀린 소리였다. 하련솔에겐 제 발로 복을 차는 재주가 있었다.
‘안 되겠어. 아주 혼쭐을 내 줘야지.’
무화가 지닌 나쁜 습관을 고쳐주는 건 응당 황제의 몫이었다.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서, 이림범이 말했다.
“선물 받은 곶감 좀 내와라. 그릇에 담고, 포장해서 가져와.”
“네, 폐하.”
묵직한 재킷과 장신구를 떠받듯이 챙겨 떠나며, 시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림범은 얼른 옷장으로 가 손에 잡히는 대로 진갈색 철릭을 꺼냈다. 그대로 대충 걸치고 나서려다, 그는 멈칫했다. 몸을 돌려 주춤주춤, 거울 앞으로 가 제 모습을 비추어 보고는 입었던 철릭을 다시 벗었다. 대신에 색이 고운 남색 철릭을 찾아 제 목 아래에 대 보았다. 이제는 하련솔의 눈이 완전히 나았으니, 남몰래 개구멍에 들르더라도 그에게 보여주기 예쁜 옷을 찾아야 했다.
주섬주섬 앞섶을 여미자니 제 옷의 가짓수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큼직한 행사용 화려한 한복, 공식적인 자리에서 걸칠 제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제를 꾸밀 장신구는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적당히 보기 좋으면서 너무 화려하진 않고, 각을 잡은 티는 안 내면서 제 몸에 딱 맞는 옷이 없었다. 이제 이림범에게는 그런 옷이 계절별로 열댓 벌은 더 필요했다.
마침 가을이 오고 있으니, 황실 한복을 전담하는 선생에게 연락할 때가 됐다. 그 김에 하련솔의 몸에 맞는 꼬까옷도 스무 벌만 지어주면 좋을 성싶었다. 치수는 두 배는 더 넉넉하게 지어야겠다. 그러면 한 계절쯤 지난 뒤에 딱 맞게 될 터였다. 제가 그만큼 살찔 때까지 먹이고 돌볼 테니 말이었다.
“흠.”
남색 철릭의 매듭을 지은 뒤엔 허리띠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크고 화려한 장신구나 두껍고 무거운 허리띠보다는 단순한 형태의 허리끈, 조아를 선호했다. 검은 끈과 붉은 끈을 양손에 쥐고 고민하다, 붉은 것으로 겨우 결정을 마치고 제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살피는데, 등 뒤에 선 웅 실장이 함께 비쳤다. 한 번 잠행에 동행해 보았다고, 그도 몰래 나설 준비에 한창이었다. 까까머리를 덮고 있던 군복 전립을 벗었고, 새파란 전대도 술술 풀었다.
그에 이림범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참 웃기는군…. 황제로서 편하게 들르면 되는 일인데.’
그러자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대낮에 개구멍을 찾아가려니 저도 모르게 나찰사 행세할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차에 시종이 보자기를 가져와 두 손으로 내밀었다. 평소 식탐은커녕 음식의 맛이 좋다 싫다 표현조차 없는 황제께서 먼저 간식을 찾으시니, 수라간에서 야단법석을 떨며 온갖 종류의 한과를 5단 도시락에 담아낸 것이었다. 덕분에 커다랗게 각진 보자기가 제법 묵직했다.
육각형으로 각진 보자기를 제 손에 직접 들고, 이림범은 쉴 틈 없이 침전을 나섰다. 웅 실장만 뒤에 달고 뛰다시피 하며 개구멍에 도착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 담장을 훌렁 넘었다. 그러곤 복합문 앞으로 가 문고리를 덜컥 쥐는데, 제 행실이 과연 황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
옷을 갈아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불한당처럼 처소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이리 오너라.”
그리고 하련솔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반상 앞에 앉아, 그는 불청객을 홱 올려다봤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동자는 빛이 드니 더욱 커 보였다. 초롱초롱한 눈빛 덕분인지 표정도 더욱 풍부해진 듯했다. ‘너 때문에 놀랐잖아’ 하는 양 적반하장으로 지어 보이는, 저 뻔뻔한 표정 말이었다.
“뭐야, 갑자기….”
하련솔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 번질번질하니 예쁘장한 얼굴이며 느긋한 태도를 보자마자 황당해, 이림범이 큰소리쳤다.
“형, 진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러자 하련솔의 두 눈썹이 으쓱 움직였다. 반상 밑으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그가 물었다.
“점심 먹으러 간 거 아니었어?”
이림범이 ‘허’ 하고 헛웃음을 날렸다.
“오찬 끝난 지가 언젠데 헛소리야. 형이야말로 선약은 잘 끝내셨나 봐?”
“아….”
반상 위에 놓인 두 개의 잔을 손가락질하며 건넨 말이었다. 유리잔 바닥에 식혜 밥알이 옹기종기 남아 있었다. 그나마 양심이 조금은 살아 있는지, 하련솔도 멋쩍은 듯 눈을 굴렸다.
“미안. 갑자기 밖으로 나오라니까 부담스러워서….”
“부담은 뭐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같이 밥이나 먹자 그랬지, 누가 무대 위에서 장기자랑이라도 해 달랬나? 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었다. 잔소리를 콸콸 쏟아낼 작정으로 이림범은 뻔뻔한 무화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단숨에 굳혔다.
하련솔의 허벅다리 위에 놓인 두꺼운 책의 정체는 일반 소설이 아니었다. 점자 글씨를 입체적으로 새겨놓은, 시각장애인용 학습지였다.
그 순간 이림범은 찬물을 덮어쓴 기분이었다.
“형.”
낮은 목소리가 불퉁하게 튀어 나갔다.
“이따위 걸 왜 보고 있어? 이왕 회복했으면 유지할 생각을 해야지….”
그러자 하련솔이 두꺼운 책장 위에 손바닥을 미끄러뜨렸다. 오돌토돌한 감촉을 느끼며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방 차원에서…. 조금이라도 잘 보일 때 배워두면 좋잖아.”
“‘조금이라도’?”
하련솔의 쭉 뻗은 다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림범은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무릎을 쭈그리고 앉자 하련솔의 마른 다리가 그의 두 발 사이에 놓이게 됐다. 확 좁혀진 거리에 당황해 몸을 굳힌 하련솔에 비해 이림범은 목표를 갖고 움직였다. 그는 하련솔의 흰 턱 밑에 제 손가락을 붙였다. 검지 하나로 아래턱을 받치고 오른쪽으로 휙 돌리자 하련솔의 얼굴이 쉽게 움직였다. 이림범에게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도 우측으로 향했다가, 다시 느릿느릿 이림범을 좇았다.
“어, 뭐 하는 거야…?”
재차 왼쪽으로 휙, 이림범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빠끔 입을 벌린 채 하련솔이 왼쪽을 바라봤다. 갈색 눈동자가 또 한 번, 뒤늦게 이림범을 좇았다.
그를 향해 이림범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 숙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그는 우물쭈물하는 하련솔의 어여쁜 눈을 들여다보았다. 제 두 눈을 좇아 움직이기는 하는데, 자세히 보니 시선이 마주친다는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눈빛이 뿌옇게 흐려졌다.
“…완전히 고치지 못했단 거야?”
이림범이 물었다. 탄식 섞인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조그마한 처소 방안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의 숨결을 뺨으로 느끼며 하련솔은 입을 다물었다. 콧잔등과 두 뺨이 보들보들하니 태평하게 보이던 하련솔의 얼굴에 아주 옅은 낭패의 기운이 서렸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개화병 증세가 완전히 낫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아진 척 황제를 속였다는 사실을, 이림범은 서서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 일은 회복이 더딘 하련솔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고쳐주지 못한 이림범 자신의 문제였다.
“…….”
대뜸 밀려드는 자책에 휘말려 이림범은 이를 꽉 악물었다.
십여년 전 베스트셀러로 손꼽혔던 소설, <타오르는 꽃>에서는 환갑이 넘은 황제가 제 자식 세대 무화와 사랑에 빠졌다. 해당작은 시대상이 변하고 인식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문제작으로 손꼽히게 되었으나, 그와 같은 이야기가 대중이 품은 판타지를 대변함은 분명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전대 황제는 경복궁에서 생활했던 데다 가피 스님의 조언에 따라 문정궁에 무관심했다. 진작 입궁하여 생활 중인 젊은 무화들이 있건만, ‘내가 관할할 게 아니다’ 하며 챙기지 않는 식이었다. 지병이 악화해 제 건강도 시들어가니 남을 배려할 기분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냉담한 아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의 외면은 효과적이었다. 이차혁을 비롯한 죄 없는 무화들이 앓다 죽지 않게끔 이림범은 주기적으로 아버지에게 연락해 문정궁을 돌봐 주길 부탁했고, 해외에서의 예정이 죄 틀어지도록 자주 한국에 들러야만 했다.
당시 이림범이 하는 일이라곤 문정궁 곳곳을 느릿느릿 거니는 게 전부였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무화들의 상태가 무척 좋아졌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한자리에 앉아 말 한마디 섞지 않았음에도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그만큼 효험이 좋은 것을 확인했기에, 문정궁으로 제 침전을 옮기기로 결정 내린 거였다. 그러면 일일이 무화들과 몸을 섞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었다.
전부 이림범이 젊은 황제이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그는 생각이 빨랐고 딜레마를 쉽게 느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성욕 없는 관계를 맺는 일은 그 자신에게도 끔찍한 일이었고, 무화에게는 더더욱 나쁠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저를 향한 무화들의 고백을 단 한 건도 진심이라 믿지 않았다. 하나 같이 병을 고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무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 궁에 사는 이들 전부가 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단지 황제라는 허상만 좇고 있다고 느꼈다.
의심 많은 이림범은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도 아주 예민한 저울을 가져다 댔다. 그의 저울은 감정의 무게를 측정하는 법을 몰랐다. 제대로 된 애정이 저울판 위에 놓인 기억도 까마득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마흔이 넘는 수의 무화는 트로피도, 자랑거리도 아니었다. 그저 의무에 불과했다. 그들 모두 문정궁에서 살기에 모자람 없이 평온한 것이야말로, 이림범의 트로피이고 자랑거리였다. 무화를 고치는 게 황제의 상징이고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련솔의 회복이 답답하리만치 더딘 것은 하련솔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황제인 이림범 자신의 무능이고 잘못이다.
‘왜 하필… 하필이면 형이 이렇게 아픈 거야?’
이마를 찌푸리고 탄식하기도 잠시였다. 이림범은 이내 생각을 고쳤다. 평생 마음 줄 일 없는 다른 무화가 이처럼 앓는 것보다야 차라리 하련솔이 아픈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밤새 끌어안고, 손을 잡고 한 침상에서 머물러도 낫지 않는다면,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더욱 밀접한 총애가 필요하단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이림범에게는 기꺼이 하련솔에게 그 총애를 쏟아낼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하련솔의 마음이었다.
“범아.”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볼수록 알쏭달쏭하고 알수록 희한한 무화, 하련솔이 입을 열었다. 야속하리만치 보기 좋은 입술로 그가 속삭였다.
“너한테서 달콤한 냄새 나. 간식 가져왔어?”
“하!”
이림범이 웃었다. 이마가 일그러지고 턱에 홈이 파이도록 골몰한 끝에 터져 나온, 허탈하게 큰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