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지금 간식이 중요해?”
이림범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 간식 보따리로 향했다. 황제가 직접 몸을 움직이자 마루 위에서 쿵, 소리가 났다. 호위 실장 김웅진과 처소의 시종 초롱이 동시에 한 발짝 다가오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림범은 그들에게 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하지 말라는 듯 복합문을 닫아 버렸다.
연분홍빛 고운 보따리를 풀어내자 달콤한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도시락의 4단 가득 곶감 쌈을 포함해 색색의 한과가 어여쁘게 담겨 있었다. 맨 아래 단에는 한입 크기의 과일이 가득했다. 조그만 반상이 꽉 차도록 도시락을 펼쳐 놓으면서도 이림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밥 한 끼 못 먹을 정도로 눈이 안 보여? 그 정돈 아니잖아. 그렇다고 해도 나왔어야지. 그럴수록 나왔어야지. 내 곁에 있으면 더 좋아질 건데, 그걸 왜 거절해? 오찬 자리의 어디가 그리 부담스러웠어? 극장에서 보자, 침전으로 들라는 말은 왜 싫었어, 대답해.”
“범아. 뭐가 그리 급해….”
그는 열렬한 반면 하련솔의 음성은 느릿했다. 노곤노곤하니 아픈 이의 피로감과 약간의 게으름마저 실렸다.
그 바람에 이림범은 조금 부끄러웠다. 하련솔이 차분하게 저를 달래는 순간, 그는 안달복달하는 스스로를 어린애처럼 느껴야 했다. 그건 아주 생소하고 서투른 감각이었다. 세상 누구도 그를 함부로 어리게 보지 못했고, 그 또한 누구 앞에서건 이토록 유치해진 적이 없었다.
“…형이 날 이렇게 만들잖아.”
불퉁하게 말을 뱉자마자 이림범은 후회했다. 그마저도 어린애 같은 투정에 불과했다.
정작 어린애 시절에 그는 얌전하고 조숙했다. 어지간해선 울지 않았고 투정 부리는 법 없었다.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고요하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그런데 오늘, 하련솔 앞에만 서면 왜 이리도 돌변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처럼 굴면 될 일인데 그게 어려웠다. 하고픈 말을 삼키고 갖고픈 것은 포기하며 의무만 챙기면 될 일인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내 하련솔이 점자 학습지를 내려놓았다. 이림범을 향해 무릎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방의 중앙 자리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더니 하나뿐인 등받이 의자에는 제가 앉고, 납작한 방석을 꺼내놓더니 그 위를 탁탁 두들겼다.
“자, 여기 앉아 봐.”
처소의 주인이 누가 됐건 간에 황제가 상석에 앉아야 하건만, 하련솔은 궐의 법도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 예의 없고 친근한 태도는 오히려 이림범을 순순하게 만들었다.
조곤조곤 달래주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부드러운 사과에 이림범의 미간이 슬그머니 펴졌다. 벌써 두 번째였다, 하련솔이 그를 잠잠하게 달래놓는 것이.
“네가 이렇게 속상해할 줄은 몰랐어. 나야 어차피 같은 궁 안에 살고 있고, 언제든 볼 수 있는 무화잖아. 그래서 네가 아쉬워하지 않을 줄 알았지.”
이림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견과는 완전 반대지만, 듣고 보니 하련솔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오히려 저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들은 말을 곰곰이 곱씹는 이림범에게, 하련솔이 제 속내를 마저 털어놓았다.
“너도 알다시피 나…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데에 관심 없어. 자신도 없고. 솔직히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편해.”
이해하기 쉬운 얘기였다. 하기야 하련솔이 오죽 예뻐야지 말이었다. 두 눈은 시골 강아지처럼 순하고 귀여운데 이목구비는 정교하고 세밀한 게 도시적이고, 손목 발목은 말라빠져 가여운 한편 힘없이 늘어진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는 묘하게 육감적인 데가 있었다. 개화병을 앓느라 몸은 마르고 살은 파리하게 된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화가 되기 전엔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스물아홉 평생 껄떡대는 치들을 피해 다니느라 고생했을 터였다.
타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온 이림범이기에 그 피로감을 이해했다. 저야 큰 덩치에 사내다운 외형을 지녀 얕보일 틈 없다지만, 하련솔의 경우는 또 달랐을 것이다. 안기고 싶어 달려드는 이와 안고 싶어 달려드는 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문정궁에서도 평생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련솔이 말했다.
“…무화들 간의 암투 같은 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암투는 무슨 암투. 21세기 법치국가에서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
그 사이에 이림범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져 부드러웠다. 흐트러진 하련솔의 앞머리를 빗겨주는 손길도 다정했다. 고분고분 머리를 내어주며 하련솔이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잖아…. 난 정말 운이 나빠. 언제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른다고. 그래서 여태까지 황제랑 엮일 만한 일은 무조건 피해온 건데….”
그래. 그렇구나… 하고 반복적으로 끄덕이려던 이림범의 고개가 우뚝 멈췄다. 이내 그는 두 눈을 찌푸리며 머리를 털어내듯 흔들었다.
“잠깐, 잠깐만.”
방어적으로 두 손을 올리고 이야기를 끊어놓자, 하련솔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오른손 검지를 추켜올리며 이림범은 불쑥 치민 의심을 끄집어냈다.
“그러니까… 내 관심을 끌기 싫어서, 이제까지 일부러 날 피했다는 거네?”
“어?”
구태여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련솔의 자백과 지난날의 경험만으로도 의심이 확신으로 굳혀지긴 충분했다.
“그런 거였어…. 와….”
이림범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리며 감탄했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허허 실소도 연이어 흘렸다.
“여태껏 오찬도 마다하고, 날 보러 마중 한 번, 배웅 한 번 안 나온 것도 일부러, 생일연에 빠진 것도 일부러 그랬던 거야. 날 피하느라고. 그렇지?”
이림범이 추궁했고,
“응. 그땐 네가 황제인 줄 몰라서 그랬지.”
하련솔의 대답은 재빨랐다. 일말의 지체도 없이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 진작 말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가서 생일 축하 노래 불러줬지.”
“허…, 하, 뭐라고? 뭐… 뭐 이런 무화가 다 있어? 이 궁 안에서 무화라는 이름으로 살 거면, 최소한의 의무는 다해야지. 불순한 의도를 품고 감히 황제의 생일연에 불참해?”
“참나….”
열이 올라 추궁하는 황제 앞에서, 하련솔은 도리어 한숨을 푹 쉬었다. 두 눈을 내리깔고 뱉어낸 소리는 이림범을 황당하다 못해 멍하게 만들었다.
“…‘참나’?”
두 귀를 의심하며 꼬집어 묻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련솔이 투덜투덜 반론했다.
“너도 중간에 탈주했잖아. 생일연 버리고 개구멍에 놀러 왔잖아. 주인공도 없는 생일연에, 내가 불참한 게 그렇게 큰 죄야?”
“아니…. 그건, 애초에 형이 왔으면 내가 그렇게….”
말문이 막힌 쪽은 이림범이었다. 뻔뻔한 하련솔 앞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제 신분이 황제임을 밝힌 날, 곧바로 납작 엎드려 사과하던 비굴한 무화는 어디로 갔나 모를 일이었다. 불쌍해 보일 지경으로 겁에 질려 손바닥을 싹싹 비벼댈 땐 언제고, 불한당 나찰사건 황제 이림범이건 가식 없는 동일인임을 알자마자 곧바로 이전의 태세를 회복했다. 야트막한 가슴 안에 한 치의 의심도 남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함부로 접근해서는 친분을 쌓고, 뒤돌아보니 제 지아비인 황제라는데도, 하련솔은 이림범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나를 믿지?’
이림범은 저를 편안하게 대하는 하련솔이 신기했다. 말 한마디 져 주는 법이 없어 야속한 한편 고마웠다. 그런 하련솔이라면 이림범은 이길 수가 없었다. 제 패배를 시인하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 끝에 말이 붙었다.
“이런 대화는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 정말.”
“나도 그래.”
그를 따라 하련솔이 실실 웃었다. 얼굴을 들고 꾸밈없이 헤실거리는데, 그 모습이 천진한 아이 같고 또 예뻐서 심장이 쑤셨다.
검은 눈동자에 하련솔을 담고서 이림범은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한층 차분해진 음성으로, 그는 황제가 아닌 남자로서, 무화가 아닌 하련솔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형. 나랑 영화 보러 가자. 아무도 모르게, 극장에서 형이랑 나랑… 단둘이 보는 거야. 어때?”
“‘단둘이’?”
“그래. 영화관에서 팝콘 먹은 지 얼마나 됐어?”
뒷말은 가볍게 던진 미끼였다. 무화가 되어 입궁한 뒤로는 그럴싸한 문화생활을 못 했을 테니, 적어도 그 기간이 한 달 이상일 거라 짐작하며 건넨 질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련솔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몇 초간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불확실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모르겠는데…. 한 6년 됐나?”
“…….”
“헌혈하고 받은 쿠폰으로 본 적 있어. 되게 재밌었는데.”
뜻밖에 심각한 답이 돌아온 순간 이림범은 하련솔의 시력이 덜 회복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못 감춘 탓에 하마터면 분위기가 무안해질 뻔했다.
애써 밝은 음성을 내어, 이림범이 농담했다.
“그 몸으로 용케 헌혈을 했네?”
그러자 하련솔이 하하 웃었다.
“응. 하긴 그 뒤론 빈혈이라고 못 하게 하더라고.”
“…….”
재밌는 일이라도 된다는 양 하련솔이 웃는데, 이림범은 속상했다. 동정심보단 애정에 기인하여 더욱 마음이 쓰렸다. 해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눈에 담으며 이림범은 하련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정확한 발음으로 오늘의 데이트를 확정 지었다.
“오늘 밤, 10시 30분. 소극장 앞에서 만나. 그리고 뮤지컬 영화를 보자. 배리어 프리 버전으로 구해둘게. 성우 내레이션 있는 걸로.”
“꼭 없어도 돼. 네가 가르쳐주면 되잖아.”
하련솔의 대꾸는 가뿐했다. 데이트를 승낙함과 동시에 이림범을 두 배로 기분 좋게 하는 말이었다.
“그래.”
두 눈이 아주 가늘어지도록 함박웃음 지으며, 이림범은 그의 어깨에 코끝을 붙였다. 그러곤 얇은 옷깃 위에 입을 맞췄다.
“이번엔 나 바람맞히지 마.”
유쾌한 애걸을 남겨두고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제가 떠난 작은 방 안에 달콤한 조청 향기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