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문정궁 내 소극장에 40인석 영화 상영관을 지어놓기란 이림범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제 세대의 무화들이 폐쇄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하게끔 하는 데에 늘 신경을 기울였다. 그런 면에서 이림범은 특이한 황제였다. 그는 이차혁을 제외한 어느 무화도 딱히 사랑하거나 아껴주질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성실한 담임 교사처럼 그들 모두를 세심하게 살피곤 했다. 이 상영관도 그 꼼꼼한 관심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무화들에게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황실에서 궐 안에 영화관을 짓는다는 소문이 돌자 큼직한 프랜차이즈 계열사에서 앞다투어 연락을 취해 왔다. 상영관 건설을 무료 사업으로 도맡겠단 말과 함께였다. 그들 입장에서야 얼마의 자금이 들건 이득인 거래였다. 문정궁 내에 상영관을 두었다는 사실만으로 누릴 수 있는 홍보 효과가 엄청났다.
아니나 다를까, ‘기린관’이라는 이름으로 상영관 건설을 마치자마자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해당 계열사의 영화 예매 애플리케이션에 ‘송현동점 기린관’이 잠시간 노출된 것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이 영화 예매까지 시도해, 40석을 모두 매진시키는 사태까지 생겼다. 티켓 값은 모두 환불했고 ‘송현동점 기린관’은 더 이상 노출되지 않았으나, 기사문과 입소문은 이미 퍼진 뒤였다.
사람들은 그 일을 재밌어했다.
‘무화 팔자 좋다, 스파이더맨도 다 보고.’
우스꽝스러운 농담도 여러 마디 따라붙었다.
정작 문정궁의 무화들은 극장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린관에서는 한 주에 한 번, 그 주의 최신작 혹은 요청에 따라 선별된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그때마다 출석 도장을 찍는 무화의 수는 예닐곱을 못 넘겼다.
기실 이 상영관을 가장 자주 찾는 이는 이림범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모두가 잠들 무렵, 그는 홀로 기린관을 찾아와서는 영화 한 편을 보며 자정을 맞이하곤 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황제의 영화 감상에도 하수인의 노동이 필수였다. 이림범이 극장에 갈까 하고 언급한 날이면 그의 시종은 물론이며 상영기를 담당한 직원까지 분주했다. 직원은 그때마다 구체적인 시간과 황제께서 찾으시는 영화 제목을 전달받았는데, 그녀로서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영화만 가득했다.
그녀는 젊은 황제를 시네필이라 확신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황제를 향해 은밀한 내적 친밀감을 쌓기도 했다. 홀로 극장에 찾아온 늦은 밤마다, 황제는 한국 영화를 서너 편 연이어 보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테두리에 희뿌연 자국이 찍히도록 필름이 닳은 흑백영화를 세 시간 내내 보기도 했다. 찝찝하고 모호한 결말을 지닌 오스트리아 영화, 카타르시스가 없는 예술 영화, 대사 한 마디 없는 다큐멘터리를 틀어두는 날도 있었다.
그런 황제께서 오늘도 홀로 영화를 보겠다 하니, 직원은 기쁜 마음으로 전달 받은 메모를 확인했다. 한데 선택한 영화가 뜻밖이었다.
‘이게 뭐야? <아르꼬 앤 로코: 꿈의 나라>?’
몇 년 전 크게 유행했던 전연령 뮤지컬, 로맨스, 코미디 영화였다. 한 시간 사십 분 내내 노래하고, 춤추고, 연애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재회하는 등 화면은 산만하나 스토리는 무난하여 큰 성공을 거둔 상업 영화이기도 했다. 다른 영화로 착각할 수조차 없게 부제목까지 꼼꼼히 쓰인 걸 확인하고, 직원은 상영기 너머 극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줄지어 종종 들어온 시종들이 갖은 종류의 팝콘과 작은 테이블, 두 개의 술잔을 나르고 있었다.
그제야 직원은 눈치를 챙겨 들었다. 황제가 기린관에서 보내고자 하는 시간이, 오늘만큼은 혼자만의 고독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젊은 황제가 어린 왕자라면, 문정궁은 한 마리의 커다란 여우였다. 황제가 열 시 반쯤 찾아오겠다 말하면, 상영관은 여덟 시부터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노래로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찾아든 그를 최선을 다해 맞이했다.
그리고 직원의 추측이 옳았다. 오늘 기린관을 찾은 이림범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큰 손에는 하련솔의 하얀 손이 꼭 잡혀 있었다. 눈이 어두운 하련솔이 넘어질까 싶어, 중앙 자리로 이동하는 내내 이림범은 그의 어깨를 끌어안다시피 잡아주었다.
그로부터 각별한 에스코트를 받으면서도 하련솔은 무덤덤했다.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그는 푹신한 좌석에 몸을 앉혔다. 기다랗고 편안한 특별석에 두 다리를 뻗으면서는 크게 한숨 쉬기까지 했다.
“휴….”
이림범이 그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폈다.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나와, 보기 좋게 고운 두루마기를 걸친 하련솔이었다. 이림범이 이끄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따라오기도 순순했다. 그런데 얼굴에는 무표정이 걸렸고 입매는 긴장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 맛있는 간식을 가득 대접하면,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뻔뻔한 태도를 보여줄 줄 알았건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뜻밖이었다.
그 바람에 이림범도 내심 긴장했다. 가벼운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데 적절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그는 괜스레 좌석 앞 테이블에 준비된 간식이며 음료를 뒤적거렸다.
“형. 팝콘 종류별로 다 있고, 콜라, 제로 콜라, 아니면 맥주도 있는데… 뭐 마실래?”
그러면서 담요 두 장을 건네자, 하련솔이 제 무릎을 따듯하게 덮으며 목을 길게 뻗었다. 둔한 눈길로 테이블 위를 휘 살피는가 싶더니 그는 어째선지 아주 작게 말했다.
“나… 맥주.”
그에 이림범이 즉시 차가운 잔 가득 맥주 한 캔을 따랐다. 잔의 겉면에 티슈를 감싸 내밀자, 하련솔이 유리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러더니 두툼한 팔 받침대에 그대로 내려놓고, 다시금 말수가 적어졌다.
그 바람에 이림범의 입도 자연스레 다물렸다. 그들은 나란히 자리에 앉아, 나초 두어 개를 어색하게 집어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짧은 휴식 시간 끝에, 마침내 상영관 내부가 완전히 암전되고 스크린에 환한 빛이 끼쳤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누군가 흥얼거리는 콧소리, 박자에 맞춰 땅을 두들기는 구두 소리에 침묵이 달아났다.
흥에 겨운 사람들이 춤을 추며 노래하는 장면을, 이림범은 심드렁하게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데이트는 완전히 망한 것 같았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불러내어 웃긴 영화나 보여주고 있자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고민 끝에 직접 골라낸 작품이긴 하였으나 상업 영화가 안겨주는 감동일랑 지나치게 진부할 게 뻔했다.
가슴 안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는 소파 등허리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제 옆자리를 힐끔 살폈다.
스크린에 반사된 빛을 받는 하련솔의 얼굴이 환했다. 표정은 여전히 얼어 있는데, 깜빡이는 법도 잊은 듯 커다랗게 뜬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뺨에는 늦여름의 꽃잎이 그러듯이 붉은빛이 피었다.
“…….”
재차 눈길을 굴려 스크린을 힐끔, 다시 하련솔의 옆얼굴을 힐끔 살피며 이림범은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팝콘 통을 들고, 천천히 그를 향해 기울여주었다. 그러자 하련솔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달콤한 팝콘을 한 움큼 집어 갔다. 한 입, 두 입 통통한 팝콘을 입에 넣으면서도 시선을 영화에서 떼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이림범은 제 자리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팝콘 통은 여전히 하련솔을 향해 기울인 채였다. 제 옆자리를 향해 가만히 신경을 집중하자 야금야금 팝콘을 집어 가는 손길이 느껴졌다. 작은 손이 소리소문없이 휙휙 오가는 게 꼭 도토리 훔쳐 가는 다람쥐 같았다. 생각이 거기 닿자 절로 웃음이 났다. 마침 유쾌한 장면이 한창이라, 하련솔도 그와 같이 웃었다.
이림범이 기대한 오늘 밤은 이렇지 않았다. 적당히 분위기를 풀어줄 영화 한 편을 틀어두고, 그는 하련솔의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팔걸이를 치워버리고 어깨를 껴안으며 붙어 앉아, 기회가 되거든 입을 맞추며 진도를 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흑심은 모두 휘발된 지 오래였다.
이제 그는 하련솔에게 온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팝콘 한 통을 다 비우고, 두 눈이 축축해진 채 영화에 빠져들 수 있는, 그만의 한 시간 사십 분을 주고 싶었다.
하련솔은 착한 관객이었다. 배우가 읊는 대사에 똑바로 이입하고, 음악이 끌어내는 감정에 고스란히 휩쓸리며 충실하게 영화를 따라갔다. 신나는 노래에 신나 하고, 슬픈 곡조에 슬퍼하고, 화해의 장면에는 감동에 겨워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림범이 뱉은 말은 한 문장뿐이었다.
“저 남자 손에 든 거, 전에 여자가 흘리고 간 스카프야.”
화면 한 귀퉁이에 자리한 작은 소품에 대해 알려주자, 하련솔이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어째선지 이림범은 그 순간이 꿈 같다고 생각했다.
여자주인공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나고, 검은 화면을 엔딩 크레디트가 채웠다. 하련솔은 크게 한숨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재밌다….”
암전됐던 상영관에 조명이 켜졌다.
그제야 이림범은 제 옆자리에 널브러진, 얼떨떨한 표정을 한 귀여운 남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두 뺨에는 전에 없던 홍조가 감도는 게 영락없이 취기에 젖은 모습이었다. 맥주 한 캔에 이렇게까지 취할 수가 있는 거냐고, 놀리며 장난을 칠까 하다 그만 두었다. 전에 비해 풀어진 표정으로 하련솔이 웃는데, 무방비한 미소가 보기 좋아서였다. 그런 그에게 굳이 취했다느니 하는 지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림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제 오른손을 하련솔 앞에 내밀었다. 하련솔이 주섬주섬, 반쯤 벗겨진 신발 안에 발뒤꿈치를 집어넣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힘주어 일으켜 세워주고 앞서 걷자 편안한 듯 저를 따라오는데, 이림범은 그 존재감을 부쩍 보드랍다고 느꼈다.
소극장 밖으로 나서자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밤하늘엔 별이 많았고, 컴컴한 돌길 위를 조그마한 야외 등이 밝혔다. 불 꺼진 전각들과 낮은 돌담을 지나, 두 남자는 묵묵히 걸었다. 개구멍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뻔히 알면서도 이림범은 큰길로만 향했다. 술기운이 오른 듯, 졸음이 아른거리는 두 눈을 느리게 끔벅거리며 하련솔이 그 옆에 나란했다. 오가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서로 간에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산책이었다.